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천자암봉~천자암~송광사, 운주사, 옹성산(순천 화순)
2011.11.16..수요일 맑음
참석인원 : 마눌이랑 둘이서
청주 5:00 -백양사 6:45 ~7:30(아침식사) -송광사 톨게이트 8:10 -송광사주차장 8:23 ~8:25 - 송광사 매표소 8:30 - 송광사 관람 -등산로입구 9:20 -대피소 10:08 -송광굴목재 10:22 ~10:30 -천자암봉 10:43 ~10:47 -배도사대피소 삼거리 10:52 -헬기장 10:57 -천자암 11:03 ~11:13 -능선고갯마루 11:37 -운구재 11:43 -송광사일주문 12:05 -송광사주차장 12:20 - 화순 능주 운주사로 이동 - 운주사 주차장 13:20 ~13:40(중식) - 운주사 관람 - 운주사 주차장 14:53 - 화순 동복면 옹성산으로 이동 - 옹성산 유격장입구 등산로 초입 15:43 ~15:45 -옹성바위 16:13 -옹암삼거리 16:20 -할머니집 16:27 -삼거리이정표(감나무) 16:35 ~16:45 -쌍문바위 16:48 -백련암삼거리 16:50 -옹성산 정상 17:00 ~17:06 -옹성산성삼거리 17:23 -쌍두봉전 안부 -긴 나무계단 -이정표 사거리안부 (주차장 0.7km) 17:49 -제2주차장(정상 1.2km,옹성산성 1.5km) 17:55 ~17:58 - 유격장입구 등산로 초입 18:04 ~18:25 -옥과 톨게이트 18:42 -죽암휴게소 20:30 ~20:40 -서청주톨게이트 20:52 -청주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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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한국의 삼보(三寶)사찰 가운데 승보(僧寶)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지(松廣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처음에 이렇게 창건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釋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은 채 세상을 뜨자, 1197년(명종 27)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라 칭하고, 도(道)와 선(禪)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 때까지는 송광산이라고 했는데,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의 중흥도량(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肅宗) 2년(1097)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구별해 이렇게 부르기도 하였다. 그 뒤 보조국사의 법맥을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하면서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혔다.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국사전(國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應禪)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큰 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지고, 삼존불(三尊佛)·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물과 《화엄경(華嚴經)》 장판(藏板) 약간만을 건졌다.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설월(雪月)·율암(栗庵)이 퇴락한 건물들을 중수하고, 1943∼1956년에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수·순천사건과 6·25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후 승려 취봉(翠峰)·금당(錦堂)의 노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이어 1983년부터 1990년까지 대웅전을 비롯해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오늘과 같은 승보종찰의 모습을 갖추었다.조계산 내 암자로는 광원암(廣遠庵)·천자암(天子庵)·감로암(甘露庵)·부도암(浮屠庵)·불일암(佛日庵)·판와암(板瓦庵)과 근래에 건립한 오도암(悟道庵) 및 탑전(塔殿:寂光殿) 등이 있고, 56개의 말사와 수련원·성보보수교습원 등의 부설기관이 있다. 백과사전
부처님, 가르침, 승가야말로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가지 요소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르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이라 한다. 곧 경남 양산의 통도사, 경남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이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불보사찰, 해인사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 그리고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을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이라고 한다.
운주사
운주사(運舟寺)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창건에 관한 이야기는 도선(道詵)이 세웠다는 설과 운주(雲住)가 세웠다는 설,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등이 전해지나, 도선이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법당과 석불, 석탑이 많이 훼손되어 폐사로 남아 있다가 1918년에 박윤동(朴潤東)·김여수(金汝水)를 비롯한 16명의 시주로 중건하였다. 건물은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등이 있다. 1942년까지는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석탑 12기와 석불 70기만 남아 있다. 크기는 10m 이상의 거구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매우 투박하고 사실적이며 친숙한 모습이 특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 좌우의 산등성이에 1,000개의 석불과 석탑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80년 6월에는 절 주변이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로는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보물 제796호인 9층석탑, 보물 제 797호인 석조불감, 보물 제798호인 원형다층석탑, 부부 와불(臥佛) 등이 있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도선이 배의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1,000개의 불상과 불탑을 하룻밤 사이에 조성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부부와불은 천불천탑 중 마지막 불상으로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의 조각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1,000년 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한다. 백과사전
운주사 석불 순례길
운주사에서 지금 우리가 만나는 돌부처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한 세기 전만해도 운주사의 돌부처와 석탑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한 점 돌부처가 되어 이 가람에 들어앉은 듯 했다. 그러나 일제와 한국전쟁 등 험난한 시절을 헤쳐 오면서 돌부처와 석탑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다. 더러는 집을 지을 때 기둥 고임돌로 쓰였다. 누군가 죽으면 무덤 앞에 상돌로 쓰기 위해 가져갔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쌓는 축석으로 쓰인 것도 지천이다. 당시만 해도 누구 하나 이 돌부처와 석탑에 눈길을 주는 이가 없었다. 발에 채이고 널린 게 돌부처이고, 석탑이었으니 그 중 몇 개 가져간다고 문제될 게 아니던 시절이었다.
그 험한 시절까지도 견디고 남은 돌부처와 석탑이 지금 운주사에 있는 것들이다. 천불산에서 가지 쳐 나간 두 개의 산줄기가 만든 길고 비좁은 계곡을 따라 돌부처와 석탑이 서 있다. 더러는 제 힘으로 설 수 없어 바위에 기대어 있기도 하고, 더러는 무거운 몸을 주체하지 못해 아직도 누워 있다. 뿐만 아니다. 아직도 발굴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계곡 어딘가에 쑤셔 박혀 있을 돌부처도 지천일 것이다. 그만큼 이 절에는 돌부처와 석탑이 많다. 운주사에는 지금 탑 19기, 돌부처 93구가 전해진다. 일제 때만 해도 지금보다 2배나 많았다고 한다.
시간의 강을 건너며 얼굴 잃은 돌부처들
운주사의 돌부처는 형체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천년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겨 얼굴이 지워진 것이 대부분이다. 분명 눈과 코와 입을 새겨 넣었을 테지만 남아 있는 돌부처는 어렴풋한 형체만 존재한다. 어떤 것은 가사와 몸체가 아주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 얼굴이 지워진 것들이다. 누군가 일부러 얼굴을 지워버렸거나 세월이 할퀴고 간 것이다. 얼굴 없는 돌부처들. 시간이란 긴 강을 건너오면서 상처받고 할퀴어 스스로가 누군지도 모르는 돌부처들. 바로 이 돌부처가 있어 사람들은 운주사를 찾을 때마다 경외의 마음을 갖게 된다.
어쩌면 돌부처는 바라보는 이들 자신일 수 있다. 이 돌부처를 새긴 이들은 부처를 새긴 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돌에 조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운주사의 돌부처와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은 돌부처가 민초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주사의 돌부처는 고압적이거나 높은 곳에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지 않는다. 비록 형태는 지워졌지만 이 땅에 살아왔던 농투성이들처럼 순박하고 꾸밈이 없다.
민중의 심성을 가진 돌부처는 결코 한국인에만 감흥을 준 게 아니다. 2008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도 몇 해 전 운주사를 찾았다가 천불천탑에 감명을 받고 시 를 남겼다.
운주사는 가람 배치가 빼어난 절이 아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지도 않다. 산세가 절경이거나 깊고 그윽한 계곡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운주사의 저력은 무수한 석불과 석탑에 깃든 설화에서 나온다. 운주사를 창건한 이는 풍수지리의 뼈대를 세운 신라 말의 선승 도선국사로 알려졌다. 도선은 한반도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의 형국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배는 중심이 동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는 백두대간에서 가지 쳐 나간 낙동정맥이란 큰 산줄기 탓이다. 따라서 서쪽에도 무거운 것을 만들어 균형을 맞춰줘야 했다. 그래서 운주사에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천불천탑의 신화를 간직한 운주사는 항상 신비감이 감돈다. 도대체 언제 누가 왜 이렇게 많은 석불과 석탑을 조성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안고 석불순례를 하게 된다.
와불이 일어서는 날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전설
운주사가 간직한 설화의 백미는 와불에 있다. 천불산 왼쪽 기슭에는 높이 12m, 폭 10m에 이르는 와불이 있다. 이 와불은 혼자가 아니다. 좌상과 입상을 한 돌부처 2기가 나란히 누워 있다. 와불은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다. 그것도 산등성이를 뒤덮을 만큼 커다란 크기의 와불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독특한 와불에 소설가 황석영은 문학적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황석영은 조선 숙종 때의 의적 장길산의 활약을 다룬 대하소설 [장길산]에서 와불을 용화세상으로 이끌 메시아로 등장시킨다. 천불산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우고 마지막으로 와불을 일으켜 세우면 미륵세상이 도래한다는 것이 이 소설에 묘사된 내용이다. 그러나 와불은 도선국사가 신통력을 부려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에 싫증을 느낀 동자승이 거짓으로 닭아 울었다고 고해 미처 일으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돌아보는 길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일주문에서 절에 이르는 길 주변의 돌부처와 석탑이다. 또 하나는 절집에서 오른쪽 천불산을 올라 공사바위에서 운주사를 내려다본다. 마무리로 절집에서 왼쪽의 능선으로 올라 와불과 석불군 라, 칠성바위를 아우른다. 이렇게 돌아보는 데는 1시간 30분쯤 걸린다. 그러나 석불 하나하나에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시간은 한없이 길어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선 대웅전을 향해 창처럼 도열한 탑들이 반긴다. 불국사 석가탑처럼 비례와 균형미가 넘치는 탑은 아니다. 키가 껑충하게 큰 편이다.
높이는 7m를 헤아린다. 3기의 석탑 뒤로는 돌집을 지어 앞뒤로 석불을 모신 탑도 있다. 길 오른쪽으로는 석불군이 도열해 있다. 바위들이 지붕돌처럼 파여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한두 기의 돌부처가 서 있다. 돌부처가 바위에 어깨를 기대고 있는 산비탈 위에도 석탑이 솟아 있기도 하다.
절집은 특별히 눈여겨 볼만한 것이 없다. 현대에 들어 복원불사를 한 당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석탑이 볼거리다. 탑보다도 탑 주변에 놓인 돌들을 놓치면 안 된다. 이 돌들은 한때 돌부처였거나 석탑이었던 것들이다. 분명 돌무처의 얼굴이었던 것임에도 그저 한갓 돌무덤으로 존재한다.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석불군마가 있다. 얼굴은 형체가 없이 지워졌지만 가사와 몸은 온전히 보존된 석불을 중심으로 몇 기의 돌부처가 벽에 기대어 서 있다. 그 앞으로는 기단 모양이 독특한 탑이 있다. 보통 탑의 옥개석은 팔작지붕처럼 들려 있는데 반해 이것은 복숭아처럼 동글다. 어디 이것뿐이랴. 운주사에 있는 석탑 가운데는 옥개석을 호떡처럼 둥글게 깎아 올려놓은 것들도 많다. 딱히 무엇이라 단언할 수 없는, 질서와 규범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양식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운주사의 석탑들이다.
석불군 마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두 기의 석탑이 있다. 오른편에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면 데크 위에 마애불이 있다. 운주사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애불이다. 워낙 마모가 심한데다 짙푸른 이끼까지 잔뜩 끼어 있어 눈에 힘을 주지 않고는 구별하기 힘들다. 그래도 얼굴의 윤곽은 분명히 남아 있다
마애불에서 두어 걸음이면 공사바위에 닿는다. 이 바위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조성할 때 공사를 감독하던 자리라고 한다. 공사바위에 서면 절에서 일주문을 향해 늘어선 탑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최근에 난 산불로 흉하게 타버린 나무들의 모습도 보인다. 검게 타죽은 나무들은 죽어서도 스러지지 않은 채 남아 고통의 시간을 증거한다.
신화 속에 잠들어 있는 와불. 이 와불이 일어서는 날 새 세상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
돌부처는 부처가 아닌, 이 땅에 살다간 농투성이의 자화상
다시 절집으로 돌아와 맞은편 능선을 오르면 2기의 탑이 서 있다. 역시, 길쭉하게 키만 크고 안정감이라고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석탑들이다. 이 석탑이 놓인 커다란 마당바위 아래에도 석불군 라가 있다. 이곳에도 가사와 몸이 생생한 석불을 중심으로 크기가 제각각인 돌부처 10여기가 서 있다.
와불은 능선의 꼭대기에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와불을 돌아보며 ‘일어설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본다. 가로로 길게 누운 탓에 바라보는 이들도 목을 왼쪽으로 기울인 채 와불과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잠시 신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 본다. 와불 밑에는 원형으로 깎아 놓은 7개의 바위가 있다. 큰 것은 지름이 3m 가까이 된다. 칠성바위라 불리는 이 돌들은 북두칠성을 본 떠 만든 것이라 한다. 혹은 이 원형으로 깎은 바위를 옥계석으로 쌓았던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정답이라 단정 지어 말 할 수 없다. 운주사 자체가 미궁의 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운주사의 석불 순례를 마칠 때쯤이면 도
대체 누가, 왜, 이렇게 많은 돌부처와 탑을 조성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지게 된다. 당시의 기술로는 일으켜 세울 수도 없는 와불을 비롯해 형식과 틀을 무시한 탑과 석불의 파격미는 궁금증을 넘어 당혹감을 안겨준다.
돌부처는 말이 없다. 언제나 그렇듯 바위에 기대어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전부다. 혹여 그 대답은 와불이 간직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전설처럼, 새 세상이 열리는 날 와불이 벌떡 일어서서 이 산에 천불천탑을 조성한 연유를 털어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승용차: 광주(12km) - 화순(10km) - 능주(5.1km) - 평리사거리(2.4km) - 클럽900(2.8km) - 도장리8km) - 도암삼거리(3km) - 운주사 (50분 소요). 군내 버스: 광주 광천터미널 앞에서 318번, 218번 운주사행 버스를 타시면 됩니다.(배차간격1시간) 고속버스: 서울 - 광주 5 - 10분 간격 4시간 소요, 부산 - 광주 20분 간격 4시간 소요, 대구 - 광주 50분 간격 3시간 40분 소요, 대전 - 광주 30분 간격 3시간 50분 소요, 전주 - 광주 20분 간격 1시간 30분 소요. 기차: 서울 - 광주 14회 4시간 20분 소요, 부산 - 광주 2회 7시간 소요, 광주 - 화순 1회 30분 소요.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화순 옹성산
화순 북면 유격훈련장 뒤로 산행코스가 있고, 573m로 높지는 않지만, 옹암바위와 쌍두봉의 거대 암봉이 있어 아찔한 암벽코스의 스릴도 맛볼 수 있다.
비교적 짧은 산행코스로 가볍게 다녀갈 수 있다.
화순 옹성산(573m)은 산 전체가 온통 항아리 모양의 옹기처럼 생겼다 하여 옹성산(甕城山)이라 불려지며,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한 철옹산성이 정상 산자락을 휘어 감고있다. 담양 화순간 15번 국도 상의 독재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는 길이 있으며 안성리 신성마을이나 몽성암 부근에서도 오를 수 있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에 위치한 옹성산은 거대한 암봉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바위가 여러 개 있어 옹성산이라 불렀으며, 암질이나 솟은 모양새가 진안의 마이산과 비슷하지만, 마이산처럼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지 못해 외면당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산행을 해보면 옹성산의 암봉들이 그 절경을 자랑하는데 독아지봉이나 쌍바위봉, 문바위, 옹성암터 등 다른 산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비경들이 숨어 있어 자연조각공원이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 바위산이면서도 곳곳에 샘도 많고 쉴 곳도 많아 뜻밖에도 좋은 산행지임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산성이 있는데 철옹산성이라 부른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방비하려고 쌓았다고 전하며 입암산성, 금성산성과 함께 전남의 3대 산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임진왜란 시에는 이 고을 현감을 지내고 진주성에서 순국한 황진장군이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라 하며 동학이 활발한 때에는 오계련이 이곳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몽촌토성보다 두 배 가량 큰 것으로 조사되었다.
약 캐러 가느니, 화순 옹성산으로
바람도 따사롭다. 옹성산 항아리에 바위옷은 여전하고, 진달래는 붉다. 현호색, 산괴불주머니, 산자고, 제비꽃, 보춘화가 바쁠 것도 서두를 것도 없는 나그네를 반긴다.
천길 벼랑에 소나무가 의젓하고, 적벽강이 휘돌며 낯익은 지도 한 장을 그린다. 고사리며, 원추리, 참취를 얻는 귓가의 새소리는 임을 부르는 사랑노래다. 옹성을 한 바퀴 휘돌아 내려오니 저만큼 반기는 가인이 있다.
김삿갓이다. 그 김삿갓이 동복에서 읊은 시가 ‘약 캐러 가는 길’이다.
약경심홍선(藥徑深紅蘚)
산창만취미(山窓滿翠微)
선군화하취(羨君花下醉)
호접몽중비(胡蝶夢中飛)
약 캐러 가는 길가에 붉은 이끼가 깊고
창밖 산에는 푸르름이 가득한데
그대 꽃 아래 취해 있음이 부럽구려
나비는 꿈속에서 날고 있겠지
화순 동복은 약초로 유명한 고장이다. 동복을 둘러싼 무등산, 백아산 모후산에서 장뇌삼이 많이 재배되었다 한다. 지리적, 지형적으로 좋은 약초가 산에 지천으로 있었으리라.
그곳에 삿갓 선생이 잠시 머물렀다. 마을 사람들이, 아낙네와 처자들까지도 약초를 캐러가는 날 삿갓 선생은 그들 뒤를 따라 나섰다.
동복의 명산이 또 적벽의 주산인 옹성산이다. 옹성산은 이름 그대로 항아리를 엎어놓은 듯한 큰 바위산이다. 그 항아리처럼 생긴 바위가 갈수기에 붉은 빛을 띠는 바위손을 옷으로 입고 있다.
봄 날 약 캐러 가는 길, 산천은 아름답다. 가난이 어디 죄인가? 가난을 쪼개어 밥 한 그릇 나누어주는 사람이 바로 꽃 아니던가? 그 아름다운 꽃에 취해 호접몽을 꾸니,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꿈인가? 가난하지만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살이의 모습이 평화롭고 아름답다.
열심히 살고 아름답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삶이라면 이 세상 더할 행복이 또 있겠는가?
그런 사람들과 작은 가방 하나 달랑 매고 산길을 나설 생각에 잔인하고 잔혹한 세상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오메~세상에 이런 곳이 숨어 있당가
#우리가 꿈꾸는 샹그릴라, 화순적벽!!
영화 ‘적벽대전’의 주 무대인 적벽(赤壁)은 중국 후베이(湖南)성 치비(赤壁)시에 있다. 양쯔강변에 깎아지른 듯한 붉은 절벽이 웅장하게 솟아있다. 험준한 강변 바위에는 주유가 직접 썼다고 하는 해서체 ‘赤壁’ 각자도 있고, 역대 명사들의 글도 많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에도 적벽에 버금가는 곳이 있다. 화순 적벽이다. 판소리 적벽가 예능 보유자인 송순섭 명창(70)은 “중국의 적벽도 절경이지만 화순에 있는 적벽에 비할 것이 못 된다”고 말했다. 기이한 봉우리와 노송(老松), 물안개 피어오르는 물가에 하얀새들이 등장하고 그 옆에는 누각이 화폭에 담긴 이상향(理想鄕). 화순 적벽은 그런 세상이다.
화순 동복댐 주변 약 7km에 4개의 적벽이 있다. 옹성산 정상 아래 있는 노루목적벽, 보산리, 창량리, 물염적벽 등이다. 특히 노루목적벽은 퇴적암층의 층리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1985년 광주지역 식수 해결을 위해 동복댐을 건설하면서 적벽 일부가 물에 잠겼지만 노루목 적벽은 루이 암스트롱의 ‘원더풀 월드’ 노래가 절로 나오는 곳이다. 상수원 보호구역이어서 관광 목적으로는 불허하지만 망향인의 참배는 용연 정수사업소 정수계에 사전 방문 신청하면 출입 가능하다.
광주에서 50분 거리. 화순 묘치재 지나 동복면 소재지에서 3.5km 지점에 옹성산(甕城山)이 있다.
항아리 옹(甕)자를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거대한 항아리를 뒤집어 놓은 듯한 옹암바위(395m)가 압권이다. 엄청난 암봉은 역암이다. 마치 시멘트와 자갈을 버무린 것 같은 이 돌은 진안 마이산과 같은 퇴적암의 일종이다. 산행은 옹암바위 코스가 별미 중의 별미. 안성 저수지 옆에 주차하고 등산 안내도를 참고하면 된다.
#옹성산에서 18억년 전 시간을 보다
유격훈련장으로 오르는 길은 대한민국 젊은 아들들의 땀이 범벅되어 있는 곳. 지금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인근 군부대에서 피나는 유격 훈련을 받고 있는 장소다. ‘克己’라고 쓰여 있는 옹암바위에는 훈련용 밧줄이 놓여있다. 안전시설이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올라야 한다. 담력이 약한사람은 왼쪽 20m 지점, 계단을 이용해 무난히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옹암바위 정상에서의 휴식은 탁 트인 조망과 함께 성취감과 자신감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장씨 할머니집까지는 넓고 편안한 숲길이다. 산 중턱 경치 좋은 곳에 흉하게 버려져있던 이곳을 더 이상 할머니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 아랫동네 주민 오주남(49)씨가 4년 전 경매로 구입 한 뒤 오는 9월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황토방, 야생 수제찻집으로 오픈할 예정이기 때문. 인상 좋은 주인의 마음처럼 산을 찾는 사람들의 좋은 쉼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한반도 암석의 나이는 대체로 18~25억년으로 본다. 쌍문바위, 백련암터, 평상바위 주변은 작은 협곡, 동굴 등 지질의 박물관과도 같은 곳이다. 이곳의 퇴적암 역암에서 수억년 전 사라진 시간의페이지를 거꾸로 읽을 수 있다.
옹성산 정상(572m)에서 내려다보는 동복댐의 경치는 지극히 평화롭고 아름답다. 물 건너편 망향정이 보인다.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100여 개 마을 실향민을 위한 곳, 정상에서는 적벽을 직접 볼수 없다. 망향정에서 옹성산 방향으로 병풍처럼 보이는 절벽이 바로 노루목 적벽이다.
철옹산성(鐵甕山城-전라남도 기념물 제195호)은 고구려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조되었는데 지형을 이용한 천혜의 요새다. 장성 입암산성, 담양 금성산성과 함께 호남의 3대산성이다. 자료에 따르면 약 5천400m 정도의 규모였다고 하나, 지금은 아주 일부만 존재한다. 바위에 구조물을 설치한 구멍과 말 안장 모양의 석물이 있는데 각도로 보아 대포를 설치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쌍두봉에서는 백아산이 코 앞에 보인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밧줄에 의지해 오르고 내렸던 험준한 코스였는데 좌봉과 우봉 사이로 목재 계단을 설치해 하산이 쉽도록 했다. 숲속 중간에 보이는 작은 흰색 나무판들은 군인들이 독도법 훈련을 위해 설치한 시설물이다.
산행코스 : 안성저수지 - 유격훈련장 - 옹암바위 - 쉼터[할머니집] - 쌍문바위 - 정상 - 산성터 - 쌍두봉 - 주차장
산행시간 : 약 3시간 10분
산행수첩 : - 주중에는 군인들 훈련 관계로 옹암바위 코스를 피할
- 등산로는 잘 정비되어 있고 이정표도 양호함
- 주차장 출발 코스는 청소년도 쉽게 산행 가능함
[물염정]
물염적벽이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곳에 있는 정자. 물염 송정순이 건립,
물염이란 '속세에 물들지 않겠다'는 의미
방랑시인 김삿갓 관련 시비가 있다.
전남 화순 옹성산 트레킹
전남 '화순' 하면 천불천탑 운주사로 대표된다. 하룻밤 사이에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이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깃든 사찰이다. 그런데 호기심을 끄는 그 이야기만큼이나 신기한 산이 화순에 하나 있다. 오목한 종지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 생긴 옹성산이다. 뒤편에는 소동파의 적벽과 쌍벽을 이룬다는 화순적벽까지 품고 있는 비범한 산이다.< 여행안내 >▲길잡이: 호남고속도로 옥과IC→15번 국도→안성리에서 저수지 방면 우측 방면→군부대 지나 옹성산 주차장
▲먹거리: 화순읍 계소리에 벽오동보리밥집(061-371-9289)을 추천한다. 돼지수육과 생선구이, 버섯, 도토리묵, 구수한 된장국, 각종 나물무침 등 푸짐한 벽오동보리밥정식이 6000원. 도곡온천이 있는 도곡면 원화리에는 달맞이흑두부(061-375-8465)가 있다. 검은콩을 이용한 두부 전문요리점으로 검은콩청국장과 흑두부보쌈, 흑두부전골 등이 유명하다.▲잠자리: 옹성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복면 가수리에 토원민박(061-371-1555)이 있다. 노루목적벽을 보기 위해 이서면 쪽으로 가면 안심리에 산적소굴(061-371-5191)이라는 민박집이 있다. 옹성산에서 자동차로 20분 거리 정도 떨어진 화순읍에는 그린파크여관(061-374-6677), 꿈의궁전(061-374-0667) 등이 있다.▲문의: 화순군청 문화관광과 061-379-3027옹성산은 화순군 동복면과 북면 등에 걸쳐 있는 572m의 야트막한 산이다. 산행기점은 보통 옹암 바로 아래 자리한 제1주차장과 제2주차장으로 삼는다. 참나무류가 많아 낙엽이 풍성한 옹성산은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지금이 산행에 가장 좋을 시기다. 게다가 요즘엔 운해가 자주 낀다. 동복호라는 커다란 호수를 등지고 있는 탓에 그곳에서 발생한 물안개가 구름이 되어 옹성산 주변을 덮는다. 운해는 보통 아침 9시 넘게까지 지속되는데, 햇빛이 서서히 대기를 달구기 시작하면 언제 그런 구름을 깔아놓았냐는 듯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사실, 이른 아침 옹성산으로 가면 그런 운해가 머리 위에 우산처럼 펼쳐져 있는 줄 알지 못 한다. 다만 지독한 안개가 끼었거니 생각할 뿐이다.어슴푸레한 새벽이 물러가도 말끔한 시계를 돌려주지 않는 일기를 탓하면서 옹성산으로 향한다. 15번 국도를 타고 화순읍 방면으로 내려가다 보면 동복면 안성리가 나오는데 옹성산에 가려면 안성저수지 방면을 택해야 한다. 저수지 가는 길목에 군부대를 하나 지난다. 이곳에서 500m쯤 가면 안성저수지다. 물은 말라 있다. 가을 가뭄 탓이다.저수지쯤 오면 옹성산의 옹암이 왼쪽 편에 보여야 정상이다. 하지만 안개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저수지 바로 앞 제1주차장을 거쳐 제2주차장 쪽으로 가자 비로소 옹암이 언뜻 보인다. 그것도 안개가 아주 잠시 장력을 풀어헤쳤을 때뿐이다. 해는 이미 앞산의 머리를 타고 올 라왔는지 옹암 부분을 밝게 비춘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옹암이 누렇게 빛나며 매끈한 자태를 뽐내는데 그 모습이 종지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다.제1주차장이나 제2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할 경우 옹암을 제일 먼저 밟는 것이 대강의 순서다. 제2주차장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옹성산성 방향으로 길을 잡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안개와 햇빛 속에서 오묘한 모습을 선보이는 옹암 쪽으로 길을 잡는다. 멀진 않지만 가파른 길이 옹암까지 이어진다. 길은 보드랍고 낙엽이 폭신하다. 그렇게 20분쯤 천천히 오르면 옹암삼거리에 이른다. 왼쪽 길은 옹암, 오른쪽은 옹성산 정상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옹암까지는 약 500m, 정상까지는 2.4㎞다.옹암바위로 오르는데 점점 시야가 맑아진다. 안개가 하나도 없다. 그런데 밑을 보니 안개들이 뭉치고 또 뭉쳐 구름을 이루고 있다. 서 있는 곳의 높이가 해발 400m도 채 되지 않을 텐데, 구름이 발 아래 있는 것이다. 옹암 머리에 오르자 구름은 좌우 앞뒤 할 것 없이 사방에 두껍게 퍼져 있다. 높은 산의 봉우리들만 구름을 뚫고 머리를 내밀 뿐이다.꽤 많은 시간을 옹암에서 지체하고 정상으로 향한다. 걸음이 한결 편하다. 옹암까지 오르던 경사보다 덜 하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다시 갈래 길을 만난다. 옹성삼거리다. 옹성산성으로 향하는 오른쪽 길과 정상으로 향하는 왼쪽 길로 나뉜다. 산성까지는 700m, 정상까지는 약 800m의 거리다.정상을 거쳐 능선을 따라 옹성산성을 둘러보고 하산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내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 길로 5분쯤 오르자 불에 탄 집이 하나 나온다. 5~6년 전만 해도 90세 넘은 할머니가 살던 집이다. 그러나 그 할머니가 사망한 후 불에 탄 모습으로 방치된 채 남아 있다. 그 집의 사연이야 어떻든 예전과 다름없이 뒤편 감나무에는 빨간 홍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오른쪽의 은행나무에는 노란 단풍이 찬란하다.폐가를 뒤로 하고 정상으로 오른다. 쌍문바위와 백련암을 지나자 다시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은 정상으로 곧장 가는 길, 왼쪽은 돌아가는 길이다. 질러서 가면 400m, 돌아가면 1500m 거리다. 바쁠 것 없는 걸음, 천천히 등성이를 빙 둘러 가는 길을 택한다. 산길은 좁고 또한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흔적은 남아 있어서 따라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그렇게 30분쯤 걸었을까. 왼쪽으로 거대한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동복호다. 1985년 7월 이서면 서리의 동복천을 가로막아 댐을 만들면서 형성된 호수다. 이 호수는 '화순적벽'이라는 대단한 절경을 품고 있다. 화순적벽은 모두 4개다. 노루목적벽, 보산적벽, 창랑적벽, 물염적벽이 그것이다. 화순적벽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신재 최산두라는 인물이 맨 처음 붙인 것이다. 1519년 기묘사화 후 화순에 유배 온 최산두가 그 절경을 보고, 소동파가 시를 지어 부르던 중국 호북성 황주의 적벽과 쌍벽을 이룬다 하여 화순적벽이라 하였다.현재 화순적벽은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의 경우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하나 옹성산의 남쪽 단면인 노루목적벽과 보산적벽은 원칙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물염적벽과 창랑적벽은 가까이 있다. 물염적벽은 창랑리 물염정에서 볼 수 있고, 창랑적벽은 따로 뷰포인트가 없지만 길가에서 편히 조망된다. 노루목적벽을 보려면 망향정으로 가야만 하고, 보산적벽의 경우 배를 띄워야 한다.옹성산 정상에 서면 동복호의 전경이 눈에 잡히는데, 정면에 볼록 튀어나온 지형이 있고 그곳에 정자 하나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망향정이다. 동복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 마을 주민들이 향수를 달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지은 정자다. 이곳이 노루목적벽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노루목적벽은 4개의 화순적벽 가운데 가장 크고 웅장하다. 길이 100m가 훨씬 넘고 수면 위로 내민 절벽의 높이도 50m를 훌쩍 넘긴다. 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높이 100m의 절벽이었다. 보산적벽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60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두 적벽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까닭에 수몰민을 제외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그러나 화순군청에 미리 문의를 하고 방문신청을 하면 편의를 봐준다.한편, 옹성산 정상부터는 산성 쪽으로 편안한 능선이 이어진다. 산성까지는 약 1.6㎞. 조릿대(벼과 식물 이름)가 무성한 길을 지나 10분쯤 더 걸어가면 고려시대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산성이 보인다. 철옹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석축성이다. 전체 둘레 5400m 중 극히 일부분만 남아 있다. 철옹산성을 지나면서부터는 곧 급격한 내리막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길을 다 지나면 상쾌한 공기를 내뿜는 소나무숲이 300m쯤 이어지고 드디어 산행이 마무리된다.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Copyrights ⓒ 일요신문( www.ilyo.co.kr ),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모후산 동그라미 종주란:
동복호와 주암호를 배경으로 조망산행으로 추천하고싶다.
특히 운월재~ 모후산까지 주암호가 각양각색으로 변하는 모습은 과히 자연의 위대함이고 말하고싶습니다.
옹성산도 나름 바위산으로 운치가 멋진곳이기도 합니다 모후지맥길과 연계되어 길은 좋은편입니다
거리는 도상40km정도입니다
산행코스 : 동복 -옹성산 -독재터널 -밤실산(579.9m) -운월재 -운월산(671.5m) -679.9봉 -유치재 -모후산(919.9m) -용문치 -동북터널 -동복
전남 산들의 조망터 백아산-매봉-옹성산 U자로 종주하기
남도의 멋진 산들을 조망할 수 있는 백아산-옹성산 종주
이천리-마당바위-x746m-백아산(818m)-x765m-모후지맥 능선-송치 임도-후루목재-매봉(△650m)-노치-△647.5m-독재 임도-쌍두봉(507m)-철옹산성-옹성산(△573.5m)-백련암-x395m(음암바위)-인성저수지
도상거리 : 19km
소재지 : 전남 화순군 북면, 동복면, 석곡면, 순천시 주암면
화순적벽
동복천 상류인 창랑천에는 약 7km에 걸쳐 수려한 절벽경관이 발달하고 있는데 대표 적인 것으로는 동복댐 상류에 있는 적벽(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창랑리, 물염적벽 등 4개의 군으로 나뉘어 있다.
적벽(노루목 적벽)은 수려한 자연경관이라든가 웅장함 그리고 위락공간으로서 주변 의 적절한 자연조건 때문에, 동복댐이 만들어지기 직전까지 옛날부터 널리 알려진 명승지이다.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에 유배중이던 신재 최산두가 이 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소동파가 선유하며 그 유명한 적벽부를 지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 했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깎아세운듯한 수백척 단애절벽의 절경에 젖어 방랑시인 김삿 갓(김병연)도 이곳에서 방랑을 멈추고 생을 마쳤다. 물염적벽은 규모나 풍치면에서 노루목 적벽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 건너편 언덕 위에 송정순이 건립한 물염정이 있 어 위락공간으로 이름이 높다.
보산적벽은 노루목에서 서쪽으로 약 600m거리에 있는 보산리의 북쪽 계류가에 형성 되어 있다. 창랑적벽은 창랑리에 있는데 높이 약 40m에 길이가 100m가량 이어진 절벽군으로 웅 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노루목 적벽과 보산리 적벽은 동복댐 보호구역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임도 개설로 한결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적벽앞에는 망향정과 보안사지석탑이 파괴 된 채 일부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다.
위 치 : 전남 화순군 이서면 창량리 , 장학리, 보산리 일대
도로안내 : 광주에서 너릿재터널을 지나 화순읍까지(22, 29번 국도이용)간 후 벌교, 고흥 방면 으로 22번 국도를 따라 동면, 구암삼거리까지 가서 좌회전하여 15, 22번 국도를 따 라가다 경치리 삼거리(묘치고개)에서 좌회전하여 동복댐 우회도로를 따라 6km쯤 가 면 오른쪽으로 적벽가는 임도가 있고 철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 문에서 4km쯤 가면 적벽에 이른다. 광주-(12km)-화순-(7.3km)-동면-(3.5km)-구암삼거리-(5km)-묘치-(6km)-적벽입구 -(4km)-적벽
현지교통 : 화순군내버스(217-1번중 서리, 야사, 다곡방면)가 적벽입구까지 운행
광주광천동터미널앞-광주상공회의소-백운동로터리-남광주로터리-학동정류소 -화순읍 군내버스터미널-동면-구암삼거리-묘치-서리-적벽입구-야사리
주변명소 : 물염정, 화순온천, 공룡발자국화석지, 백아산자연휴양림, 백아산관광목장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날…
쪽빛 연못에 비친 전남 장성‘백양사’아기 단풍에 취하고…화순땅 밟으니 올곧은 선비 기상 빼닮은‘4대 적벽’이 날 반기네
1400년 고찰 새색시 같은 백양사뛰어난 풍광에 애국가 영상 삽입화순 적벽은 조선 10경 중 하나푸른 비단에 산수화 그려 놓은 듯
노을빛 아득하니 저무는 산이 붉고/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붓을 잡고 생각하니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고려 충절 정몽주 선생이 백양사(白羊寺)의 절경에 탄식하며 썼다는 ‘쌍계루(雙溪樓)’ 한 구절이다.무상한 세월에 모든 게 간데없지만 백양사의 빼어난 미모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쪽빛 연못 물에 비친 천년 고찰의 그림자가 마냥 수줍고 멋스럽다.장성군 백양사가 새색시의 자태라면 이웃한 화순군 4대적벽은 그 웅장함이 올곧은 선비의 기상을 빼닮았다. 조선의 개혁가 조광조가 사약을 받기 전 마지막으로 절경에 인생무상을 슬퍼했다던 한이 서린 곳이다. 풍상에 깎인 기암절벽은 굽이치며 동복천을 휘감는다. 지난 주말 호남의 두 절경이 자리한 전남 장성과 화순에 다녀왔다.▶조선 8대 비경 천년고찰 백양사=백암산국립공원 입구에서 단풍길을 따라 200m쯤 올라가니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 펼쳐진다. 풍광이 빼어나 방송사 애국가 영상의 한 장면으로 삽입된 백양사다.백양사 풍광은 어느 한 철 안 좋을 때가 없지만 빛깔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장성 아기단풍이 제 빛깔을 내는 가을이 천하 절경 중의 절경이다. 오색 아기단풍에 물든 백암산이 백양사와 쌍계루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다. 절 앞의 맑디맑은 연못은 단풍이 물 위까지 가지를 길게 드리웠다. 선녀가 곱게 머리를 감다가 나그네를 보고 놀란 듯 붉디붉다.1400여년 전 백제 무왕 33년 때 세워진 백양사는 모진 세월에 인근 계곡에서 절터가 옮겨왔고 이름도 수없이 바뀌었다. 첫 이름은 백암사(白巖寺). 여기엔 전설이 하나 전해온다. 한 스님의 꿈에 흰 양이 나타나 자신은 수행과 덕을 쌓고 천상으로 떠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잠에서 깬 스님은 절 뒷산에서 흰 양의 주검을 발견하고 절 이름을 바꿨다. 가을 햇볕 가득한 절 뜰에는 낙엽 진 홍매화 한 그루가 쓸쓸하다. 홍수에 살아남아 옮겨 심었다는 350년 된 천연기념물 486호 고불매(古佛梅)다. 선암산 선암매, 전남대 대명매, 담양의 계당매, 소록도 수양매와 함께 호남 5매(五梅)로 불린다. 꽃 빛깔이 아름답고 향기가 은은한 토종 매화다.▶역사가 묻어나는 약사암ㆍ천진암ㆍ남창계곡=눈과 마음이 아기단풍의 맛에 취하고 고찰의 멋에 심취해 잠시 혼이 나갔다면,가을 찬바람에 정신을 차린 발걸음은 백양사 부속 암자 약사암과 영천굴로 향한다. 약사암에 두 명의 스님이 살았는데 영천굴에 가면 늘 바위틈에서 요술처럼 두 명분의 쌀이 나왔다. 욕심이 난 스님 하나가 바위틈을 파내자 쌀 대신 피가 나왔다는 얘기다. 피가 났다는 자리에는 지금은 달고 깊은 맛의 약수가 나온다.약사암을 내려와 20분쯤 달렸을까,좁은 길에 들어서니 비구니 암자 천진암이다. 돌계단부터 입구까지 담벼락처럼 펼쳐진 대나무숲길을 지나야 한다.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야 비로소 아기자기한 모습을 드러낸다. 뜰엔 탱자나무와 감나무에 노랗고 파란 열매가 산사의 고즈넉한 멋을 더해준다.
인근의 남창 계곡은 한반도 식물의 남북 경계가 나뉘는 곳이다. 하늘을 찌를 듯 울창하게 서 있는 비자나무, 갈참나무, 삼나무, 편백나무와 더불어 고로쇠나무 군락도 남창계곡의 명물이다. ▶조광조의 넋이 서린 화순 적벽(赤壁)=장성 여행을 마치고 화순 땅을 밟으니 화순 적벽이 장엄한 기상을 드러냈다.동복천을 따라 창랑천까지 7㎞ 물길에 물염, 창랑, 노루목(장항), 이서 등 4대 적벽이 펼쳐진다. 적벽은 중국 황저우(黃州) 상류의 적벽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화순 적벽은 조선 10경 중 하나였을 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바위 빛이 서로 교차하고 투영돼 마치 푸른 비단 폭에 산수화를 그려 놓은 듯 멋스럽다. 적벽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조선 중종 때 유학자이자 개혁 정치가였던 조광조(1482~1519)가 화순에서 사약을 받기 직전 25일간 배를 타고 다니며 절경에 한을 달랬다고 한다. 화순엔 아직도 그가 사약을 받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적벽 중 최고는 동복천 한가운데 서로 마주보는 노루목적벽과 이서적벽이다. 화순 적벽이라고 하면 이 두 적벽을 말한다. 경치는 사진이나 말로는 표현 못할 빼어난 미모를 자랑한다. 현재는 동복천이 광주광역시의 상수도보호구역으로 묶여 아쉽게도 40년째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모시는 수몰지 실향민에게만 문이 열리는 잃어버린 호남의 절경이 됐다.심형준 기자/cerju@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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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사 휴게소 6:45 ~7:30
오늘은 내 생일이자 어제는 울 마님이 해마자 강조하는 결혼기념이다. 오늘 겸사 겸사 해서 순천 송광면에 있는 송광사와 그 뒤편에 있는 천자암봉을 거쳐 천자암에 있는 쌍향수를 둘러 본 후 화순 능주 부근의 운주사와 화순 동복면의 옹성산을 두루 살펴 볼 예정이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나들이 채비 준비하여 집을 나와 5시 정각 출발을 한다. 서청주 톨게이트로 진입을 하여 호남고속도로로 접어 들어 달리니 아침 이른 시간인지라 차들도 많지 않고 하여 백양사 휴게소에 1시간 45분이 소요되어 도착을 한다. 백양사 휴게소에서 순부두를 시켜 아침을 먹고 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 되었다. 휴게소에서 이제껏 가장 많은 45분을 쉰 다음 송광사로 향한다.
송광사주차장 8:23 ~8:25
백양사휴게소를 떠나 잠시 후 담양~고창간 고속도로로 진입을 하여 달리면 좌측으로 불태산과 병풍산이 보이며 터널을 몇 개 빠져 나간 후 대덕 분기점에서 다시 호남고속도로와 만난다. 이후 달리면 옥과 톨게이트 부근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작은 암봉이 설산인 듯하며 곡성휴게소를 지나 송광사 톨게이트를 빠져 나온 후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면 얼마안가 벌교 쪽으로 가는 도로를 타고 달린다. 송광사 톨게이트에서 13분을 가니 주암호변을 지나 송광사 주차장에 닿는다.
송광사 8:30~9:20
송광사 주차장에서 5분여 올라가면 매표소가 있다. 입장료 3000원이다. 단체 30인이상 2500원, 학생 2000원 학생단체 1500원 관람시간은 하계 6시~19시, 동계 7시~18시까지 이다. 매표소를 지나 오르면 우측으로 차도와 좌측으로 인도가 있다. 좌측 인도를 따라 오르면 5분후 편백나무숲이 있는 곳에서 우측 차도로 오른다. 이곳에서 도로 우측으로 사리탑이 있고, 좀더 오르면 좌측으로 불일암, 광원암, 감로암으로 가는 길이 있고, 이 길을 따라 다리를 건너 개울을 따라 오르면 송광사 선호당 자제원 무무문(無無門)이 나온다. 이후 관음전 대웅보전 승보전 약사전 영산전 등 많은 사찰을 돌아 보는데 대략 50분이 소요되었다. 송광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중 하나로 한국불교의 승맥을 잇는다하여 승보사찰이라한다. 통도사는 불보사찰 해인사는 법보사찰이라한다.
송광사의 3대 국보로
(국보제42호 목조삼존불감)
높이 13.9cm 폭 7cm되는 목조삼존불감은 보조국사 지눌의 원불이다. 이것은 지눌이 늘 지니고 다니던 나무로 만든 부처함으로, 닫으면 원통형이지만 펼치면 가운데 여래좌상, 좌우에 보현과 문수보살이 각각 배치는 구조이다. 우리나라엔 흔치않은 양식으로 세부묘사가 정교하고 세련돼 있다.
(국보제 43호 고려 고종제서)
고종제서는 고려 고종2년(1215년) 보조국사 지눌의 정혜결사 정신을 이어받은 제2대 진각국사 혜심에게 왕이 선사의 칭호를 내린 고문서 원본이다.
길이 33cm 폭 36cm의 두루마리도 꽃무늬가 고운 비단바탕에 글씨가 씌어 있으며, 고려시대 선사, 대선사제도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끝에 ‘貞祐四年正月日’(정우4년 정월일) 이란 시행년월이 있고, 이어서 최홍윤 이하 당시 봉직자들의 관직과 성을 열거하고 수결이 되어 있다. 보존상태가 나빠 비단은 삭고 글자는 닮아 판독할 수 없지만, 고려시대와 불교와 조정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유일한 고문서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국보 56호 국사전)
16국사의 영정을 모신 조사전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는 맞배지붕이다. 대부분 우리건축물의 정면칸수가 홀수인데 반해 국사전의 정면 칸수는 짝수인 4칸인 것이 특이하다.
국사전은 승보사찰 송광사의 상징적 건물이다. 고려시대 왕으로부터 국사의 칭호를 받은 15인의 국사와 조선시대에 그 공덕이 지난날의 국사와 같다고 하여 종문에서 국사의 칭호를 붙인 고봉화상을 합한 16국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전각이다. 국사전은 기둥의 높이와 처마의 깊이가 큰 차이가 없어 낮아 보인다. 앞쪽은 겹처마, 뒤쪽은 홑처마로 옆에서 보면 앞뒤의 지붕의 크기도 다르다.
그밖에 보물로 보물 제572호 노비첩, 보물 제175호 송광사 경패, 보물 제263호 송광사 하사당 등이 있다.
송광 굴목재 10:22 ~10:30
송광사를 50여분에 걸쳐 관람을 하고 뒤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수석정교 삼거리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절에서 농사를 짓는 듯 한 배추밭이 보인다. 천자암 쌍향수를 관람하고 내려 올적 저곳으로 내려올 것이다. 이곳의 이정표에는 선암사가 6.5km, 내려올 곳으로 천자암이 3.4km의 거리다. 이곳에서 좌측편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이제는 단풍도 지고 황망한 산길에는 낙엽만이 뒹굴고 있다. 목교를 지나고 4분여를 더 오르니 보소의 전설이란 것이 있다. “보소”는 이곳 절벽아래(토 다리 삼거리 약70m 못 미쳐 아래) 있는 깊은 소의 이름이다. 보소의 한자어 뜻은 “대들보 ‘보’ 늪 ‘소’’‘ 이다. 이와 같이 “대들보 늪 ”이라 불리는 사연의 전설은 조선시대 척불로 핍박 받던 송광사 스님들의 절절한 애환과 항변의 단면이 서려 있다. 잠시 후 장군봉 삼거리에 이정표가 있다. 송광사 1.0km, 장군봉 4.8km, 선암사 5.5km의 거리다. 이곳에서 송광굴목재는 우측길이다. 다시 목교를 지나 오르면 피아골 이야기가 적힌 안내문이 있다. 피아골은 액을 피하는 골짜기라는 뜻이란다. 여기서 송광사는 40분, 보리밥집은 60분 거리라고 적혀 있다. 다시 10분후 조그만 대피소가 나오고 이곳부터 오르는 돌계단길이 가파르고 힘든 곳이다. 거리를 멀어 보이지 않지만 가파른 곳이라서 14분이 소요되어 송광굴목재에 오른다. 울님 마님은 힘이 드나 이곳에 오르기 전 불러 세우더니 되돌아 간다고 엄포다.
천자암봉 10:43 ~10:47
송광굴목재에는 이지방의 산악회에서 세운 비가 있다. 해발 720m 송광사 2.5km, 선암사 4km라 쓰여 있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동으로 가면 조계산 정상인 장군봉이요, 서로 가면 천자암봉을 거쳐 천자암으로 가는 길이다. 이정표 기둥에 “남도삼백리(천년불심)길 송광굴목재”라 쓰여 있다. 장군봉 4.4km, 천자암1.7km다. 잠시 이곳에서 따끈한 커피를 마시며 시원한 바람 맞아 가며 휴식을 취한다음 천자암봉으로 향하니 처음 조금 오른 후 부터는 크게 가파르지 않게 오른다. 등산로도 따뜻한 양지 바른 곳으로 있어 봄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다. 굴목재에서 13분을 오르니 천자암봉 정상에 닿는다. 천자암봉 정상에는 커다란 돌이 하나 있으나 정상석이나 삼각점등 정상을 표시할 특징적인 것은 없다. 정상아래 바위부분이 조망도 좋고 아래로 절벽지대가 있다.
천자암 11:03 ~11:13
천자암을 거쳐 송광사 주차장에서 11시 출발하려던 것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천자암봉에서부터 내려서는 길로 등산로는 좋다. 조금 내려오니 이정표가 있다. 좌측으로 배도사 대피소0.8km, 천자암 0.8km, 송광굴목재 0.9km거리다. 4분후 헬기장을 지나고 다시 4분을 더 가면 천자암 바로 전 이정표가 있는 곳에 닿는다. 안내도가 있다.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천자암전 마지막 이정표에는 송광사 3.5km, 이읍 2.0km, 송광굴목재 1.7km다. 앞쪽으로 물건을 끌어 올리는 곤돌라가 보이고 종각아래쪽으로 아직도 예쁜 꽃들이 만발해 있다. 그 위쪽으로 천자암이 있다. 암자 치고는 규모가 크다. 천자암 본채가 있고 우측으로 나한전이 있다. 그사이에 힘들게 쌍향수가 있다. 쌍향수를 보는 순간 힘들게 찾아온 보람을 느낀다. 오랜 세월 만고풍상을 겪고 살아온 느낌이 확든다. 꼬불꼬불 뒤틀린 모습과 균형잡힌 몸매가 우리나라 최고의 향나무임을 실감한다. 조계산 마루 천자암 뒤뜰에 오랜 세월 자란 곱향나무는 수령이 800년이 된 것으로 추정이 되며 두 그루의 향나무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쌍향수란 이름을 얻었다. 나무전체가 엿가락같이 휘어져 있으며 나뭇가지가 땅을 향하고 있다. 천자암 쌍향수는 송광사의 3대 명물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 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나무높이는 12.5m, 둘레는 3.98m로 전설에 의하면 조계산에 천자암을 짓고 수도하던 보조국사가 중국에서 돌아 올 때 짚고 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자랐다고 전해 지며 엿가락처럼 비비꼬인 것이 특징이다.
송광사의 3대 명물로는 천자암 쌍향수외 비사리 구시가 있다.
1724년 전라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 영조이후 국제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 약 7가마 분량 밥을 저장 할 수 있다고 한다. 능견난사, 쌍향수와 함께 송광사 3대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밖에 능견난사가 있다.
‘능견난사’는 절의 음식을 담아 내는 그릇으로 크기와 형태가 일정한 수공예품이다. 송광사 제6대 원감국사가 중국원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며 만든 기법이 특이하여 위로 포개도 맞고, 아래도 맞춰도 그 크기가 딱 맞는다고 한다. 초기에는 500여점이 있었으나 현재는 30점이 남아 있다. 본래 능견난사의 이름은 응기였다. 훗날 조선 숙종이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포개어지는 것이 신기해 장인에게 똑같이 만들게 명했지만 도저히 똑같이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송광사 주차장 12:20
천자암의 쌍향수를 보고 나서 천자암봉을 좌측으로 우회하는 길을 따라 산길을 돌아 가면 걷기에 아주 좋은 길로 거리에 비해 시간이 덜 걸리는 길이다. 25분여를 돌아가면 능선에 닿고 고개를 넘어 능선을 따라가면 6분후 송광사와 이읍리를 잇는 운구재에 닿는다. 운구재에서부터 송광사쪽으로 내려서는 길을 따르면 8분후 운동장을 비롯한 배추밭 채마밭이 있는 곳에 닿은 후 잠시 후 수석정교 삼거리에 닿는다. 이후 송광사의 일주문을 지나 큰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20분이 소요된다. 송광사 주차장에 닿은 후 61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운주사로 향한다.
운주사 주차장 13:20 ~13:40(중식)
송광사를 떠나 운주사로 향하는 길에는 고인돌 공원이 있으나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그냥 지나친다. 주암호변을 돌아가는 길은 운치도 있고 가끔씩 볼거리도 있다. 고인돌 공원을 지나면 얼마 후 삼거리가 나온다. 경찰초소도 있는 곳으로 조각공원과 서재필 기념공원이 있다. 조경도 잘해 놓아 한번 둘러 보고 싶으나 오늘 일정으로는 시간이 없는 관계로 다음에 한번쯤 이곳을 들르면 꼭 보고 가야겠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주암호를 건너는 큰 교량 2개를 건너면 대원사 삼거리라 되어 있으며 좌측으로 주암호를 따라 아름다운길이라 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보성군립미술관이 있고 그 끝에 대원사가 자리잡고 있으나 잠시 조금 들어가다 나왔다. 대원사 삼거리에서 조금을 가면 다리건너기 전 모후산 유마사로 들어가는 길이 있고 구암 교차로에서 좌회전하여 가면 몇 개의 터널을 지나 화순이 나온다. 화순교차로에서 좌측으로 돌아서 가면 능주 춘양을 거쳐 운주사에 닿는다. 송광사에서 꼭 1시간이 걸렸다.
운주사 관람 13:40 ~14:53
운주사 주차장에서 자리를 펴고 점심식사를 한 후 매표소에서 3000천냥을 내고 운주사로 들어간다. 조금 들어가면 좌측편으로 여러개의 불상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 있다. 그 위쪽으로 칠성바위와 와형석조여래불이 있는 작은 동산이 보이고 앞쪽으로 조금을 더 가니 9층 석탑이 첫 번째로 우리와 대면을 한다. 운주사 9층 석탑은 보물 796호로 높이 10.7m. 보물 제796호. 운주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입구 약 200m 지점에 있는 이 석탑은, 거대한 암반 위에 별도의 지대석(地臺石)이 없이 암반 자체에다 3, 4단의 굄대를 각출하고, 그 위에 기단부(基壇部) 면석(面石)을 올렸다.
4매의 판석(板石)으로 짜여진 각 면의 귀퉁이에는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가 모각(模刻)되었고, 면석 안쪽으로 보조 우주가 뚜렷하게 마련되었다. 기단갑석(基壇甲石)은 운주사의 모든 탑이 그러하듯이, 초층 옥개석(屋蓋石)으로 대치되고 있는데 이는 고려로 내려오면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옥개석 하면은 약간 반전되면서 여러 겹의 선문(線文)이 ?형태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상층 정상부까지 계속되었다. 탑신부(塔身部)에 있어서는 옥개석과 탑신이 각 1석씩으로 되어 있으나, 2층과 3층의 탑신은 4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어 있다.
또 탑신의 각 4면에 2조선으로 된 마름모꼴을 표출하고 그 안으로 화문을 삽입하였다. 이러한 조식기법은 운주사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다. 정상에는 원추형의 석재와 보륜(寶輪) 등의 상륜부(相輪部)가 놓여 있다. 이 탑은 운주사의 현존하는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다.
조금씩 들어가며 우측으로 거지석탑, 석불군, 9층석탑 뒤로 칠층석탑 쌍교차문칠층석탑 광배석불좌상이 있고 우측으로 석불군 위쪽에 나무계단을 놓은 위쪽에 수직문 칠층석탑이 있다. 다음에 석조불감앞칠층석탑이 있고 뒤편에 석조불감이 있다. 석조불감은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79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5.3m, 재료는 화강석이다. 운주사는 화순군 도암면 천불산(千佛山)에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에 딸린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도선(道詵:827∼898)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가리킨다. 운주사의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龕室)이다. 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감실 안에는 남쪽과 북쪽을 향하고 있는 여래좌상이 있다.불감은 맨 밑에 4각의 평판석(平板石)으로 지대석(地臺石)을 깔고, 그 위로 4각 돌기둥을 세워 석실을 조성하여 이를 받치게 하였으며, 그 위에 팔작(八作)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었고, 석실 전면과 후면에 각각 불상을 안치하였다. 원래는 석실 전후에 석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던 모양이나, 지금은 석문을 달았던 흔적만 남아 있다. 남쪽의 불상은 전체높이 255㎝로 소발의 머리에 길고 예리한 코, 작은 입과 목에 삼도(三道)가 표현되었고 법의(法衣)는 양 어깨를 모두 감싼 통견(通肩)이며 도식적인 옷주름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배에 대고 왼손을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인데, 입체감이 없는 경직된 모습이다. 전체높이 264㎝인 북쪽의 불상도 같은 양식을 보이는데 옷 속에 싸인 두 손은 가슴에 모아 지권인(智拳印)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화되고 경직된 불상 양식과 도식적인 옷주름 표현 등 불상을 새긴 수법은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 양식을 나타낸다.
석조불감뒤로 원형다층석탑이 있고, 보제루 대웅전 관음전을 거쳐 뒤편으로 발형다층석탑 마애불 공사바위등이 있다. 공사바위를 구경하고 내려와 다시 올라가면 거북바위 5층석탑 칠층석탑 와불 칠성바위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으로 운주사의 이모저모를 구경하고 나오는데 대략 1시간 15분이 소요되었다.
옹성산유격장입구 등산로 초입 15:43 ~15:45
운주사에서 나오면 춘양을 거쳐 능주 화순으로 되돌아 나온다. 화순교차로에서 다시 벌교 가는 쪽으로 구암 교차로에서 화순 동복 쪽으로 간다. 이렇게 하여 동복을 지나면 좌측으로 아담하게 생긴 바위가 보이며 동복유격대로 들어가는 소로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들어 가면 초병이 지키고 있는 유격대 건물 앞을 지나 옹성산입구로 들어간다. 유격장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시멘트로 널찍하니 하여 차량을 주차 할 수 있게 하였다. 등산로 입구에는 안내도가 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제2주차장이 있으며 그곳이 이곳보다는 더 널찍하다.
옹성바위 16:13
유격장입구 등산로로 올라가면 언덕에 등산로 표시가 되어 있다. 바위절벽에 여러 개의 로프가 걸려 있는 유격훈련장아래에 도착하면 좌측 계곡쪽으로 세줄타기 두줄타기등 유격훈련코스가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등산로가 있으며 우측 유격훈련장쪽으로 올라가는 길도 있다. 우측으로 유격훈련장쪽으로 오른 후 중간지점에 있는 로프를 잡고 올라선 후 우측으로 있는 안전로프가 쳐져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옹성바위에 오르게 된다. 옹성바위에 오르면 산 아래 펼쳐지는 조망이 좋고 멀리 모후산과 백아산 까지도 보인다.
옹성산 정상 17:00 ~17:06
옹성바위에서 좌측으로 가면 5분후 이정표가 있는 임도에 닿는다. 이곳은 제2주차장에서 올라온 길과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2.4km, 옹암바위 0.5km, 제2주차장 0.9km다. 옹암바위를 거쳐 제1주차장까지는 1.5km 정도 되겠다. 이곳에서 임도를 따라 가다 다시 등산로로 오르게 된다. 옹암삼거리에서 7분여를 오르면 옛날에 할머니집이 있는 터에 지은 나무판자집이 나온다. 판자집 앞 수돗물이 시원히 잘나온다. 여기서 다시 오르면 커다란 조릿대 숲이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는 커다란 감나무도 있다. 위쪽으로 감이 많이 열려 있어 잠시 올라가 감 딴다고 10여분을 소비하였다. 감은 작은 감으로 아직도 떫은 맛이 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가면 정상가는 길이고, 우측으로 쌍문 바위로 가는 길이나 시간관계로 그냥 정상으로 향한다. 삼거리에 조금을 돌아가면 커다란 바위가 나온다. 이 바위아래에 물이 고인 곳이 있다. 물을 깨끗해 보이지는 않지만 더럽지도 않다. 이곳이 백련암터로 보인다. 여기서 좌측으로 돌아가면 백련암 삼거리 이정표가 있다. 정상 0.4km가 적혀 있다. 백련암 삼거리에서 오르는 곳이 가파르다. 삼거리에서 10분을 오르면 헬기장이 있는 정상으로 정상석과 삼각점이 있다.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 이제 서서히 지는 해가 빛을 잃어가고 산 아래 저수지와 옹성산밑 적벽을 관람하는 장소인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가 있는 곳은 허가를 받지 않고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다.
철옹산성 17:25
옹성산에서 해넘이를 구경하고 내려오면 이정표가 있는 곳을 지나 동복호가 잘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한번 마지막 지는 해를 보내고 등산로를 따라가면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잠시 후 내리막 길을 가면 감나무가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돌아 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가 있는 안부에서 오르면 철옹산성(옹성산성)이다. 성은 크지 않으며 조망은 아주 좋은 지점이다. 지나온 할머니 집쪽과 반대편으로도 잘 보이는 곳이다.
제2주차장 17:58
철옹산성에서 바위지대를 지나면 좌우로 길이 있다. 좌우로 갈리는 앞쪽으로 높다란 바위가 있으며 이지점 등산로에 작은 바위가 하나가 있으며 그 앞쪽으로 작은 구멍이 하나 있는 바위가 있다.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쓰임새가 있었을 것 같은 바위와 작은 구멍이다. 여기서 우측 등산로를 따라 가다 위쪽 봉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나는 올라가고 울마님은 등산로를 따라가다. 삼거리에서 만나서 쌍두봉쪽 안부에서 더 이상은 가지 않고 길게 설치된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 오니 이미 해는 져서 날은 어둡다. 아직 후레쉬를 켤정도는 아니지만 분간이 서서히 가지 않는다. 긴 나무계단을 내려와 안부에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 닿으니 제2주차장이 0.7km 남았다고 적혀 있다. 여기부터 내려오는 등산로는 위쪽 보다 좀 더 넓어 졌으며 제2주차장에 도착을 하니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 이정표의 글씨도 가까이 가야 보일정도가 되었다. 이곳에서 정상 1.2km, 산성 1.2km라 적혀 있으며 등산안내도와 작은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유격장입구 등산로 입구 18:04 ~18:25
제2주차장 부터는 시멘트길로 어두운 밤이라도 걷는데 문제가 없다. 나오면서 옹성바위아래쪽으로 불이 켜진 곳으로 암자가 있는 듯하고, 길옆으로 작은 집이 한 채 있다. 이곳을 지나 옹성바위를 돌아서면 유격장입구 등산로 초입이 있는 제1주차장이다. 제2주차장에서 6분여가 소요되었다.
청주집 21:00
유격장입구 등산로 입구에서 산행을 마치고 짐을 정리하여 출발하여 20여분을 달리면 백아산 앞을 지나 옥과 톨게이트에 닿는다. 여기서 고속도로로 진입을 하여 달리니 오늘따라 차가 없는 관계로 죽암휴게소까지 2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죽암휴게소에서 10분간 휴식을 취한 후 서청주 톨게이트로 빠져 나와 집근처에 도착을 하니 21시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 낙지덮밥으로 저녁식사를 마친 후 돌아 왔다. 이것으로 오늘 새벽녘 일어나 먼 순천의 송광사 화순의 운주사와 옹성산을 거쳐 돌아오는 바쁜 일정을 무사히 마친다.
청주~송광사 ; 3시간 23분 소요
청주 ~송광사 도로비 : 10800원
송광사 및 천자암봉 ~천자암 쌍향수 산행 및 관람 ; 3시간 55분소요
천자암봉 산행거리 : 7.6km (송광사주차장에서 송광사거리 포함 약 10km)
송광사 ~운주사 ; 61km 1시간소요
운주사 관람 및 식사시간 ; 1시간 33분소요
운주사 ~옹성산 : 48.5km 50분소요
옹성산산행시간 ; 2시간 20분소요
옹성산 산행거리 ; 약 6.2km
옹성산입구 ~청주 ; 2시간 35분소요
옥과톨게이트 ~서청주톨게이트 도로비 : 9600원
경비 ; 연료비 13만원
도로비 20400원
아침식대 12000원
입장료 송광사 6000원
운주사 6000원
기타 과자류 : 0000원
총 : 18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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