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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0944 금남정맥4구간 진고개~감토봉~청마산~부소산~구드레나루터 2016.6.30.목요일. 흐린후 비조금

금남정맥4구간 진고개~감토봉~청마산~부소산~구드레나루터

2016.6.30.목요일. 흐린후 비조금

참석인원 : 적막이랑 둘이서

 

청주 집 06:30 -산업단지 입구 버스정류장 06:45~06:46 -오송역 07:10 ~07:59 -고속열차 8400 -공주역0814 ~08:25 -택시 10000 -진고개 08:37 ~08:42 -135(우꺽임, 0.414km) 08:51 -안부 08:51 -깃대봉(0.918km, 161m) 09:01 -안경구덩이산(1.51km, 163m) 09:15 -벌목봉(좌꺽임, 2.04km, 195m) 09:23 -임도고개(비포장, 탄천 사장골 -감나무골 도로간, 2.5km, 182m) 09:25 -좌꺽임봉(2.29km, 215m)09:30 -감나무골고개(세멘포장길, 2.49km, 155m) 09:34 -감토봉(3.10km, 262m) 09:49 -가자티고개(아스팔트도로고개 삼거리, 4.86km, 130m) 10:17 -능선 삼거리(우측으로, 5.05km, 150m) 10:22 -됨봉(좌꺽임봉, 5.34km, 160m) 10:28 -187(우꺽임봉, 5.7km) 10:36 -파평윤씨묘(5.85km, 170m) 10:38 -안부 사거리(신앙고개, 6.80km, 150m) 10:53 -좌측으로 공동묘지 -공동묘지 위봉(좌꺽임, 7.44km, 190m) 11:05 -임도고개(토목공사 한곳, 8.36km, 150m) 11:18 -이정표 삼거리(우측으로, 8.43km, 150m) 11:20 -성황당고개(8.83km, 1405m) 11:26 -좌꺽임 -(9.18km, 182m) 11:33 -우꺽임 -이정표 고개(글씨 잘 안보임, 좌측 신암리, 9.52km, 120m) 11:39 -안부고개(9.68km, 110m) 11:41 -송전탑 11:43 -204.8(이정표 삼거리, 10.43km) 11:57 ~12:17(중식) -청마산 삼거리 이정표 12:28 -청마산(11.09km, 233m) 12:31 -안부 삼거리(우 하산로, 11.81km, 135m) 12:44 -통나무계단 올라서고 -산불감시탑(11.94km, 181.3m) 12:48 -통나무계단 내려서고 -청마산성표지석(12.8km, 145m) 13:03 -돌계단 내려서고 -청마고개(오산고개, 세멘포장도로, 13.28km, 70m) 13:11 -돌계단 오르고 -통나무계단 -남양홍씨묘(14.15km, 140m) 13:26 -칡밭 지나고 -이정표 삼거리(우측으로, 14.32km, 140m) 13:29 -진주 강씨묘역 -장대지쉼터 -하수오밭 -석목고개(SK주유소, 큰도로, 석목버스정류장, 15.15km, 55m) 13:40 -삼거리(우측으로) 13:49 -통나무계단,로프 -큰 사거리 이정표(15.74km, 70m) 13:54 -통나무계단,로프 -쉼터(16.11km, 90m) 14:01 -금성산(통수대, 16.38km, 121m) 14:08 ~14:16 -생태통로(17.12km, 65m) 14:32 -세멘트임도 따라 -남령공원 14:35 -활터 앞으로 내려서서 -부여도서관앞 도로(17.82km, 35m) 14:47 -부여여고 우측 으로 -군창지(18.95km, 98m) 15:11 -반월루 15:20 ~15:33 -부소산(사자루, 19.99km, 105m) 15:43 -낙화암 15:55 ~16:01 -고란사(20.6km, 25m) 16:05 ~16:11 -구드레 나루터(21.87km, 10m) 16:30 ~16:40 -부여시외버스터미널(23.14km) 17:02 ~17:39 -시외버스 9800 -청주시외버스터미널 19:41 -청주 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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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청마산성

이 성은 해발 118m 되는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백제시대 최대의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6.5km이며 높이는 4~5m 가량 된다. 성을 쌓는 방법은 흙과 돌을 함께 쓴 토석 혼축식이며 형태는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이다. 포곡식 산성은 내부에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넓은 공간도 비교적 쉽게 확보 할 수 있어 많은 인원이 장기간 머물러 살기에 좋다. 청마산성은 유사시 사비도성 내에 있는 군,,민이 모두 함께 도피할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제 성 안에는 군창으로 추정되는 큰 건물터가 3곳이 있으며, 각시우물이라 불려지고 있는 우물터와 경룡사라는 절터가 남아 있다.

청마산성 안내도에서

 

부여 금성산성

부여군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부여읍 동남리, 가탑리, 쌍북리에 걸쳐 있는 금성산 정상에 있는 산성이다. 왕도 동남쪽에 자리하여 궁성방어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훼손이 심하여 성의 규모 등은 파악 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멸망 이후 임존성에 웅거하여 있던 백제부흥군 공격에 실패한 소정방이 나, 당군에게 사비도성을 지키게 하고 의자왕등을 포로로 당으로 철수하자 백제 부흥군이 나, 당군을 부소산성 안으로 몰아넣고 사비남령에 올라 4~5곳에 목책을 세워 백제부흥군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비남령이 바로 금성산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금성산성안내도에서

 

부소산

[개설]

높이는 106m이고, 부여읍의 북쪽에 위치하며, 금강에 연하여 있다. 백제 때 성왕이 도읍을 웅진(熊津)에서 이곳 사비(泗沘)로 천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부여의 진산(鎭山)이며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라 부르고, 서쪽을 송월대라 이른다.”고 한다.

[명칭 유래]

언제부터 부소산으로 불렸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소나무를 뜻하는 풋소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부소라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결국 솔뫼가 되는 것이다.

[자연환경]

부소산은 산이라기보다는 평지에 솟아있는 잔구(殘丘)에 가깝다. 토양은 사질양토 토양으로 산성을 띄며 유기물 함량, 유효인산 함량, 치환성 양이온 등은 우리나라 산림토양에 비해 현저히 낮아 비옥도가 낮은 편이다. 식물분포구계상 북대식물계의 중일구계(Sino·Japanes region)에 속하며 전형적인 온대중부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중부산지 및 저산지형의 식생이 발달한 곳이다. 2004년 부여군의 기후값으로 부소산의 기후를 예측할 수 있는데, 평균 기온은 12.6, 평균 최고기온은 19.3, 평균 최저기온은 7.2, 강수량은 1,494이다.

 

부소산에는 소나무 군락, 상수리나무 군락, 졸참나무 군락이 있으며 소나무가 우점종이다.

[현황]

현재 이곳에는 둘레 2.2에 이르는 부소산성(扶蘇山城)이 있고, 성내에는 서복사지·영월대지(迎月臺址영일루(迎日樓군창지(軍倉址송월대지(送月臺址사비루(泗沘樓낙화암(落花巖백화정(百花亭고란사(皐蘭寺삼충사(三忠祠궁녀사(宮女祠) 등 많은 사적지와 문화재가 있다.

 

낙화암은 부소산 북쪽의 절벽으로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 삼천궁녀가 백마강(白馬江)에 몸을 던졌다는 고사로 유명하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 임하여 고란사가 있다. 이 절 뒤편의 암벽에서 솟아나는 약수는 백제 왕들의 어용수(御用水)로서 사용되었다고 전해오며, 약수터 주변의 고란초는 고사리과에 속하는 다년생 은화식물로 그늘진 바위 틈에 자생하는 희귀식물이다.

 

낙화암 아래의 백마강 물굽이에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일화로 유명한 조룡대(釣龍臺)가 있으며, 낙화암의 위쪽에는 백제의 여인들을 추모하여 이름지은 백화정이 있다. 부소산 동쪽에는 영월대(迎月臺), 서쪽에는 송월대(送月臺)가 있었다.

 

백제 왕들은 영월대에서 떠오르는 달을 맞으면서 연악(宴樂)하였고, 송월대에서 지는 달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영월대는 영일대라고도 하였는데, 1964년부여군 흥산에 남아 있던 조선 시대의 관아문루(官衙門樓)를 이곳에 옮겨 영일루라 하였다. 영월대지 부근에는 백제 시대에 군량을 비축하였던 군창지가 있어서 지금도 1,300여 년 전의 탄화된 곡식의 알갱이가 나온다.

 

부소산의 정상인 서쪽 봉우리에는 1919년임천현의 아문(衙門)인 배산루(背山樓)를 이전한 누각식 건물인 사비루가 있어서, 이곳에서 낙화암·백마강·고란사·수북정 등을 두루 관망할 수 있다. 부소산의 남쪽에 있는 삼충사는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 등 백제의 세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으로, 1980년 정부의 지원으로 개축되었다. 부소산의 남쪽 기슭에 국립부여박물관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서 옮김)

 

 

조룡대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의 백마강(白馬江) 가운데 있는 바위.

[내용]

사람 하나가 겨우 앉을 만한 크기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중국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의 도성을 함락시킨 뒤, 어느날 대왕포(大王浦) 하류에 갑자기 태풍이 불어 바위나루窺巖津를 지나 낙화암(落花巖)까지 잇대어 있던 수백 척의 당나라 병선이 순식간에 뒤엎어지고 말았다. 소정방은 이 돌연한 괴변이 왜 일어났는지를 일관(日官)에게 물었다.

 

일관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제를 지켜온 강룡(江龍)이 화를 낸 것이라고 하였다. 강룡을 퇴치할 방법을 소정방이 다시 물으니 일관은 용이 좋아하는 백마를 미끼로 하여 낚는 것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쇠를 두들겨 낚시를 만들고 굵은 철사를 낚싯줄로 하여 백마를 미끼로 강 가운데 바위 위에 앉아 용을 낚기로 하였다. 그러자 용은 미끼인 백마를 삼켜서 잡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하여 뒷날 사람들이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고 하는 이 바위를 조룡대라 하고,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하여 금강(錦江)의 줄기인 부여 부근 일대의 강을 백마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부여현(扶餘縣) 고적조(古蹟條)에 나온다. 그런데 물고기를 한자로 적을 때 어룡(魚龍)’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소정방이 어룡을 낚은 것을 뒷날 잘못 전하여 용을 낚았다고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남부여 백제조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있다. , 사비하(泗沘河)가에 한 바위가 있는데, 일찍이 소정방이 어룡을 낚기 위해 꿇어앉았던 자국이 바위 위에 있으므로 용암(龍巖)이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어느 시기부터,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모두 확실하지는 않으나 어룡이 용으로 바뀌어 전해져 오게 된 듯하다.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白馬江) 가에 있는 바위. 당나라 군사가 백제의 왕성을 공격하기 위하여 강을 거슬러 오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이 바위에 걸터앉아 백제 무왕(武王)의 화신인 청룡을 낚아 올려 풍랑을 멎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한국문화대백과에서 옮김)

 

 

낙화암

낙화암은 부여 부소산성 안에 있으며, 북쪽 끝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있는 강변 절벽이다. 적군이 산성안으로 진입해서 사람들이 뒤로 도망친다고 했을 때 막다른 골목에 해당하는 곳이다.

부소산성이 함락되는 날, 여기서 뛰어내린 사람들이 있을 법하다. 그렇지만 누가, 몇 명이나 뛰어내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백제고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절벽이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떨어져 죽은 바위)이라고 한다고 하나 이것은 속설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들이 여기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에 명확한 기록이 있다."

3천 궁녀라는 말은 조선시대에 등장한다. 15세기 후반 김흔이 낙화암을 노래한 시에서 "삼천 궁녀가 모래에 몸을 맡기니"가로 읊었다.

낙화암 전설이 생기게 된 것을 추론한 것을 보면 대략 이렇다. 백제가 망하자 백성들은 그들의 왕과 후궁들이 국가와 함께 죽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고, 이런 믿음들이 민간에 유포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일연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지만, 의자왕이 당나라에 끌려가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자왕은 빼고 궁녀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했고, 조선시대에는 많은 궁녀들이 죽었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삼천궁녀라고 했을 것이다. "삼천"이라는 것은 그냥 많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서 당나라로부터 관직을 받고, 물질적으로는 풍족하게 살았다. 그 후손들도 당나라에서 관직을 받고, 황실과 통혼하면서 살았던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자원순환사회연구소에서 옮김)

 

낙화암과 삼천궁녀

백제가 멸망하던 날 당군을 피해 삼천의 궁녀가 낙화암 절벽에서 그 아래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다는 것이 낙화암의 전설이다. 이 전설어린 낙화암은 부여 부소산성 안에 있다. 부여는 부여 외곽에 토성을 쌓고(부여 능산리 고분에 가면 고분군 왼쪽으로 흙으로 쌓인 제방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부여 토성자리다. 또 왕인박사 유적비 외곽도 토성지다) 중심부에 왕궁을 두었지만 부여는 평지에 있는 관계로 방어에는 취약했다. 그래서 유사시를 대비해 방어용으로 별도의 산성을 쌓았다. 이것이 부소산성이다.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도 평지의 국내성과 뒤쪽 산에 있는 환도산성의 이중구조로 되어 있다. 평양의 안학궁과 그 뒷산에 있는 대성산성도 같은 구조다.

부소산성은 뒤로는 백마강을 끼고 남쪽으로는 부여 정림사지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북쪽으로 갈수록 산이 높아지는 데 낙화암은 맨 뒤쪽 정상부 바로 아래의 강변절벽이다. 지형으로 보아 적군이 산성 안으로 진입해서 사람들이 뒤로 도망친다고 했을 때 막다른 골목에 해당하는 곳이 이곳이다.

지형으로 봐서는 전설이 정말 그럴 듯 하다. 그러면 역사책에 기록된 사비성 함락의 장면은 어떨까요?

 

서기 660 7 12, 부여에 당군이 진입하자 의자왕은 부소산성에 들어갔다가 태자와 함께 공주로 도피합니다. 부소산성은 둘째 아들인 태()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태가 스스로 왕을 칭했고, 이 사태에 겁을 먹었는지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 항복해 버립니다. 결국 태도 항복을 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18일에 웅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한다.

전설처럼 사비가 함락되던 날 부소산성이 약탈된 것은 아니다. 폭력과 폭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막상 당군이 승전파티를 연 것은 8 3일이다. 주변 지역을 안전하게 확보하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승전 기념 약탈을 행합니다. 이 약탈은 굉장했던 것 같다. 마침 항복해서 사비성에 들어와 있던 백제군의 뛰어난 장수 흑치상지는 이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당군 진영을 다시 탈출하여 저항군을 결성했다고 한다.

부소산성이 항복하던 날, 혹은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여기서 뛰어내린 사람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들이 누구며, 몇 명이나 되는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면 낙화암의 전설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저도 정확한 근원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고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여성 북쪽 모퉁이에 큰 바위절벽(大岩)이 있는데, 아래로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말에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살할 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고 서로 이끌고 여기에 와서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했다. 때문에 이 바위를 타사암(墮死岩: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이라고 한다고 하나 이것은 속설이 잘못 전해진 것이다. 다만 궁녀들만이 여기에 떨어져 죽은 것이다.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는 것은 <당사>에 명확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낙화암의 전설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듯 합니다. 일연은 고려 후기 사람입니다. 아마도 백제가 망한 후에 이런 전설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처음 이야기에는 삼천 궁녀라는 말이 없었고, 이야기의 주제는 의자왕과 후궁들이 이곳에서 자살했다는 내용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삼천 궁녀로 바뀝니다. 의자왕의 궁녀가 삼천이나 되었다는 것은 후세에 의자왕이 방탕한 폭군이 되었고, 진시황의 전설처럼 그의 방탕과 음란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해석이 유행하게 되면서 의자왕의 궁녀도 삼천으로 불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분노합니다. 삼천 궁녀란 의자왕을 폭군으로 만들려는 악의에 찬 해석 내지는 역사왜곡의 결과이다. 떨어져 죽은 사람이 궁녀 뿐이겠는가? 백제의 많은 아녀자들이 꽃 같은 생명을 바쳤을 것이다라고요.

의자왕 폭군설은 위에서 얘기 했으니 더 이상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삼천 궁녀를 언급하기 전에 이 전설에 숨어 있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전설의 최초의 모습은 의자왕과 후궁들이 나라와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반 백성들이 그들의 국왕과 지도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혹은 어떻게 속고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충성과 의리, 존귀함과 권력, 명예, 책임. 지배층은 이런 것을 그들의 미덕으로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런 미덕을 선천적으로 지닌 사람들이 지배자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리고 불쌍한 백성들은 그들의 왕, 그들이 충성을 바치고, 재물과 노동을 제공하여 섬기던 왕은 나라가 망하던 날, 국가와 함께 자신의 생명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의자왕과 백제와 왕족, 고관들은 거의 죽지 않았습니다. 고려가 망할 때도 죽는 것은 빼고, 낙향한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계백은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치지만, 그의 지위는 2품인 달솔이었습니다. 그 때 그 군대에는 계백보다도 더 높은 좌평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백이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사실만 알지 좌평들은 다 항복해서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은 모릅니다.

의자왕과 후궁들의 죽음이란 이 최초의 전설을 궁녀로 바꾸어 놓은 사람은 사실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입니다. 그도 어떤 증거나 확신을 가지고 궁녀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그러나 일연은 의자왕이 당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몽고의 전란이 전국을 휩쓸고 다니던 자신의 시대를 살면서 국왕과 귀족이란 인물들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위선적인 집단인가를 눈으로 보고 살았습니다.

그가 "다만 궁녀들만이 여기에서 떨어져 죽은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듯 적어 놓은 것은 이 전설의 뒤에 숨어 있는 씁쓸한 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 해서 등장한 궁녀가 나중에 삼천 궁녀로 바뀐 사실을 일연이 알았다면 다시 한번 씁쓸해졌겠지만요.

(노숙자님 홈피에서 옮김)

 

고란사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扶蘇山)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창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때 왕들이 노닐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였다는 설과 궁중의 내불전(內佛殿)이라는 설이 전하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였다.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1028(현종 19)에 중창하였고, 1629(인조 7) 1797(정조 21) 각각 중수하였으며, 1900년은산면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31년에 지은 것을 1959년 보수, 단장한 정면 7, 측면 5칸의 법당과 종각인 영종각 뿐이다.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왕이 마셨다는 고란수의 고란샘터가 있고, 주위에는 낙화암·조룡대(釣龍臺사비성(泗沘城) 등이 있다. 절 일원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옮김)

 

고란약수의 전설

아득한 옛날 소부리의 한 마을에 금슬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늘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한번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 山, 금성산)도사로부터 부소산의 강가 고란사 바위에는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 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약수에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새벽 남편을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다음 날 일찍 약수터로 찾아가보니 할아버지는 간데 없고 웬 간난아이가 남편의 옷을 입고 누워있어 깜짝 놀랐다. 할머니는 아차 했다. 도사가 한 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는 말을 남편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것이다. 후회를 하며 갓난아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이 할아버지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자료에서 옮김)

 

부소산성

요약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내용]

둘레 2,200m, 사적 제5. 지정면적 983900.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보다 먼저 500(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으로 축조하였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 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하였는데 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북반부는 A층 위에 퇴적되었고, 남반부는 A층과 같이 아래서부터 쌓아올렸는데, 이는 A층을 고쳐쌓기 위해 B층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생토층으로부터 B층까지의 높이는 3.2m이다.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C층은 황갈색사질토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 36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6합식(合式) 5단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는 103로 이 층에서도 B층과 같이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50×50, 70×60의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은 위의 두 산성이 연결되어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안에는 동··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門柱)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木柵址)와 수혈상(竪穴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성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사비천도 이후 백제 멸망시까지 국도의 중심산성으로서, 인근의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 등의 보조산성으로 왕도의 방어를 강화한 성곽발달사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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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집 06:30

여행을 댕겨 오느라 금남정맥 마지막 구간이 1달여 이상 늦어 졌다. 오늘 금남정맥 마지막 구간 공주 탄천면 진고개에서 시작하여 부여 낙화암 고란사가 있는 부소산을 끝으로 백마강 구드레나루터에서 끝을 맺으려 한다. 어제 까지 비가 온다는 애기가 없었는데 아침에 산행준비하고 집을 나서려니 길바닥에 물기가 있고 가느다란 빗줄기가 내리고 있다. 핸폰으로 일기예보를 보니 오전은 비가 오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오후에 개인다고 나와 있다. 어쨋거나 날씨가 좋아도 요즘 날씨 후덥지근하고 온도도 많이 올라가 땀이 비오듯하니 비를 좀 맞는 것도 괜찮다싶어 천안 적막에게 카톡으로 비가와도 진행을 한다고 문자를 보내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오송역 07:10 ~07:59

집을 나서 약 15분을 걸어 산업단지앞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도 되긴 하지만 급행버스는 서지를 않아 산업단지 앞까지 걸어 나간다 . 정류장에 도착하자 금시 버스가 도착하여 이 버스를 타고 오송역에 내리니 15분이 소요되어 07 10분 도착한다. 오송역에 내려서 오송역 1층부터 3층까지 돌아다니며 구석구석 무엇이 있나 살피기도 하고 물이 마시고 싶어 정수기가 있나 살펴보았으나 허우대만 크지 고객을 위한 정수기 한 대가 비치되어 있지를 않다. 역사 내에 들어선 커피점 음식점들 생각해서 고객을 위한 냉수 한잔도 주지 않겠다는 속셈인 것 같다. 고속열차는 일반열차에 비에 요금도 상대적으로 비싼대 이런 써비스도 해주지 않는 철도공사는 고객과 역사내 입주한 상인중 어느 쪽에서 이익을 창출 하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진고개 08:37 ~08:42

오송역에 너무 일찍 도착해서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천안아산역에서 타고 올 적막님과 약속한 열차시간이 되어 고상홈으로 올라가 승차를 한다. 공주역 까지는 15분 정도밖에 소요되지를 않아 문자로 11호칸에 승차했다고 보내고 나니 열차가 공주역에 도착할 무렵 적막님이 내게로 온다. 잠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열차는 공주역에 도착을 한다. 공주역에 내려 물을 공급하고 역사 밖 택시정류장에서 우리의 목적지 공주시 탄천면 진고개로 가자고 하니 이 택시기사님 말이 과관이다. 진고개가 어딘지도 모르고 논두렁길 못가겠단다. 난 말없이 내려서 다른 차를 타고 가려 했으나 적막님이 잠시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핸폰으로 네비를 켜서 여기도 나오는데 왜 못가겠다는 거냐 하니 택시기사 그때서야 네비에 나오냐며 네비를 켜며 상당히 불쾌 한 투로 진고개로 향한다. 난 논두렁길을 아는 것을 보면 모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좀 불쾌해 했다. 10여분이 좀 더 지나 택시는 우리의 목적지인 진고개에 도착을 한다. 택시 기사 이제서야 웃는척하며 진고개를 알았다나 뭐 그런다. 공주역에 대기 하고 있는 택시기사님들 무조건 모른다고 하지 말고 최대한 노력이라 하시고요! 좀 친절히 손님을 모셔야 하지 않을까요?

 

안경구덩이산(1.51km, 163m) 09:15

진고개에는 아주머니 한분이 사시는 집이 한 채 있다. 이 집 우측으로 전봇대가 있는 곳으로 오르기 시작하면 조금 올라서 등산안내도가 있다. 여기서 조금 더 오르면 밤나무단지 위 평탄한 능선에 오른다. 능선을 따라 좌측으로 가면 좌측으로 세멘트 토관공장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진고개 아래 마을이 보인다. 잠시 후 해발 약135봉에 닿고 여기서 잠시 내려서면 우측으로 민가가 보이는 안부를 지나 10여분을 오르면 깃대봉에 닿는다. 삼각점이 있고 삼각점 안내문이 있으나 전에 붙여 놓았던 정상표지판들은 이제는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이봉이 네이버 지도나 다음지도에는 기대봉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통상 깃대봉이라 칭했다. 이제 깃대봉을 뒤로하고 풀섶을 헤치고 한동안을 진행하면 약15분후 평탄한 능선상에 안경구덩이산이란 조그만 표지가 하나 보인다. 봉이라 해야 하나 그냥 능선이라 해야 하나 구분하기 어렵지만 네이버지도나 다음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는 봉이다.

 

감토봉(3.10km, 262m) 09:49

안경구덩이산에서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하면 거의 평탄하게 능선이 이어지다가 잠시 가파르게 오르면 벌목봉에 닿는다. 이곳에서 능선은 좌측으로 방향이 틀어져서 살며시 내려서게 된다. 능선은 다시 우측으로 둥그렇게 돌아가서 골이 깊숙한 황토흙 임도로 내려선다. 이 임도는 삼각리 사장골과 감나무골 도로와 연결이 되는 듯싶다. 임도를 건너서 다시 오르게 되면 5분여 올라서 좌측으로 방향이 급격히 꺽이는 해발 약215봉을 지난다. 이후 내려서게 되면 몇 분후 앞쪽으로 세멘포장도로가 나온다. 이고개가 감나무골 고개로 고개 우측 전신주 옆으로 오르기 시작하면 한동안은 수풀을 헤치고 오르게 된다. 어느 정도 올라서면 길은 다시 좋아져 한동안 진행이 빠르게 간다. 감나무골 임도에서 15분후 표지기가 많이 붙어 있는 봉에 닿는다. 이봉이 감토봉으로 여기도 정상석이나 표지등 표시할만한 것이 없다. 삼각점도 보이지 않아 그저 많은 표지기가 붙어 있는 것으로 이곳이 감토봉이구나 하며 산경표를 보고 정확히 확인을 한다.

 

안부 사거리(신앙고개, 6.80km, 150m) 10:53

감토봉에서 산길은 우측으로 방향이 꺽여서 진행이 된다. 이후 우거진 숲길을 따라 진행을 하면 약30분후 절개지 아래 아스팔트포장도로가 나온다. 절개지를 따라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면 절개지에 친 철망팬스를 한 도막 짤라 놓아 정맥꾼들이 다니도록 배려를 했다. 이곳으로 내려서서 큰 도로를 건너면 앞쪽으로 임도가 빠지는 우측 코너로 산길이 시작된다. 이도로는 공주 탄천면에서 논산등지로 연결이 되는 고개로 가자티고개라 한다. 오르는 입구에 안내도가 있다. 이곳에서 절개지를 따라 오르면 곧 능선에 닿는다. 이후 약 5분을 진행하면 능선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으로 능선을 따라 간다.  6분후 우회길이 있는 됨봉에 닿는다. 대부분 우회 길로 진행을 하여 됨봉으로 오르는 길은 희미하다. 됨봉은 안내도에 표시되어 있으며 네이버 지도에도 표시가 되어 있는 봉으로 해발 약160m로 특이한 점은 없으며 그저 밋밋한 봉으로 여기서 등산로는 좌측으로 급격히 꺽여서 서서히 내려선 후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기 시작하여 5~6분이면 해발 약187봉으로 여기서는 우측으로 방향이 꺽여서 내려서게 된다. 내려서는 길에 파평윤씨 묘 여러기가 나란히 있다. 이후 15분을 진행하면 안부 사거리에 닿는다. 이곳이 탄천면과 초촌면을 잇어 주는 신앙고개로 요즘은 이고개로 넘어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는 고개다.

204.8(이정표 삼거리, 10.43km) 11:57 ~12:17(중식)

신앙고개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평탄한 능선에 닿게 되고 좌측으로 커다란 공원묘지가 보인다. 이후 공원묘지 좌측 능선으로 진행을 하면 10여분 공원묘지 위봉에 닿는다. 해발 약190m로 빨강색으로 된 금남정맥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제 능선은 좌측으로 방향이 꺽여서 공원묘지 뒤 능선을 돌아서 가면 10여분이 지나 토목공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는 지점에 닿는다. 토목공사현장을 내려서서 안부 임도고개를 넘어서면 곧 능선으로 올라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이정표에 좌측은 감투봉 팔각정이 적혀 있고, 우측은 수자원공사 4.02km가 적혀 있다. 우리는 우측 수자원공사 쪽으로 간다. 이후 6분이 지나 성황당터가 있는 고개를 지나고 10여분을 올라서면 능선은 좌측으로 방향이 꺽이고 잠시 평탄한 봉에 올라선 후 곧 능선은 우측으로 방향이 꺽여서 내려서게 되며 좌측으로 신암리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이후 가시밭길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다니지 않는 안부고개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를 지나 잠시 언덕을 넘어서면 가파르게 내려서서 안부고개를 다시한번 더 지나서 오르는 길에 송전탑이 나온다. 송전탑을 지나고 다시 길게 오르게 되면 10여분이 지나 무너진 성터로 보이는 돌무더기 지점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 널찍한 봉에 닿는다. 여기가 184.9봉인지 204.8봉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트랭글 고도로 볼 때는 204.8봉이 맞을 것 같다. 여기 이정표에 부여군 용정리 2.3km, 우리가 온 방향으로 송곡리, 가야할 방향으로 백제 금동대향로가 적혀 있다. 우리는 이봉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출발을 한다.

 

청마고개(오산고개, 세멘포장도로, 13.28km, 70m) 13:11

204.8봉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는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 진행을 한다. 여기부터는 등산로가 매우 좋아 진다. 널찍한 숲길로 이어진다. 습한 날씨로 땀은 비오듯하지만 햇살은 나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10여분을 조금 더 진행을 하면 잠시 올라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 이정표에 우리가 온 방향으로 용정리 0.6km, 좌측으로 수자원공사 1.0km, LPG 4.3km가 적혀 있다. 여기서 좌측으로 조금 높아 보이는 곳이 청마산이다. 잠시 다녀오기로 한다. 삼거리에서 청마산 까지는 2~3분이면 닿는다. 여기도 삼각점이나 정상석등 표시가 될 만한 표시물은 없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좋다. 정맥길 안내도나 정맥지도에는 청마산이 이곳으로 표시가 되어 있으나 네이버지도나 다음지도는 청마산의 위치가 다소 틀리다. 우리는 청마산을 뒤로 하고 다시 삼거리로 돌아가 정맥 길로 진행을 한다. 청마산을 지나고 약15분이면 안부 삼거리에 닿는다. 안부에서 우측 용정리 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이 하나 보인다. 이곳에서 오르는 곳에 통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잠시 가파르게 오르면 산불감시탑이 있는 해발 약181.3봉에 닿는다. 이봉을 넘어서서 통나무계단길을 따라 내려서며 좌측으로 커다란 도로에서 나오는 2개의 터널이 보이고 우측으로 금강줄기가 조망이 된다. 이후 좀 더 지나면 우측으로 망주석이 놓여 있는 산소가 나온다. 산소 앞으로 청마산성 안내문이 있다. 안내문을 지나서 잠시 내려서면 길 우측으로 산성터 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내려서는 길은 매우 널찍하니 잘 나 있다. 7~8분을 진행하면 돌계단을 내려서서 세멘포장길 임도고개에 닿는다. 청마고개라고도 하고 오산고개라고도 한다. 이 길은 부여 용정리와 능산리를 연결하는 길이다. 우측 가까이로 용정리 마을이 보이는 곳이다.

 

석목고개(SK주유소, 큰도로, 석목버스정류장, 15.15km, 55m) 13:40

청마고개 앞으로 이정표가 있다. 거리는 표시되어 있지 않고 진행방향으로 금성산, 지나온 쪽으로 수자원공사가 적혀 있다. 여기서 풀섭을 헤치고 오르면 곧 돌계단이 나온다. 돌계단을 지나고 이제 통나무 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청마고개에서 15분이 지나며 남양홍씨묘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나무가 없는 곳으로 칡밭이 나온다. 칡밭을 지나 잠시 오르면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다. 이정표에는 좌측으로 왕릉 1.1km, 우측으로 금남정맥 LPG 0.9km, 우리가 지나온 쪽으로 수자원공사 4.4km가 적혀 있다. 여기서 좌측 능선 아래로 문화재를 발굴하다 까망덮개로 덮어 놓은 시설물이 있고 바로 우측으로 대리석으로 잘 만들어 놓은 쉼터가 있다. 여기 이정표에는 자세히 적혀 있다. 통수대 2.2km, 성화대 2.7km등이 적혀 있다. 이후 등산로는 매우 좋다. 널찍한 등산로는 따라가면 진주 강씨묘역을 지나고 쉼터를 지나면 민가가 보이는 곳에 하수오(정확치 않음)를 재배하는 밭을 지나 조금 더 내려오면 널찍한 도로가 나온다. 여기 우측으로 SK LPG주유소가 있고 길 건너 편으로 석목 버스정류장이 있다.

 

금성산(통수대, 16.38km, 121m) 14:08 ~14:16

석목고개 이정표에 통수대 1.5km, 정림사지 2.5km가 적혀 있다. 여기서 첫머리 오르는 계단길에는 잡초가 많이 자라 있다. 이곳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면 첫머리에 운동기구가 몇 개 설치되어 있고. 대리석으로 만든 쉼터가 있다. 이후 능선 길은 더욱 좋아져 널찍하게 이어진다. 가면서 삼거리가 나오면 우측 길을 따라 잠시 오른다. 조금 높다란 곳에 이정표가 있으며 이곳을 지나며 부터는 서서히 내려서게 된다. 로프가 설치되어 있고, 통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잠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널찍한 안부사거리에 닿는다. 여기 이정표에 좌측은 가탑리, 우측은 쌍북리, 지나온 청마산성이 3.5km, 금성산의 정상인 통수대가 0.7km 적혀 있다. 이후 통나무계단과 로프가 설치된 널찍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7분후 널찍한 쉼터를 지나고 다시 통나무계단을 따라 잠시 더 오르면 6각정인 통수대가 세워져 있는 금성산 정상이다. 정자 앞쪽으로 금성산성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우리는 잠시 정자에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잠시 쉬었다가 간다.

 

군창지(18.95km, 98m) 15:11

금성산에서 부터 이어지는 길은 대로다. 5분여 내려서면 좌측으로 조왕사로 내려서는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 이정표에 좌측으로 조왕사 0.2km, 진행방향으로 무노정 0.2km, 성화대 0.2km, 지나온 통수대가 0.3km가 적혀 있다. 운동기구가 설치된 길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무노정 정자가 나온다. 6각정자로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박물관 방향이다. 다시 돌아 나와 계백문 방향으로 가야 한다. 여기서 다시 두 갈래길 중 좌측 능선 길을 따라 가면 길옆으로는 세운지 얼마 되지 않는 가로등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생태통로가 나오고 생태통로에서 좌측으로 정림사지가 보인다. 생태통로를 지나면 곧 안내도가 나오며 세멘포장길을 따라 진행하여 여러 개의 비문이 있는 남령공원에 닿는다. 남령공원에서 좌측으로 정림사지가 내려다보인다. 여기서 다시 정면으로 진행하여 앞쪽에 보이는 건물 쪽으로 가면 활 쏘는 곳이 나온다. 활 쏘는 앞쪽으로 샛길을 따라 내려서면 부여도서관앞 도로에 닿는다. 신호등이 꺼져 있어 지나는 차량을 잘보고 건너 도서관 좌측 골목으로 올라서면 좌측으로 부소산성매표소가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부여여고가 나온다. 정맥 길은 부여여고를 관통하여 지나야 하지만 학교를 우측으로 우회하여 가면 산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곧 널찍한 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영일루, 좌측으로 삼충사가 적혀 있는 곳에서 곧장 올라서면 다시 군창지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우측으로 돌아서 조금 더 오르면 널찍한 군창지 앞에 닿는다.

고란사(20.6km, 25m) 16:05 ~16:11

군창지에서 정면으로 가면 정맥 길에서 벗어난다. 다시 돌아 나와 큰길을 따라 가던지 큰길옆 언덕을 따라가면 된다. 이후 10분을 못가서 반월루가 나온다. 반월루에 올라서면 부여시가 내려다보이며 백마강(금강) 구드레나루터 쪽으로 강을 건너는 교량이 보인다. 반월루에서 내려와 다시 길을 따라 가면 궁녀사, 낙화암으로 가는 사거리 상가가 있는 지점에 닿는다. 태자골 숲길 쪽으로 궁녀사가 있고 정면 상가 앞으로 지나서 가면 낙화암, 고란사로 가는 길이다. 상가지역 4거리에서 대략 10분이면 부소산의 정상인 사자루에 닿는다. 길죽한 사각형의 정자로 사자루에 올라보면 백마강 줄기가 보이지만 나무에 가려 멀리까지는 조망이 안 된다. 사자루에서 내려서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가면 연리목이 있고 좀 더 가면 낙화암과 고란사 삼거리다. 잠시 낙화암으로 향한다. 바위지대에 백화정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다. 백화정을 옆으로 돌아서 가면 마지막 낙화암 전망대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그 옛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을 보필하던 3000궁녀가 꽃잎같이 백마강으로 몸을 날렸다고 한다. 조금 터무니없어 보인다. 고작 2~30명 정도가 서면 꽉 촬 공간밖에 안되며 떨어져도 백마강까지는 닿치 않을 것 같다. 어쨌든 고려말 일연이란 분이 지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애기라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다. 낙화암을 뒤로 하고 삼거리에서 강가 쪽으로 내려오면 그 유명한 고란사가 나온다. 여기에 유명한 약수는 절 뒤편에 있다. 시원한 물을 한바가지 퍼 마셨으니 3년은 젊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하여 부소산성의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금남정맥길의 마지막 구르레 나루터로 향한다.

 

부여시외버스터미널(23.14km) 17:02 ~17:39

고란사에서 다시 올라와 연리목이 있는 삼거리애서 연리목 옆으로 능선을 따라가다가 좌측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가니 에고 상가가 있는 사거리가 앞쪽으로 보인다. 다시 돌아와 연리목이 있는 능선에 닿은 후 좌측으로 풀섶을 헤치고 들어가니 등산로가 보인다. 이 길을 따라 끝까지 내려가면 강가옆 큰길이 나오며 길을 따라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면 구드레나루터 선착장 앞에 닿는다. 선착장은 유람선을 타는 손님을 맞는 곳이라 우리는 그 앞에서 금남정맥 길의 마지막을 고하고 잠시 강가 길을 따라 좌측으로 이동을 하니 벌써 코스모스가 만발을 했다. 코스모스길 너머 강가로 들어가니 곧 물가에 닿고 앞쪽으로 황포돛단배가 놓여 있다. 우리는 돛단배를 배경으로 마지막을 고하는 기념사진을 찍고는 돌아 나와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조각공원을 지나 나오다가 우측 골목으로 들어가 농약사가 있는 골목을 따라 좌측으로 이동을 하면 동그렇게 돌아가는 로터리가 나온다. 로터리를 따라 돌아서 좁다란 길을 건너고 다음 골목을 따라 다음 길로 올라서서 우측으로 이동을 하면 파출소를 지나 곧 시외버스정류장에 닿는다. 현재 공사중이라 임시매표소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적막님이 타고 갈 천안행은 17 55, 내가 타고 갈 청주행은 17 39분이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금남정맥 쫑파티도 못하고 헤어졌다.

다음 호남정맥이 끝날 때는 꼭 쫑파티 하기로 합시다.

 

오늘도 이렇게 하여 산행을 마쳤다. 이렇게 하여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시작한 금남호남정맥길 주화산에서 마쳤고, 주화산에서 시작한 금남정맥길 오늘 여기 구르레나루터에서 마쳤다. 이제 다시 주화산으로 올라가 호남정맥길을 힘차게 걸어보기로 합시다.

백두대간길에 연이어 금남길 까지 하느라 적막아우님 수고 많았습니다.

 

산행시간 : 8시간 20분 소요

산행거리 : 23.14km

 

경비

청주 ~오송 버스비 : 1300

오송 ~공주역 고속열차비 : 8400

공주역 ~탄천 진고개 택시비 : 1만원

부여 ~청주 시외버스비 : 9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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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4구간 진고개~청마산~금성산~부소산~구드래나루터

갈 때

747,청주공항~오송역 : 6:20~7:20,(산업단지입구6:47~오송역7:10), 511,정하~오송역 6:00~7:36

오송역 ~공주역 : 7:26 ~7:41(8400), 7:59 ~8:14(천안아산역 정차) 천안아산~오송 : 6:48 ~07:01

공주역 ~복룡고개(건웅산업) : 4.0km (버스 복룡리 후천동: 200,250) 탄천개인택시 : 041-853-5321)

공주역 ~진고개 : 5.42km (이인택시: 041-857-0615, 9800, 4089) 7:55 241번 탄천행, 8:10분 부여행

공주역 ~공주 ; 9:40, *진고개 241번 타고 사장골 정류장 하차 뒤쪽으로 750m 이동

 

청주시외버스터미널 ~공주시외버스터미널 : 6:50, 7:30, 1시간10분 소요 5500

공주 시내버스터미널  진고개 교통편

(화정 가는 230번 버스, 진고개에서 바로 들머리로 들수 있음)

- 공주화정 0640, 0830, 1030, 1330, 1630, 1820

- 화정공주 0720, 0910, 1110, 1410, 1710, 1900

공주산성동버스터미널 ~이인 : 8:00, 8:30 (이인~복룡고개:1.9km, 이인택시: 041-857-0615, 9800, 4089)

 

복룡고개 (공주에서 250 251번 공주역 행 버스 승차하여 후천동정류장 하차, 산성시장 승차 230,220번 효센타정류장 하차) 공주종합터미널 ~공주역 : 200 8:10(100,101,108.125번타고 종합터미널에서 환승)

 

올 때

백마강유람선 ~부여시외버스터미널 : 1.32km,

구드래나루 -부여시외버스터미널(콜택시/041-836-6363): 2,800

 

부여서독안경원(부여읍 사비로 99번길4, 구아리 330-1) ~공주역 : 7:10, 10:30, 13:10, 16:55, 19:00(탄천19:30)

*서독안경원승강장: 소방서 로타리에서 시외버스터미널 방향으로 200m 지점, 502.504번 타고 탄천에서 택시(탄천 ~탄천삼거리에서 우측-진고개 넘어서 좌측 -공주역 7.7km, 탄천개인택시 : 041-853-5321)

*공주역 ~오송역 : 7:00, 8:01, 11:47, 12:34, 13:36, 15:12, 17:47, 19:08, 19:37, 19:55, 21:32(15,8400)

*공주역 ~천안아산역:700,9:52,11:47,13:36, 16:02,19:08, (공주 19:08 -오송19:22~ 19:29-조치원19:34)

(버스: 진고개에서 탄천쪽 우측 사장골 정류장 221,242, - 복룡삼거리에서 250번으로 환승(공주역 2.6KM)

탄천개인택시 : 041-853-5321, 이인택시: 041-857-0615, 041-857-9800, 041-857-4089

*복룡고개 ~공주역 : 4.01KM (좌측 복룡리 후천동 버스정류장(770M)에서 250번 승차 공주역으로

 

부여 ~청주시외버스 : 17:39, 19:30(청주, 9800), 부여 ~대전 복합터미널 : 19:20, 부여~대전:20:10

서대전 ~조치원 : 21:32~21:57 4800, 22:30~22:58 2600 *부여~대전복합 : 1:15분 소요 , 7100

*구드레공원 ~부여시외버스터미널 ; 1km

 

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진고개~-4.9 -가자티고개 -4.1 -184.9 -5.0 -금성산 -2.0 -부소산 -1.0 -구드래나루터

산행거리 : 23.8km 산행소요시간 : 10:00시간 (진고개~부여 17.5km 8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