모락산~백운산~덕성산~오봉산(의왕)
모락산 385m, 백운산 567m.덕성산 151m, 오봉산 205m
2011.3.16.수요일 맑음
참석인원 : 2명 산새랑 둘이서
청주 6:10 -조치원역 6:30 ~6:40 -천안역 7:40 -수원역 7:45 ~7:52 -전동열차 -군포역 8:09 -LG트랙터,다이아몬드공구 샛길따라 -개울 징검다리 건너면 금봉테크노밸리 ~금봉테크노밸리 좌측골목으로 8:25 -포도원사거리 신호등 건너 가구단지길 8:32 -의왕초등학교 8:40 -의왕초등학교옆 산행지 입구 8:43 -능선쉼터안부(좌 LG아파트, 우 의왕초등학교) 8;53 -운동시설(사각정) 8:58 -철게단 -전망대 9:05 - 바위슬랩지대 (우회길 있음) -모락산 9:27 -산소있는봉(모락산 실제 정상) 9:36 -사인암 -계원대입구 능선끝 큰바위 9:47 ~9:53 -좌측으로 절터입구 -로프지대 -절터(절터약수) 10:02 -우측 철망길 5m지나 우측 능선길로 -안부5거리(좌측 2길 능안마을, 우측 경일암) 10;22 -산불감시탑 10:31 -도로(오메기고개) 10:34 -터널위 헬기장 10:37 -안부사거리(좌 백운저수지,우 고속도로) 10:41 -오전공설묘지 입구 10:44 -사거리 안부 이정표 (좌 백운호수,우 오메기) 10:54 - 좌 백운호수 삼거리 11:05 -우 백운사 삼거리 11:14 -백운산 정상 11:17 ~11:28 -통신대우측 철조망 옆으로 -통신대끝 벤치 (나무계단입구) 11:33 -미군부대 헬기장 11:50 -좌측 하산로(의자) 11:55 -쉼터봉 11:59 ~12:24 (중식) -삼거리봉(좌 상광교) 12:30 -이정표(좌 상광교) 12:34 -오름길 계단 -헬기장(상광교종점 2km,지지대고개 4.3km,통신대 0.8km) 12:38 -수의사거리 12:54 -산마루(지지대 954m,상광교종점 5004m) 13:01 -좌 저수지 하산로 13:04 -북수원IC굴다리 빠져나와 지지대고개 13:14 - 도로 건너 지지대비 13:29 -첫번째 송전탑 13:42 - 안부사거리 13:44 -산소옆 송전탑 -작은 탁자 옆 좌측 하산로( 하산로 아래 논 보임) 13:50 -능선삼거리(좌 덕성산,우 오봉산) 13:51 -좌측하산로(하산로 넓고 좋음) 13:56 -송전탑(철송단지쪽 조망좋음) 13:49 -삼각점봉(151봉, 좌측 하산로) 14:00 -안부사거리(좌 철송단지) 14:05 -고속도로 나오면 우측으로 세멘트길 내려와 굴다리 14:14 -덕성산 14:21 ~14:25 -다시 돌아와 151봉 삼각점 14:53 -다시 삼거리(좌 덕성산,우 오봉산) 15:01 -조금지나 우측 하산로 -삼거리봉(좌 산소 옆으로 내려가면 동물통로 공사 진행중, 직진 능선으로) 15:08 -도로공사중인 다리 아래쪽으로 빠져나와 마을(의왕시 고천동 고고리) 15:21 -안부사거리 (좌 철송단지쪽,우 의왕시청쪽) 15:29 -이동공동묘지 -이동고개 삼거리 15:35 - 산소있는 삼거리(좌 당정역쪽,우 오봉산) 15:46 ~15:50 -오봉산 정상 15:57 ~16:00 -도로 굴다리 16:18 -도로 건너고(새마길) 16:23 -당정푸르지오 106동앞 도로 16:26 -당정역 16:31 ~16:42 -수원역 16:53 ~17:00 -천안역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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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왕 모락산
의왕 모락산 정상의 산성모락 산성은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 서쪽에 솟은 모락산 정상부에 축조된 산성이다. 이 곳에 오르면 사방으로 수원, 안양, 시흥, 군포, 과천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매우 좋다. 산성이 위치한 곳은 주변에 펼쳐진 평야지대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또한 경기 남부 지역에서 천안-평택-오산-수원-의왕으로 이어지는 교통로와 경기 서부지역에서 남양만을 통하여 화성-안산-군포-의왕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이 곳에서 만나 서울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한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모락 산성의 축조 목적이 한강 유역을 두고 치열한 접전을 벌이던 삼국시대에 경기 남서부 일대의 평야지대를 효율적으로 점령하고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주변 교통로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삼국 시대에 지리적 요충지에 축조된 주요 거점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보여진다. 이후 이 곳은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시에 격전지였으며 현재에도 서울과 경기 남서부 일대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인 서울외곽순환도로가 산성의 북서쪽으로, 1번 국도가 남동쪽으로, 47번 국도가 남서쪽으로 지나가고 있다. 모락 산성은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석축성(산지를 둘러 싼 돌로 쌓은 성)으로 전체 둘레는 820m이다. 전체적으로 복벽이 길고 남벽이 짧은 사다리꼴로 북서쪽이 돌출된 형태이다. 성벽의 잔존외벽은 북벽의 일부에서만 확인되고 있으며 일 부 구간에서 성벽의 단면이 노출되어 있다. 성내 시설물에는 치성(남치성, 북치성, 동치성)과 망대지가 있다. 치성은 성벽이 구부러지는(회절) 곳에 2개소, 샘터로 내려가는 곳에 1개소 등 모두 3개소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북쪽에 시계의 확보가 좋은 곳에 망대를 설치하였다.
[군포 에듀넷에서]
백운산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용인시, 수원시
산높이 : 567.0m
백운산(시흥)은 바라산, 광교산과 능선으로 연결되는 이웃한 산으로 능선은 매우 한적한 편이다. 경기도 의왕시의 백운저수지의 뒷산인 해발 567m의 산으로 서울특별시에서 가까워 찾기 쉬운 산이다. 백운 저수지에서 산행할 경우 임도를 이용한 한적한 산행이 가능하다. 주능선 길은 산행하기에 좋으며 소나무가 많다.
백운호수
의왕시 학의동에 있는 백운 호수는 1953년에 준공한 인공 호수이며, 병풍 처럼 둘러싸고 있는 북동 쪽의 청계산과 남동쪽의 백운산, 그리고 서쪽의 모락산이 만나는 지점에 약 25만평의 평지가 있는데 그 중 11만평이 백운호수입니다.이 호수는 원래 농업용수의 원할한 공급을 목적으로 조성 되었으나 그후 주변의 수려한 경관, 맑은공기 그리고 잘 정돈된 대형주차장과 호수순환 도로로 인해 의왕시민은 물론 인근 수도권 시민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백운호수에서는 라이브 카페, 수상스키, 각종전문 요리를 즐길수 있으며 백운호수를 따라 개설된 호수순환도로는 데이트코스는 물론 라이브 코스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백운호수의 자랑인 라이브 카페는 각종 커피에서 부터 희귀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색다른 차맛을 느낄 수 있으며, 차와 함께 더불어 유명가수들의 라이브 음악은 차를 마시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줍니다.
의왕의 전설
오봉산의 전설
의왕시 고천동에 오봉산이 있다. 원래 산봉우리가 다섯개여서 五峯山 이라고 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峯"이 "鳳"으로 바뀌어 근자에는 "五鳳山"이라고 지도에까지 표기되어 있는 산이다. 이 산은 의왕시 왕곡동에서 시청 쪽으로 오려면 경수산업도로 건너편으로 봉우리 다섯 개가 나란히 바라다 보이고 그 끝에 한 봉우리가 더있어 봉우리 여섯 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어쨌든 五峯山 이라는 표기가 맞는 것이라고 이 마을 古老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오봉산에 얽힌 전설이 의왕시 왕곡동에 있는 청풍김씨의 문중에 전해지고 있으며, 이 이야기는 또한 의왕시의 古老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꽤 오래된 것이다.옛날에 중국에서 어떤 地術師가 무슨 계기로 그만 죄를 얻게 되어 그것도 역적이라는 죄명을 쓰고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조선 땅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하여 온 터라 가진 것도 없고 하여 별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입지도 못하여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이 곳 의왕시까지 와 저자거리의 한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그 초라한 초립동이 차림의 중국사람 곁에 앉았던 청풍김씨 한 분이 그를 딱하게 여기고 집으로 데리고 와 음식을 주고 옷도 새로 마련하여 주면서 며칠 쉬다가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 때 그 청풍김씨댁 할머니가 중환이어서 매우 위독한 상태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이에 그 중국 지관은 할머니의 병환을 살피더니 도저히 소생할 가망이 없음을 판단하고 청풍김씨에게 말을 이렇게 건네었다. " 아무것도 모르는 저이지만 노부인의 병환으로 아무래도 회춘하시기가 어려운 고비까지 이른 것 같습니다. 타국에 와 생면부지인 당신을 만나 나는 겨우 고생을 벗어나 이제 몸도 다 회복하였습니다. 이에 당신께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아무것도 지니지 못하였으나, 다만 중국에서 약간 배운 기술이 있는지라 저 노부인을 모실 산소라도 하나 보아 추천하겠습니다." 청풍김씨는 이 중국 지관의 말이 하도 고마워 함께 산소자리를 보러 나섰다. 저 앞에 바라보이는 오봉산을 건너다 보고 함께 그리로 가자 하였다. 중국 지관의 뒤를 따라 오봉산에 이르러 그 뒤편으로 가니 어느 집 한 채가 있는 곳까지 가서 이 집터가 고지라고 일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중이 될 자리까지 지정하여 주는데 그 자리란 바로 그 집의 장독대가 있는 지점이었다. 청풍김씨는 딱하였다. 아무리 자기 노모님을 모실 자리로서 명당을 추천받았다 하지만 어엿이 살림을 차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집터를 산소자리로 양보해 달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여러 시간을 끙끙거리다가 큰 마음을 먹고 그 집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찾아온 뜻을 말하였다. 처음부터 승낙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역시 그랬다. 뿐만 아니라 그 집 주인에게는 이만저만한 노여움을 산 게 아니었다. 청풍김씨는 결국 사과의 말을 하고는 되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청풍김씨가 그 집터에서 돌아온 그날 밤에, 그러니까 집터를 산소 자리로 양보하여 달라고 말을 건네었다가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사과까지 하고 돌아온 그날 밤에 어찌된 영문인지 오봉산 뒤, 그 집에 불이 나서 몽땅 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또한 이 청풍김씨 댁 노부인도 그 시각에 운명하고 말았다. 마을에서는 이야기 거리가 생겼다. 멀쩡히 집짓고 사는 이에게 산소자리로 내어 달라고 한 것도 이야기 거리인데, 거절하였더니 그날 밤으로 이상하게도 원인 모를 불이 나 집 한채를 몽땅 태웠고, 그뿐 아니라 청풍김씨댁 노부인이 또한 시간을 맞추어 운명하셨으니 더욱 그러하였다. 따라서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청풍 김씨네에서 그 집터를 산소자리로 하려고 일부러 불을 질렀다느니, 혹은 불이 난 것은 그 집터가 청풍김씨네 노부인 산소자리로 이미 하늘이 정해 준 것이어서 그렇다느니, 그것은 하필이면 그 불이 난 밤에 노부인이 운명하실 것이 무엇이냐? 그것으로도 이미 하늘이 정하여 준 것이다 등등 말은 꼬리를 물고 이어나갔다. 어쨌건 산소자리를 위한 이야기가 당시 양가 사이에서 시작되었고 결국은 원만한 합의를 얻어 그 타버린 집터에 청풍김씨는 묘를 쓰게 되었다. 장사를 치르기 전날 중국에서 온 지술사는 다시 청풍김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노부인을 모실 자리도 확정되었으니 저로서도 그간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노부인을 모시기 위하여 땅을 파서 광중을 만들 때 얼마큼 파 내려가면 펑퍼짐한 돌이 부딪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상 더 파지 마십시오. 꼭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옷을 가다듬어 입고는 이번엔 떠나는 인사를 하였다. "이제 저는 중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건곤(乾坤)을 보아하니 죄명이 누명으로 밝혀져 역적의 누명이 깨끗이 씻겼습니다. 저는 이제 떠나야 합니다. 거듭 부탁드리겠는데 광중에 펑퍼짐한 돌이 나타나거든 그 이상 더 파내려가지 마시고 그 돌 위에다 그냥 하관하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더니 훌쩍 길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드디어 장례날이 되었다. 산역을 하고 상여를 모시고 온 집안이 떠들썩 하였다. 산소자리까지 상여를 모시러가 광중이 다 되기를 기다리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일하던 사람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광중을 파는 주위에서 꾸부리고 있던 화장꾼들도 한 몫 거들고 있었다. "더 파야지. 너무 얕지 않아?" "아냐, 그만 파라고 했어. 여기 봐. 돌이 놓여있지 않아?" "그렇지만 이렇게 광중이 얕아서야 …" "상관없어, 더 파지 마." "이럴 게 아니라 상주에게 직접 보이고 결정하세." 결국은 상주인 청풍김씨에게 가서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처분을 바랬다. 청풍김씨는 이 이야기를 듣더니 직접 가 보았다. 분명히 중국 지관이 말한 대로다. 그러나 광중으로서는 너무 얕아 보였다. 그도 혼자 결정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래서 일단 작업을 중단시키고 급히 가족회의를 열기 위하여 산소 가까운 곳에 대기중인 상여 앞으로 가서 구수회의를 가졌다. 이 때 광중을 파던 산역꾼들도 한동안 쉬기 위하여 광중으로부터 멀리 떠나 나무그늘 밑으로 갔고, 다만 청풍김씨네 막내 아우만이 홀로 광중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 광중을 파게 되면 반드시 누군가가 지키고 있게 마련이다. 혼자 광중을 지키고 있던 막내는 지금 말썽이 되고 있는 펑퍼짐한 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슬며시 광중으로 들어섰다. 다시 그 펑퍼짐한 돌 위에 올라 서 봤다. 그런즉 밑에 무슨 돌이 있는지 어떤지 그 돌이 기우뚱거렸다. 무심코 그는 그 돌 한쪽 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밑을 내려다 보았다. 이게 웬일인가? 그 펑퍼짐한, 흡사 구들장 같은 돌을 들어 올리면서 내려다 보는 순간, 그는 '윽!' 하면서 다시 돌을 놓아 버렸다. 그 순간 무엇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 넓적한 돌은 제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그 막내는 놀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 돌 아래 펼쳐졌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돌 밑에는 돌로 된 옥동자 다섯 개가 앉아 있었고, 그들을 향하여 그들 보다 조금 더 큰 옥동자 하나가 서 있었다. 흡사 옥동자 다섯에게 무엇인가 일러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이 막내는 너무 놀라 쳐들었던 돌을 놓는 순간 무엇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생각하고는 그 돌 위에서 이 구석, 저구석 밟아 보았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돌을 쳐들기 전까지는 기우뚱거리던 그 넓적한 돌이 이젠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꽉 제자리에 이가 맞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아까 무엇인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는 바로 그 다섯 개 옥동자 앞에 서 있던 옥동자의 머리가 부러진 것으로 여겨졌고, 그 머리가 부러지기 전에 그 넓은 돌이 그 키에 걸려서 기우뚱거렸을 것임이 분명하였다. 이윽고 상여 앞에서 긴급 가족회의를 열면서 광중의 돌을 제거할 것인가 말 것인가 를 의논하였으나 끝내는 중국 지술사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그 돌위에 그냥 하관을 하고서 묘를 만들었다. 산소가 다 치성되고 나서도 이 막내는 그러한 광경이 너무나 무서워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산소에 관한 비밀은 이 막내만이 알고 그냥 지켜져 온 것이다. 한편 중국으로 돌아간 지술사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꾸중을 듣게 되었으니, 갖은 고생을 겨우 끝내고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이렇게 나무라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너는 너의 목숨을 아껴주고 구해준 조선땅의 청풍김씨 댁을 은혜는 못 갚을지언정 역적의 집안으로 인도하였으니 그럴 수가 있느냐. 어서 되돌아가서 그 산소를 옮기도록 하여라." 아들이 그 연유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선 땅에서는 가장 좋은 길지로 은혜를 갚았다고 생각되는데요." "아직 멀었다. 너는 아직 모르는 것이 있다. 그 자리는 5정승을 거느리고 역적 모의를 하는 또 하나의 옥동자가 있었느니라. 그가 바로 그 집안을 역적의 집안으로 만들 후손이니라." 중국의 지술사는 새삼 자기 아버지의 지혜에 탄복하고 그 길로 다시 조선으로 건너와 청풍김씨댁을 찾았다. 뜻하지 않게 다시 만난 청풍김씨 댁에서는 이만저만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지관은 들어서자마자 자기가 잡아준 산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제의하면서 서둘렀다. 그 때의 청풍김씨의 막내도 한자리에 있었다. 이제는 더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숨겨서는 안되겠다고 판단을 하자 그제서야 여러 사람들, 즉 집안식구와 중국 지관앞에서 그 날, 장례식날 광중에서 겪은 일을 모조리 차근차근 이야기하였다. 자초지종을 듣고 난 중국 지관은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면서, "그럼 되었고, 그 부러진 것이 바로 다섯 개 옥동자 앞에 서 있던 옥동자의 목이 틀림없소. 그렇다면 이제 역적은 사라지고 그 대신 정승이, 그것도 6정승이 나올 것입니다." 하면서 저으니 마음을 놓는 듯 하였다. 그 후에 정말로 이 청풍김씨 집안에는 6정승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저 오봉산 봉우리가 그 산 이름처럼 다섯 개지만 사실은 가만히 바라보면 한쪽 끝에 또 하나의 작은 봉우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모두 여섯 개 봉우리, 즉 6정승을 암시하는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다.
출처 : 의왕시청 http://www.uw21.net/
오봉산의 아기장수 전설
군포시 당정동 새전마을에서 의왕시로 넘어가는 길 옆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이를 '오봉산 장군바위'라고 하는데 이 바위에 얽힌 아기장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아주 옛날에 살림이 매우 어려운 아낙네가 옥동자를 낳았다. 워낙 살림이 가난하여 아기를 낳자마자 우물에 나가 쌀을 씻어 솥을 앉히고 방에 들어와 보니 아기가 간 곳이 없었다.여기저기 둘러 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는데, 이윽고 그 아기가 천장에 올라가 붙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산모는 신기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얼른 끌어 내려 몸을 자세히 살펴보니 갓난아기의 옆구리에 날개가 돋아 있었다.기겁을 한 산모는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 뇌리를 스쳐지나간 것은 '역적'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이었다. 이 아이가 범상이 아니라면 반드시 자라나서 엉뚱한 행동을 할 것임에 틀림없고, 그렇게 되면 집안의 앞날은 뻔한 노릇이었다. 따라서 얼른 문 밖으로 나가 뜰에 놓여 있던 큼직한 맷돌 밑장을 들고 왔다. 그리고 갓난 아이를 이불로 덮고 그 위에 맷돌짝을 올려 놓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순간 뒷산인 오봉산에서 용마가 나와 바위 위로 뛰어내려 오다가 그만 무릎을 꿇고 죽었다. 그 용마는 이 집에 태어난 아기장수를 태워서 하늘로 오르기 위하여 기다리던 말이었는데, 그만 아이가 숨을 거두는 순간 용마도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이 바위에서는 흡사 말 발굽 같은 자국이 남았고 세상 사람들도 이 아기장수와 용마의 이야기를 믿으면서 오늘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삼품의 당상 소나무 전설
의왕시 오전동에 모락산이 있는데 거기에는 당상인 정3품 직함을 지닌 소나무가 있었다. 지금은 그 소나무가 병들어 말라 죽어서 모습을 볼 수 없고 다만 이 소나무에 얽힌 전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의 정조대왕은 효행으로 이름난 왕이었다. 비명에 일생을 마친 부친인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에 쓰고는 1년에 한차례 이상씩 꼭 성묘를 하였다. 드디어는 수원성을 축조하리만큼 자기 부왕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기도 한 왕이었다. 당시에 정조가 한양에서 화산의 자기 부왕 능까지 가는 노정은 대체로, 과천 남태령을 넘어 인덕원에서 쉬었다가 다시 지지대고개를 거쳐서 거동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인덕원에서 지지대고개를 넘어 설 때까지 계속 이 모락산의 커다란 소나무가 시야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정조는 그 소나무가 자기의 행차를 계속 바라보면서 호위하고 있는 것으로 느끼어 기특하다 하여 정3품 벼슬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 후로 이 소나무는 정3품벼슬로서 대우를 계속 누리다가 얼마전에 말라 죽어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모락산의 비극
의왕시 오전동과 내손동 서편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모락산'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慕洛山'이라고 쓰는데 근자에 나온 지도에는 누구의 잘못인지 '帽洛山'이라 표기되어 있어 조속히 바로 잡아야겠다고 이 곳 古老들은 말하고 있다. 이 모락산에 굴이 하나 있는데 이 굴에 얽힌 전설이 이 산의 명칭이 되었다는 민간어원설적인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물밀듯이 쳐들어와 이 곳까지 들이닥쳐 왔다. 온 마을 사람들은 난리를 피하여 간다는 것이 이 모락산 굴로 모두 숨어들어가 피신하였다. 그때 어린아이 하나만이 미처 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굴 밖에서 울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쫓아온 왜군들은 이 아이를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온 마을에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었는데 아이하나가 굴 앞에 서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온 마을 사람들이 그 굴 속으로 피신한 것이라 생각하고 그 굴 입구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굴 속에서 모두가 '몰아서 죽였다'하여 '모라 죽었다'에서 '모락산'으로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순 우리말로 붙인 이름이다. 옛날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의 자리를 빼앗고 왕위에 오르자 사육신·생육신 등의 충신들이 일어났을 때 그 여파가 세종의 제4자이며 세조의 동기간인 임영대군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임영대군은 장님으로 가장하여 이 모락산 기슭에 와서 숨어 살면서(혹은 장님이어서 세조가 차마 죽이지 않고 이 곳으로 귀양 보냈다고 함) 洛陽(중국의 수도 즉 한양을 뜻함)을 그리워 하면서 사모하던(慕) 산 이었으므로 이로부터 산이름을 '사모할 모(募)','낙양의 낙(洛)'으로 하여 '慕洛山'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왕곡동에 전하는 전설
사육신의 한 분인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門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음운에 관한 식견을 넓히려고 원동(遠東) 땅에 머물러 있었던 중국 학자인 황찬(黃鑽)을 십여 번이나 찾아 갔던 일로도 유명하다. 이 성삼문이 한번은 사신으로서 중국에 가게 되어 그 곳에서 묶고 있었던 때의 일이라 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객사에 짐을 풀고 쉬고 있으려니 그 객사의 방에 불을 때고 있는 한 머슴같은 사나이가 중얼중얼 무어라고 외고 있는 것 같아 주의력을 집중시켜 가만히 들어보니, 그 내용이 어떤 대문장가의 글인 것 같은데 공부를 꽤 하였다고 자부하는 성삼문으로서도 그 뜻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상당히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듣고만 있다가 이윽고 밖으로 나가 아궁이 가까이 가서 머슴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당신이 지금 외고 있는 글은 보통 글이 아닌데, 그런 어려운 글을 외면서 어찌하여 이런 객사에서 군불이나 때면서 지냅니까?"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받은 그 사나이는 힐끗 성삼문을 돌아다 보더니, "당신은 누구인데 나의 글 읽는 것을 들었소?" 하며 되물었다. 성삼문은 대답하였다. "나는 조선 땅에서 이 나라에 사신으로 온 성삼문이란 사람이오." 그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더니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아! 그렇소? 당신이 조선에서 유명한 성삼문이란 학자란 말이요?" "유명할 것까지는 없지만, 과연 내가 성삼문이요." "그렇다면 내가 읊던 글귀를 잘 알 수 있을 텐데요. 그런데 그걸 잘 모르겠다니 이상하구려." 하면서 그 글은 저 유명한 아무개의 글로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면 대개 알 수 있는 글이라고 설명하였다. 성삼문은 그제야 그 글의 내용이 어떤 것이라고 어렴풋이 기억이 났지만 그 글을 읽은 것이 한번인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고보니 이 사나이의 문장 수준이 자기와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을 깨닫고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문장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어찌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비천한 생활로 고생을 하십니까?" 말씨부터 존댓말로 바뀌었다. 그 사나이는 한숨을 푸욱 쉬고 나서 대답하였다. "나는 주지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기야 나라고 왜 과거를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과거에서 내가 적어 낸 문장의 내용을 알아 볼 수 없는 심사위원들이 어찌 내 글을 심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즉 내가 쓴 글을 이해할 수가 없다 보니 언제나 나는 낙방을 한 것이고 몇 차례 그러다 보니 이젠 단념하고 말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입에 풀칠 않을 수는 없고 하여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성상문은 그의 말을 듣고 나서 이렇게 일러 주었다. "알만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글재주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는 말이구료. 아닌게 아니라 나 같아도 별 도리 없었겠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하고는 그에게 과거에 임하여서는 당신의 문장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를 말고 한 계단 낮추어서 쉽게 풀어 쓸 것을 가르쳐 주고 다시 그 실제 예를 들어 주면서 다시 한번 과거에 응하여 보라고 권하였다. 주지문은 성삼문에게서 자기가 지나치게 어렵게 알고 있던 내용을 아주 쉽게 배우면서 새삼 문장의 제모습을 파악하게 되었고 재미를 느끼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리하여 성삼문은 사신의 용무를 마치고 귀국한지 얼마 안되어 주지문은 드디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주지문이 급제하여 벼슬이 차차 오르고, 이윽고 무관으로서 높은 직함을 가지게 되었을 무렵에 조선의 성삼문은 저 유명한 수양대군의 단종 폐위에 항거하는 계략이 폭로되어 박팽년, 유응부,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른바 사육신의 충절이 큰 회오리 바람을 일으켰던 것이다.중국의 주지문은 자기가 몇 차례나 과거에 실패하고 객사의 군불을 때어 주면서 호구지책을 강구하던 차에 우연히 성삼문을 만나게 되고, 또한 그의 가르침을 입어 과거에 급제하게 되자 성삼문을 자기의 은인으로 굳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를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조선에서 변이 일어나 성삼문이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분연히 일어섰다. "그렇다. 성삼문 선생이 살아 계신 동안 못 갚은 은혜를 지금 갚아 드림으로써 그 분의 원한을 풀어 드려야 한다." 그길로 자기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향하여 발군하여 얼마간에 압록강 건너까지 당도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주지문의 군사행동을 알게 된 주지문의 친구 몇사람이 놀래어 급히 그를 따라 압록강까지 와서 군대를 쉬게 하고 있는 주지문을 겨우 만나 볼수가 있었다. "여보게, 주장군 어찌된 일인가? 휘하 군대를 다 이끌고 여기까지 오다니…." 주지문의 행동의 저의를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주지문은 결연히 이렇게 대답하였다. "음, 들어보게. 자네들은 내가 오늘이 있기까지 그 처음 계기를 만들어 준 분이 바로 조선의 성삼문이란 학자인 것을 그동안 내가 몇 차례이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지?" "그래, 기억하지. 그런데?" "그런데가 무엇인가? 그 성삼문이 이번에 수양대군 일파에게 몰리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도 알고 있지?" "알고 있지" "그래, 그럼 내 말을 자세히 듣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남의 은공을 입고 출세한 것을 잊어서는 안되지 않는가? 더구나 성삼문은 비록 목숨은 잃었으나 만고의 충신으로 길이 빛날, 그러한 위인일세. 안그런가?" 주지문의 친구들은 이 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어린 단종의 곁에서 선왕인 세종·문종의 부탁을 잊지 않고 오로지 충성을 바친 이야기는 중국 조야에서도 널리 평가되던 이야기였다. "들어 보게" 주지문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 성삼문이 비명에 목숨을 잃은 그 한을 나는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네." "어떻게?" "내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에 들어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뭇 충신들을 학살한 수양대군 일파를 모조리 응징할 생각일세." 주지문의 결의가 보통이 아님을 느끼고 친구들은 어안이 벙벙하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틀림없이 은공을 생각하여 성삼문의 한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했지?" "그랬지." "그럼 내 말을 좀 들어보게" 그 친구는 이윽고 다음과 같은 논리를 세워 주지문의 행동을 견제하였다. "자네는 중국 천자를 섬기는 사람이지?" "그건 틀림없지." "자네가 군대를 이끌고 적의 무리를 쳐 부수는 것은 결국 우리 중국 천자를 위하는 일이지?" "그렇지, 그래 그게 어쨌단 이야기인가?" "그건 틀림없지." "그렇다면, 계속 들어보게, 자네가 거느린 군대는 중국 천자의 군대인데, 자네가 지금 중국 천자의 허락을 받고 군을 동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중국 천자의 명령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네." 주지문이 어안이 벙벙하였다. 사실 그렇다. 자기의 성급한 판단으로, 다만 성삼문의 한을 풀어 주겠다는 일심에서의 행동이었지 그것이 중국 천자의 허락이나 명령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가 스승의 원한을 갚으려는 것은 십분 이해할 수 있으나, 자네가 모시고 있는 중국천자의 허락없이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킨다는 것은 첫째, 중국 천자에 대한 불충이 먼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자기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준 자기 나라 천자에게는 불충을 저지르더라도 자네는 조선 땅의 스승의 원한을 갚으려 드는 것인가? 잘 생각하여 보게." 주지문은 친구의 이 말에 다시 이성을 되찾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친구들의 말은 옳았다. 스승을 위하자니 천자에게 불충을 먼저 저지르게 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 뻔하였다. 주지문은 이윽고 친구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다. "옳네. 옳은 말이야. 내가 지나치게 흥분하였던 것 같네. 고맙네. 고마워."
왕림이란 고장 이름의 유래
의왕시 왕곡동 왕림은 "왕께서 임하시었다"하여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조선조 정조대왕이 화산에 모신 부왕의 능에 참배하기 위하여 친히 서울에서부터 직접 행차하였다는 이야기는 정조대왕의 효성과 함께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그런데 그 길목이 서울에서 과천 남태령을 넘어 지금 의왕시 왕곡동을 거쳐 다시 지금의 지지대고개라고 일컫는 고개를 넘어 화산에 이르는 노정이었다 한다. 그 중 이 왕곡동 언저리에 이르면 한참 쉬어가기 위하여 말에서 내렸다 하는데 그것은 쉬기도 할 겸 이 근처에 묻힌 정조가 아직 세자 시절에 친히 글을 가르쳐 준 청풍김씨 김재의 묘를 지나게 되어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지점에 하마비가 있었고, 때로는 이 고장에 묵으시기도 하였는데 그 묵으시던 행궁터가 현재 고천동사무소가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고 한다. 한편, 세워졌던 하마비는 한국전쟁 전까지 있었는데 그 후에 홍수에 그만 유실되어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러저러한 연유로 이 고장 이름을 '왕이 임하신 곳' 즉 '王臨'이라고 하였는데 '王' 자를 피하여 같은 음인 '旺'으로 고치어 지금의 '旺臨'이 되어 그냥 전하게 내려오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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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역 8:09
오늘 저녁 사무실에서 모임이 있어 가까운 곳으로 산행을 잡자니 마땅한 곳이 별로 없다. 전부터 눈여겨 봐 왔던 작지만 암릉이 있는 모락산을 가고자 하니 산행시간이 너무 짧아 적당한 시간을 계산해 보니 모락산에서 백운산으로 다시 의왕 철송단지 옆의 오봉산까지 따져 보니 9시간 정도는 나올법하여 지도를 대략 뽑아서 준비를 한 후 아침 6시10분 집을 출발하여 조치원역에서 서울로 가는 6:40분 열차에 승차를 한 후 천안에서 승차한 산새님과 함께 수원역에서 내려 다시 전동열차로 갈아 탄후 군포역으로 향하니 전동차안이 금시 미어 터진다. 간신히 군포역에서 내려 동쪽편 입구로 빠져 나간다.
의왕초등학교옆 등산로 입구 8:40
군포역에서 내린 많은 님들이 우리가 가는 쪽으로 길을 잡아 바삐 움직인다. 군포역에서 북쪽으로 조금을 더 가면 우측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길도 좁고 차량도 많아 걷는 사람과 지나는 차량이 거의 스치다 시피 움직인다. 얼마를 가니 길이 갈린다. 다이아몬드공구 공장이 있는 곳에서 우측길과 좌측 LG트랙터 공장 담벼락을 타고 가는 두갈래 길이다. 트랙터 공장 담벼락을 타고 가는 길을 따라 가니 이제는 같이 어깨를 부딪치며 걷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각자의 공장으로 들어가 이제는 우리 둘만이 남는다. 이윽고 작은 개천이 나오며 개울건너 앞쪽으로 금봉테크노밸리 건물이 보인다. 우측 멀리 있는 다리로 돌아서 건너자니 너무 멀다. 개울 쪽을 살피니 징검다리를 놓아 건널수 있도록 하였다. 징검다리를 건너 금봉테크노밸리 좌측 골목을 따라 가니 큰 도로의 포도원 사거리가 나온다. 신호등에 따라 건너 앞쪽의 가구단지 골목을 따라 가면 다시 큰 도로가 나온다. 이도로 건너 의왕초등학교가 있다. 길은 구름다리를 따라 건너면 되지만 이구름다리를 따라 무심코 나가니 의왕초등학교 안으로 떨어 진다. 도로 쪽은 다시 돌아서 내려가야 한다. 의왕초등학교 안에서 쪽문으로 나가면 바로 등산로에 닿치만 자물쇠로 굳게 잠가 놓아 다시 돌아 나가 학교옆 등산로에 닿으니 8:43분이다.
모락산 정상(태극기 설치된곳) 9:27
산행초입에서 잠시 준비를 마친 후 길을 따라 오르면 몇 갈래의 길로 나뉜다. 어느 길이나 모락산 정상으로 가는 길로 위쪽 안부사거리에서 만난다. 우리는 가장 좌측의 길을 따라 오르니 10여분 후 첫 번째 능선사거리에 닿는다. 좌측으로는 LG아파트에서 올라온 길이고, 우측으로는 우리가 올라온 의왕초등학교 쪽이다. LG아파트 앞 약수터가 180m, 정상이 870m다. 대략 산행초입에서 정상까지가 1.1km 정도의 거리다. 능선사거리에서 5분여를 오르면 운동시설이 있고 사각정이 있는 지점을 통과 하고, 긴철계단을 올라서면 드디어 전망이 확트이는 지점에 닿는다. 전망대에는 조망도가 있다. 북쪽으로 수리산과 관악산이 가깝다. 그 안쪽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전망대에서부터 오르면 바위지대로 좌우측으로 도시의 많은 집들이 모여 있는 광경이 보이며, 앞쪽으로 긴 슬랩지대가 펼쳐지며 우측으로 계단을 놓아 안전하고 편안하게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는 계단 옆 긴 바위 슬랩으로 붙어서 오르니 왼편으로는 깍아 지른 절벽으로 오금이 저린다. 바위에는 많은 못이 박혀 있으며 슬링줄이 걸려 있어 이곳에서 암벽을 탄 흔적이 많다. 이바위슬랩을 오르면 삼각점이 있으며 더 오르면 위쪽으로 높다란 바위가 나온다. 철계단이 놓여 있으며 철계단 옆으로 흔들바위가 하나 있다. 보기엔 흔릴것 같지만 실지는 흔들리지 안는 바위다. 이바위 옆으로 계단을 타고 오르면 목재로 만든 전망대에 오른다. 조망이 참 좋다. 전망대 뒤쪽엔 이쁘장한 몇그루위 소나무가 있으며 이후 바위지대를 지나 좀 더 오르면 앉아 참선하기 딱 좋은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지나고 더 오르면 이제는 가장 높은 지역에 큰바위에 닿는다. 이곳에 정상석이 있나 찾아 보았지만 정상석은 없다. 가장 높은 바위에서 내려와 살짝 내려서면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 곳이 있다. 태극기 게양대 아래 정상석겸 국기게양대로 사용하고 있는 정상표식이 있다. 모락산 해발 385m 높지는 않치만 어느곳에서나 조망이 좋고 임진란부터 최근의 한국전쟁시까지 격전지 였던 역사의 현장이다. 조망은 사방어느곳이나 좋다. 북쪽 관악산이 가까이 보이며 그뒤로 북한산까지도 조망이 된다. 동쪽으로 백운산이 있으며, 남쪽으로 우리가 돌아서 갈 오봉산까지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 온다. 서쪽으로는 시내를 지나 서해안 바다까지도 조망이되는 좋은 곳이다.
절터 약수터 10:02
모락산에서 반대편 쪽으로 넘어가면 의왕 모락산성에 대한 내용이 적힌 안내도가 있다. 백제 한성기시대의 퇴뫼식 석축산성으로 자연적인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으며 로 하여 자세히 적혀 있다. 오전동하산로 입구에 사각정이 있으며 그 옆으로 모락산성안내문이 또 하나 있다. 또 한편으로 한국전쟁당시의 모락산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적힌 안내문이 있으며 모락산 전승비가 있다. 평평한 이 지점을 지나 다시 산소가 있는 봉으로 오른다. 이곳이 실제로 가장 높은 모락산 정상이다. 이곳에서 내려서면 보리밥고개라고 적힌 이정표가 있으며 반대편 계원대쪽으로 내려가니 몇 개의 바위를 지나 사인암에 오르는 등산객들은 돌을 굴리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은 바로 뒤로 큰바위가 있다. 사인암 위쪽으로 오르니 제법 큰바위다. 다시 내려와 능선끝지점의 큰바위를 아래쪽으로 돌아서 오르니 관악산이 더욱 가까이 보인다. 이아래 쪽으로 계원대와 내손동약수터로 가는 길이 갈린다. 이곳에서 더 이상은 가지 않고 뒤돌아서 온다. 이정표에 내손동약수터 1920m, 계원대입구 970m,정상 600m라 적혀 있다. 되돌아 오는 길에 좌측으로 내손동약수터로 가는 등산로를 지나 좀 더 가면 다시 좌측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이길은 절터로 가는 길로 절터에 거의 다 오면 바위길에 로프가 설치되 있으며 모락산이 바로 위로 보인다. 절터 아래쪽에 약수가 있으니 절터 약수터다. 한모금 바가지로 떠 마시니 물맛이 순한것이 좋다.
도로 10:34
절터약수터에서 몇 분을 가면 백운산으로 가는 능선에 붙는다. 능선에 붙어 2분여를 가면 우측으로 철망안으로 넘어서 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이곳에서 좀 더 가면 큰바위가 하나 있다. 이바위에 올라 본 후 다시 돌아서 철망으로 넘어서 가는 등산로와 중간에 있는 능선길을 따라 가는 길이 나온다. 이길을 따라야 백운산으로 가는 길이 되겠다. 이길을 따라 가면 15분후 안부 오거리가 나온다. 좌 능안마을 쪽으로 길이 두갈래가 있으며 우측 경일암쪽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고개가 능안고개이며, 이고개에서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걷기에 좋은 길을 따라 가면 9분후 높다란 산불감시탑이 나온다. 이지점을 통과 하여 3분이면 도로에 닿는다. 의왕에서 백운호수 쪽으로 넘는 편도 1차선 도로이다.
백운산 정상 11:17 ~11:28
도로를 건너 오르면 3분후 의왕에서 과천으로 가는 유료 도로 터널위에 닿는다. 조금 지나 헬기장이 있으며 이곳부터는 소나무가 제법 많이 있다. 4분후 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좌측은 백운호수, 우측은 고속도로가 보인다. 다시 3분후 세멘포장 임도가 나오며 앞쪽으로 공동묘지다. 오전동에 있다고 해서 오전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옆길을 따라 오르면 삼각점이 하나 있고, 공동묘지는 지나 10여분 후 다시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에 닿는다. 좌로는 백운호수, 우로는 오메기 저수지라고 되어 있다. 백운산은 1165m라고 적혀 있다,. 오메기 고개에서부터 오르면 11분후 좌측으로 마지막 백운호수로 빠지는 길이 있으며 이곳부터 길은 상당히 가파라지기 시작한다. 가파른길을 따라 오르면 긴 로프가 있고 긴로프 끝에 우측으로 백운사로 내려가는 하산로가 있다. 이지점까지 오르면 힘든구간은 거의 끝을 맺게 되며 3분을 더 가면 백운산 정상에 닿는다. 백운산 정상에서는 북쪽으로 우담산을 거쳐 바라산 청계산까지 이어지며, 남으로는 광교산으로 가는길이다. 백운산정상에서는 서쪽 편으로 조망이 좋다. 바른 방향은 조망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바로 옆으로 미군 통신대가 있다.
쉼터봉 11:59 ~11:24 (중식)
백운산에서 통신대 우측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가면 5분후 통신대 끝지점에 있는 벤치가 있는 곳에 닿는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산아래 보이는 미군막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며 한남정맥길이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다 좌측으로 보이는 큰바위까지 다녀서 되돌아 와 미군막사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막사 앞 큰 헬기장에 닿는다. 이곳까지는 차량이 올라 온다. 이곳까지 오는 길과, 이곳부터 이어지는 능선길도 상당히 널찍하니 좋다. 거의 평탄선길로 노약자분들의 산보코스로 아주 좋은 코스가 되겠다. 헬기장에서 5분후 벤치가 있는 부분에서 좌측으로 하산하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4분을 더가 벤치가 몇 개 놓여 있는 쉼터봉이다.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지지대 고개 13:14
쉼터봉에서 점심식사 후 6분을 가니 삼거리봉이다. 좌측으로 상광교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봉은 우측으로 우회를 하여 지나도 된다. 이봉을 내려서면 이정표가 있는 안부로 이곳에서 좌측으로 상광교로 하산하는 길이 있고 계단이 있는 오름길이 시작된다. 계단 오름길을 올라서면 소나무가 여러그루 있는 봉에 닿게 되고 여기서 평탄선 능선길을 따라 몇 분은 더 가면 헬기장에 닿는다. 헬기장에서 통신대가 0.8km, 지지대고개가 4.3km, 경기대가 8.6km의 거리다. 이곳에서 상광교 종점까지는 2km다. 헬기장을 지나 바위가 있는 소나무지대를 지나면 수의 사거리에 닿는다. 좌측으로 파장동 정수장,우측으로 의왕시로 표시되어 있으며, 조금 더 가면 산마루라고 적힌 수의사거리의 이정표와 똑같은 형태의 것이 있다. 이제 지지대 고개 까지는 1km도 안 남았다. 서서히 내려서는 길목에 저수지 쪽으로 빠지는 희미한 길이 있고 여기서 다시 10분을 더 가니 앞쪽에 고속도로가 나온다. 가까이 가니 북수원톨게이트요금소다. 이고속도로 아래로 굴다리가 있어 지나니 북수원으로 들어가는 큰도로가 나온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프랑스군 참전기념비가 있는 지지대 고개다.
능선삼거리(좌 덕성산,우 오봉산) 13:51
지지대 고개에서 길을 건너기가 문제다. 안전하게 건너려면 남쪽으로 상당히 많이 걸어서 내려간 후 영동고속도로 아래부근에서 넘어야 하겠지만 너무 멀다. 길을 건너자니 너무 넓고 차량이 많이 오고 중앙선 분리대가 견고하여 넘기가 어렵다. 참 어찌 할가 망설여 지는 곳이다. 일단 남쪽으로 조금 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전광판아래부분에 중앙분리대가 트여 있는 곳이 있다. 한참을 기다려 차량이 끊긴 사이 훌쩍 넘어서 분리대로 가니 다행히 반대편도 차가 끊긴다. 무사히 통과는 했지만 상당히 위험한 구간이다. 구름다리라도 설치 해주었으면 하는 구간이다 도로를 넘는대 15분이 소요 되어 지지대고개 휴게소를 지나 임도를 타고 오르니 우측으로 작은 비각이 있다. 이것이 바로 지지대비다. 사도세자의 자식인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곳부터는 임도와 견줄만한 좋은 등산로가 이어진다. 주로 산악자전거를 하는 님들이 많이 다닌듯하다. 첫 번째 송전탑을 지나고 안부사거리를 넘어서면 산소옆으로 송전탑이 또한번 있으며, 작은 탁상이 놓여 있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는 지점에서는 길아래로 논이 보인다. 이곳에서 1분이면 덕성산과 오봉산이 갈리는 능선삼거리에 닿는다.
덕성산 14:21 ~14:25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능선을 따라가면 5분후 좌측 내려서는 널찍하고 좋은 길이 있는 곳을 지나 우측으로 철송기지(철도화물 운송기지)가 잘보이는 송전탑이 있는 널직한 공터는 지나고 다시 1분이면 삼각점이 있는 151봉에 닿는다. 이곳부터 서서히 내려서는 길로 5분후 안부사거리를 지나 고속도로가 나오면 우측으로 세멘포장길을 따라 내려가면 굴다리가 나온다. 굴다리를 지나 좌측으로 절개지위 길을 따라 오르면 7분이면 덕성산 정상에 닿게 된다. 덕성산 정상에서는 우측으로 철도교육원 쪽으로 가는 길과 능선을 따라 성균관대역 쪽으로 가는길이 있다.
이동고개 삼거리 15:35
덕성산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 굴다리를 빠져나와 세멘트포장길을 따라 올라 삼각점이 있는 151봉을 지난 후 삼거리까지 돌아오는데 꼭 1:10분이 소요 되었다. 거리가 약 3km는 충분하겠다. 삼거리에서 오봉산 쪽으로 향하니 조금 후 좌측으로 빠지는 길이 있고 7분후 산소가 있는 부분에서 길이 갈린다. 능선을 따라 가는 길과 산소 쪽으로 내려가는 길 산소의 좌측으로 내려가니 큰길이 나온다. 아직 완공되지 않은 도로지만 한쪽으로 차량이 다니는 길이다. 이곳에서 다시 돌아 올라와 능선길을 따라 가니 산아래로 도로를 넘어갈 많한 시설물이 보여 잠시 알바를 하여 닿아가 보니 동물통로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아직 한쪽편만 터널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다시 절개지 옆을 따라 도로 공사중인 다리 아래쪽을 지나 굴다리를 지나니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의왕시 고천동 고고리다. 동네길을 따라 들어가다. 능선을 타고 올라가니 능선안부사거리가 나온다. 우리가 온쪽과 능선길 반대편(오봉역쪽)으로 내려가는길이 있다. 이곳부터 능선길을 따라가니 첫머리에 공동묘지다. 이동공동묘지라고 되어 있다. 공동묘지를 넘어 정수장옆 울타리를 따라 도로에 내려서니 이고개가 이동고개삼거리다. 좌측으로 철도기술원과 당정쪽으로 가는길이 있고 우측으로 의왕시로 가는길이다. 이길은 신호등이 있어 건너기가 좋다.
오봉산 정상 15:57 ~16:00
이동고개 삼거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오봉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처츰엔 쓰러진 아카시아나무가 있고 좀 지저분하지만 좀 지나면 괜찬다. 이동고개에서 11분후 산소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좌측으로 당정역으로 가는길로 한남정맥길이다. 우측으로 올라야 오봉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오르니 우측으로 샛길이 있다. 그끝으로 커다란 바위가 보여 잠시 그곳까지 오른 후 능선을 따라 가니 의왕시에서 올라온 주 등산로 길과 만나고 잠시 후 우리가 오던 당정역 길이 만나 오봉산 정상에 닿게 된다. 오봉산 정상에서 보는 철도 화물기지의 규모가 대단하다. 오봉산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은 의왕시, 당정역,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세갈래길이다. 우리는 한남정맥길인 당정역길로 하산을 한다.
당정역 16:31 ~16:42
오봉산에서 올라온 길을 되집어 산소가 있는 삼거리까지 온 후 우측 길을 따라 가면 길은 금시 평탄선길로 좋아지며 금시 올랏던 오봉산을 바라보며 걷게 된다. 가면서 공연히 이곳으로 내려와서 간다고 투덜대기도 하며 가다보니 다시 도로가 나온다 이도로는 굴다리를 통과하여 건너고 작은세멘트길을 따라 가면 세멘트싸이로가 보이는 지점의 새마길 도로를 다시 한번 더 건너게 된다. 이도로를 따라 내려가도 되지만 길 건너 표식기 붙은 입구를 따라 가니 몇 분안가 다시 도로에 닿는다. 앞쪽에 당정푸르지오 106동 아파트가 있다. 이곳에서 당정역길을 따라 내려오면 5분이면 당정역에 닿는다.
오늘 이것으로 군포역에서 시작하여 모락산을 두루 살펴 본 후 다시 백운산으로 백운산에서 한남정맥길을 따라 능선삼거리까지 온 후 덕성산을 다녀오고 다시 오봉산을 경유하여 당정역까지 오는 산행 백운산을 오를때를 빼곤 아주 편안한 산행길이 었다. 소요시간이 8:20분으로 산행거리는 20km정도로 다소 가벼운 산행으로 의왕시 인근을 돌아 보는 좋은 산행이 었다. 같이 한 산새님 수고 많이 했습니다. 감사 ~~
산행시간 : 8:22분 소요
산행거리 : 약 20km
ddddddddd+(군포역~모락산입구 ;2.6km,모락산입구~모락산; 1.1km,a모락산~계양대입구 바위; 0.6km, 게양대입구 바위~오메기고개 2.8km,오메기고개~백운산; 1.1km, 백운산~지지대고개; 4.3km,지지대고개~당정역 4.5km, 능선삼거리~덕성산 왕복; 약 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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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락산~백운산~오봉산(의왕)
조치원 6:40 -천안 7:00 -수원 7:45
수원 17:00~천안 17:38 수원 17:05 ~17:41 수원 17:15 ~17:51 수원 17:21 ~17:59
수원 17:34 ~천안 18:13 수원 17:50 ~18:22 수원 17:55 ~18:31 수원 18:05 ~18:42
군포역 ~LG아파트 2.69km
군포역 ~신라테크노빌~대성열처리~안양천 도로 나오면 우측으로~다리건너고~금봉테크노밸리~1급평화자동차 정비공장~우림카써비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현대블루 핸즈경기공업사에서 좌회전~우회전~큰도로 나오면 우회전~도로 건너서 직진~의왕초등학교앞~LG아파트~샘터 ~좌측 능선 등산로
산 행 명 : 오봉산 (경기 의왕소재) 해발 205미터
일 자 : 2011년 2월 20일
산행시간 : 15:46 ~ 16:48 (약 1시간 2분)
산행거리 : 2.2키로
**의왕역 ~부곡체육공원~만남의 숲~덕성산~영동고속도로~계명고~151봉~한남정맥삼거리~지지대고개
산행코스: 성균관대~밤밭저수지~덕성산~이동고개 삼거리~오봉산~의왕시청~안양천~의왕여성회관(모락산 들머리)~모락산 정상~제2봉~모락터널~백운호수~6번 마을버스를 타고 인덕원역
산행거리 15km
산행시간 5시간
오봉산~백운산~모락산
의왕시청(해발60m) 10:30 ~오봉산 정상 11:00 ~골우물 11:30 ~삼거리A~생태계터널(해발110m) 12:00 ~삼거리B 12:20 ~지지대고개(해발 130m) 12:45 ~(45분휴식)~13:35분~ 수의사거리,대안사 갈림길(해발 260m) 14:45 ~광교헬기장 15:10 ~통신대헬기장(해발420m) 15:50(30분 휴식) ~백운산 정상 16:50 ~오메기 갈림길(해발 320m) 17:20 ~오메기고개 17:45 ~능안갈림길삼거리 18:10 ~모락산 정상 19:15 ~LG아파트 약수터 20:30
소요시간 10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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