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가을 여행
1일차 정암사~함백산~만항재~구문소~오죽헌,경포대~휴휴암~화암사
2일차 설악산 흘림골 등선대~갈전약수~구룡령~운두령~이승복기념관
2011.10.16.~17일 일~월요일 흐린후 맑음 바람세참
참석인원 : 6명(마눌, 박순녀 여사님, 박여사, 티나엄니, 티나엄니 조카, 나
1일차
청주 5:10 -증산 설렁탕집 7:35 ~8:10 -정암사 8:35 ~8:52 -함백산 9:12 ~9:17 -만항재 9:30~ 9:35 -구문소 10:13 ~10:50 - 고원관광휴게소 11:15 ~11:20 -강릉 오죽헌,경포대 12:50 ~14:10 -초당순두부집 14:15 ~14:52 -휴휴암 15:27 ~16:07 -화암사 17:17 ~17:50 -속초 덕흥식당 18:10 ~19:20 -숙소 19:40
2일차
숙소출발 7:00 -흘림골입구 7:35 - 용소폭포입구 7:45 -다시 흘림골입구 8:11 -여심폭포 8:30 -등선대 8:50 ~9:00 -등선폭포 9:30 -십이폭포 10:15 -용소폭포삼거리 10:39 -용소폭포 10:45 -용소폭포입구 10:53 -송천떡마을 11:24 ~11:30 -갈전약수 입구 11:45 -갈전약수 12:12 -갈전약수입구 12:34 -구룡령 12:55 ~13:03 -칡소폭포 13:25 ~14:20 (중식) - 운두령 14:52~15:00 -이승복기념관 15:35 ~16:25 -속사톨게이트 16:40 -음성휴게소 18:04 ~18:12 -서청주톨게이트 18:43 -집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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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사 (강원도 정선군 동면)
자장율사가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당나라에 들어가 청량산 운제사에서 기도하다 문수보살을 뵙고 치아, 가사, 폐엽경을 전수 받고 7년만에 귀국할 때 서해용왕이 용궁의 보석인 마노석을 선물하여, 배에 싣고 와 울진포에 당도하여 신통력으로 갈래산에 날라다 아무도 모르게 묻어 두었다가 후일 적멸보궁탑을 만들 때 사용하였고, 물길로 운반하였다 해서 수마노탐이라 하였다. 자장율사는 귀국하여 부처님 사리와 가사 등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등에 나누어 모시고 이곳에 절을 짓고 갈래사라 했으며, 용궁의 보석인 수마노석으로 탑을 세워 진신 사리를 봉안하고 구태민안을 기원하였으며, 불심의 표상으로 삼아 옛부터 스님이나 신도들의 기도 대상으로 전국 굴지의 순례지 인 것이다. 수마노탑은 보물 410호로 지정되었으며, 절 앞 작은 냇물에는 천연기념물 73호인 눈이 빨간 열목어 서식지이다,
만항재
들꽃과 단풍의 오색 향연 만항재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 1330m 고지의 만항재, 태백과 영월, 정선이 만나는 경계에 위치해 있다. 이곳 만항재의 44번 지방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만들어진 포장도로. 몇 년 전 근처 두문동재에 터널이 뚫린 뒤 그 쪽으로 차들이 몰리면서 상대적으로 이 부근은 더없이 한산해졌다. 뻥뻥 뚫린 도로를 시원스레 달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항재에서 화절령까지 20km의 구간을 ‘하늘 아래 첫 길’이라는 의마로 “하늘길”또는 예전에 석탄을 나르던 길이 었다로 해서 ‘운탄길’ 이라고 부르는데, 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운무가 자주 생겨 종종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빼곡한 낙엽송들이 연출하는 노란 단풍은 이 계절에 만항재를 방문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 또 우리나라 최대의 야생화 군락지이기도 하니 쭉 뻗은 고갯길을 따라 가을 들꽃 트레킹을 즐기는 것도 좋겠다.
구문소 (장성 동점동)
구무라는 말은 구멍이란 방언이고, 이 소는 글자 그대로 산에 구멍이 뚫리면서 만들어진 폭포이며 소이다.
【전설】
옛날 경북 안동에 있는 영호루를 건축시 거기 쓸 대들보를 이곳에서 구해 황지천에 띄워 운반도중 홍수가 일어나,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던 싸리나무 대들보가 산을 깨뜨리고 구멍을 뚫으니 그때부터 이곳이 폭포와 소가 되었다로 한다. 또 한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한 어부가 그물을 쳐놓았는데,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한참을 물 속으로 빨려가니 물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정신을 잃어 버렸다. 깨어나니, 넓은 들과 고래등같은 큰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어부생각에도 이곳이 용궁이구나 생각하며 문간에 들어서니, 자기가 잊어버린 그물이 걸려있어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한 노파가 나타나서 여기는 인간 세상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는고 하고 물이니 어부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다. 이 말을 듣고 노파가 하는 말이, 이곳 용구의 왕자가 그물에 걸려 죽을 뻔하여 성이나서 이곳에 걷어 놓았으니, 죽고 싶지 않으면 발리 도망가라 하므로, 갈 길을 모르니 가르쳐 달라고 간곡히 빌었다. 이에 노파가 내 흰 강아지 한 마리를 줄 터이니 따라 가시고, 여기 이 떡은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흰떡을 주었다. 어부는 강아지를 따라 가면서 주변 구경도하고 배고프면 떡도 먹으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물 밖으로 나왔는데, 구문소 앞에 보니 무당굿 소리가 났다. 그 곳에 가보니 어부의 두아들이 아버지가 죽은지 3년이 되었다며 3주기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강아지는 곧 죽어 관에 넣어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으며, 흰 떡은 집에 깊이 깊이 간직하였더니 날이 갈수록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한다.
강릉시
신라 선덕왕 때는 소경, 고구려 때는 하서강, 무열왕 때는 명주라 불렸는데 강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세종때 강릉부라 칭하게 된 후부터라 한다. 1955년 시로 승격되었으며, 1961년 동해 북부선이 개통된 후 본격적으로 발전 오늘에 이른 것이다. 민속 행사로는 강릉 단오제와 율곡제이며, 관광지로는 경포대, 오죽헌, 객사문, 경포대 해수욕장 등이 있으며, 감이 많이 나는 곳이기도 하다.
경포도립공원(강원 강릉시 안현동)
경포도립공원은수려한자연환경과함께많은문화재가산재해있어1982.6.26도립공원으로지정(면적9.471㎢,강원도고시제90호)되었으며경포대를중심으로경포해수욕장,율곡이이의생가인오죽헌,조선시대양반들의생활을엿볼수있는선교장,우암송시열선생이현판을썼다는보물제183호로지정된해운정과그부속건물인방해정,석란정을합쳐지난1982년도립공원으로지정된경포도립공원은여름피서지로서뿐만아니라,사계절관광지로서도전혀손색이없는곳이다.그중에서도강릉시내에서북쪽으로6Km지점에위치하고있는경포호는이름그대로거울처럼맑은수면을지닌호수로연꽃과갈대가있어경치가좋고육수와해수가함께흘러들어와연중낚시꾼들이모이는곳이다.이호수에서는다섯개의달을볼수있다고하는데,밝은달이뜨는밤이면하늘과바다그리고호수에하나씩달이뜨고술잔과님의눈동자에도달이뜬다고노래하는곳이다.경포호가운데에는'홍장암'과'조암'이라는바위섬이있는데이중조암에는우암송시열이썼다는<조암>이라는글씨가아직도남아있다.10월이면율곡제가열리는예향이자,김시습,허균,신사임당을배출한문향이며,고유전통민속인강릉단오제가지금까지전해내려오는이곳은가족간의화목을다지게하며,연인에겐사랑을무르익게하며,벗과의진한우정을이주는넉넉한품을간직한곳이다.이곳의먹거리또한빼놓을수없는데,특히다른지역에서맛볼수없는이곳의초당두부는바닷물을이용해손으로직접만든독특한맛때문에한번맛본사람은누구나다시찾게된다.
호수주변에는자전거도로및산책로,조각공원등이있어바쁜생활속에서지친현대인의휴양과생활의활력소를찾는데더없이좋은장소이며,주변의여러관광지와도연계가잘되어있어대중교통을이용하여항시관광을할수있는국내최고의관광지이다.
경포대
관동팔경 중의 하나이며 고려 충숙왕(1326년)대 인월사 터에 창건한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년) 한급이 지금의 자리에 옮겼으며, 현재의 건물은 조선 고종10년(1873년) 강릉부가 이직현이 중수하였다. 누각에는 제일강산과 경포대란 현판이 붙어 있는데 제일과 강산은 각각 다른 사람이 써서 걸어 놓았다는데, 누가 봐도 제일이라는 글씨를 더 잘 쓴 걸로 알 수 있다. 경포대에서 바라보는 경포호수는 한 폭의 그림 같으며, 달뜨는 밤에 벗과 술잔을 기울면, 달이 다섯 개가 뜬다고 합니다. 하늘에 뜬 달이요, 동해 바다에 뜬 달이요, 경포 호수에 뜬 달이요, 술잔에 뜬 달이요, 벗의 눈동자에 뜬 달이라. 절로 시가 나올것 같다.
【전설】
지금의 경포 호수는, 옛날에는 큰 마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노스님이 이 마을에 와서 집집마다 다니며 시주를 청하여도, 인심이 사나운 마을 사람들은 누구하나 시주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큰 기와집에 들러 시주를 청하였더니, 못된 시어머니가 시주대신 오물을 던졌다. 노승은 아무 말 없이 받아 가지고 나가니,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몰래 쌀을 퍼서 드리며 용서를 비니, 노스님은 며느리에게 지금 곧 나를 따라 오너라. 어떤 소리가 나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하는 찰라 천둥이 치고 억수같이 비가 내려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물에 잠기였다. 이때 며느리 뒤에서 시어머니가 살려 달라고 고함을 치니 마음씨 고운 며느리, 뒤를 돌아보는 순간 돌이 되었으며, 곳간에 쌓아둔 모든 곡식은 조개가 되어, 지금도 경포 호수에는 조개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죽헌 (강릉시 죽헌동)
오죽헌은 우리 나라 어머니의 귀감이 되는 신사임당이 1504년 태어나시고, 도한 조선시대의 위대한 경세가요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 선생이 1536년 태어나신 곳이다. 보물 16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둘레에 조죽이 무성하여 오죽헌이라 부른다. 신사임당은 중종7년(1504년) 진사 신명화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이원수에게 출가하여 4남3녀를 두었으며, 학문과 예술에 뛰어났다. 특히 그의 그림은 풀, 벌레등을 잘 그렸는데, 장마에 그림이 누기가 차서밖에 말리려 내어놓았는데, 그의 벌레 그림을 보고 진짜 벌레인줄 알고 닭들이 쫗았다 한다.
율곡 이이
조선 중종31년(1536년)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나셨으며, 13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하였고, 호조,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하시어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당파 싸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학에 있어서는 퇴계 이황 선생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선조 17년(1584년)49세로 별세하시어 파주군에 있는 묘소에 안장되었다.
【전설】
하루는 신사임당이 율곡을 안고 마당에 있을 때,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며 이 아기는 큰 인물이 될 상인데 세 살 때 호환의 액이 있으니 애석하구나 하는 것이었다 신사임당은 스님께 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간청한즉, 스님은 집 뒤에 밤나무 백 그루를 심으시오 하고는 가 버렸다. 과연 율곡 선생이 세 살때, 한 중이 와서 큰 호랑이로 변하여 아기를 데려 가겠다고 하니. 사임당은 대경실색하여 꾸짖되 무슨 소리냐 밤나무 백 그루가 있는데 하였다. 호랑이와 같이 밤나무를 세어보니, 아흔 아홉 그루밖에 없었다. 한 그루는 말라죽은 것이었다. 이에 호랑이는 아기를 또 내어놓으라고 성화인데, 그대 마침 나무 한그루가 나서며 나도 밤나무다 라고 외치며 백 그루를 채우는 것이었다. 호랑이는 할 수 없이 중으로 둔갑하여 도망하고 말았다. 나도 밤나무다 나무는 밤은 안 열리지만 밤나무와 똑같이 생긴 나무로 오죽헌 뒷산 일대에 많이 있는 나무라 한다.
휴휴암
적멸보궁인 정안사등 13개의 사찰주지를 역임한 휴휴암 주지 홍법스님.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광진리 1번지에 자리잡은 대한불교 조계종 휴휴암. 동해 앞바다에 위치한 휴휴암은 사계절이 일품이다.
가을에는 달이 좋고, 봄에는 백화가 만발하니 더욱좋다. 여름에는 선들바람이 좋고, 겨울에는 눈이 좋다.
몸도 쉬고 마음도 쉬고 팔만사천의 번뇌 망상을 모두 놓고 쉬고 쉰다는 휴휴암. 이곳은 동해바다 위에 관세음 보살님이 쉬고 계신곳이다.
본시 관세음보살님은 보타락가산에 항상 계신다고 했으나 휴휴암 앞 바다에 그 몸을 나투시어 전국에서 많은 불자들이 매일같이 참배와 철야기도를 드리려고 찾아오고 있다.
관세음보살이 동해바다에 오신 것은 기도정진으로 불국정토를 이루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 온지 1600여년이 되었으나 이러한 부처님 현신은 지극히 보기드문 일이라고 한다. 부처님이나 보살님을 친견하셨다는 모든 분들은 거의가 비몽사몽간이나 기도중이라도 자기혼자서 친견하고 혼자만이 알수 있었을 것이다 .
그러나 휴휴암 앞 바다에 계시는 관세음보살님은 혼자만이 볼 수 있는 성상이 아니다. 한사람 아니 열사람 혹은 100명 이거나 행사때 맞추어 참석한 만 명이 넘는 불자들이 와도 다 같이ㅐ 친견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언제 어느 때 다시 오도라도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할 수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관음성상인 것이다. 휴휴암 주지 홍법스님은 13개 사찰 주지의 소임을 역임한 스님이며 여러 사찰주지를 역임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나 자장율사 무학스님 같은 큰스님들이 창건해 놓은 사찰 주지를 역임하면서 중창불사만 할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를 잡아 절을 짓고 원하는 부처님을 조성하여 절을 창건하고 싶은 간절한 서원으로 오늘의 휴휴암을 창건한 것이다.
스님은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승사,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주지를 역임할 때 부처님의 사시공양을 등에 지고 다니면서 공양을 올리고 기도드렸다고 한다,
특히 스님은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30여년째 주력정진하고 있다. 바다 위에 관세음보살님이 오신 것도 이러한 주력의 힘이 아닐까 싶다.
주지스님이 들려준 ‘묘적전’에 관한 이야기는 이야기가 아닌 신통력 그 자체인 것이다. “휴휴암의 ’묘적전‘법당을 짓고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을 모실 때의 일이였지요. 우연하게도 한 신도가 불상조성에 필요한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며 시주를 하였지요,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부처님 복장에 그 분의 이름을 적어 넣어 드렸지요.” 그렇게 하여 오랜 기간동안에 조성된 불상이 법당에 올라가시던 날이었다.
그런데 이날 오후 산돼지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시주하신 보살님이 운영하는 강릉관광호텔에 들어와서 로비를 돌고 한식당ᄁᆞ지 올라와서 돌고는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데 호텔 안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돼지를 본 사람이 없었다.
그 호텔까지 가려면 많은 신호들과 사거리 오거리를 지나야 하고 상가와 시장이 있어 많은 시민들도 보았어야 했다.
번화가인 시내는 수많은 차량들이 다녔는데 그렇게 많은 차를 운행하던 사람들 그 중에서 단 한사람도 돼지를 본 일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묘한 일은 비단 이것뿐이 아니었다고 한다.
‘묘적전’법당 단청불사를 끝내고 법당마루를 기계대패로 미세하게 가는 과정에서 채 5분도 안 되어 그 많은 먼지들이 마치 오래된 방앗간에 먼지가 눌러 붙은 형상이 되어 단청 색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그 때의 상황을 설명했다. 목수 두 사람이 아침부터 저녁공약시간ᄁᆞ지 갈아낸 먼지는 너무 많아서 치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천정은 높고 문은 낮은 법당의 조건으로써는 기계로 몬지를 불어도 떨러졌다 다시 올라붙는 형편이이서 다리를 뻗고 탄식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일모래 부처님 점안식을 위해 많은 스님들을 초청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불자들이 운집한 가운데 행사를 거행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을 새워 법당을 청소하였는데도... 그러다 지쳐서 주지스님은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꿈속에 노스님과 젊은 스님들이 비구. 비구니들과 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 몰려와서 휴휴암 앞 바다에 목욕하고 빨래를 하고 있나 이상도 하다 생각하면서 스님은 꿈에서 깨어났고,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차믕로 기이한 꿈도 다 있다 하면서 법당을 살펴보니 그 많은 먼지들이 온데간데 없더라는 것이다.
“사실 이 먼지를 없애려면 백날을 털어도 안 될 정도였고 걸레로 닦거나 물청소를 해야 되는데 그럴 수도 없고 내일 모레 행사를 못 치르게 될 것만 같아서 걱정이 태산 같았지요” 라고 하시며 웃으시는 그 이면에 그 떄의 고뇌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먼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보니 꿈을 꾸고 있는 느낌도 들면서 생각해 보니 법당이름을 ‘묘적전’이라고 지어놓고 기원하였더니 그원을 들어 주셨구나 싶어 환희심이 일었다고 했다.
‘묘적전’은 그 뜻이 묘한 인연으로 무엇이던지 묘하게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뜻이고 ‘묘적전’ 법당안에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님을 모셔놓고 일심전력으로 기도를 하였으니 천의 몸을 나투신 관세음보살님이 수많은 사람으로 헌신하여 목욕하고 빨래 한 것이 법당을 청소한 것이라고 믿고 오래오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스님은 전설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 주변에 늘 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밝혔다.
휴휴암은 모든 것을 관세으몹살님으로 시작하여 관음재일 관음정근으로 이어간다.
특히 스님께서는 관세음보살님이 좋아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독송을 백만독이나 하셨다고...
스님은 “돌아오는 음력 9월 24일 관음재일(양력 10월 19일) 신묘장구대다라니 백만독 주력기도정진 입재”라고 하시며 “많은 불자들이 이 기도에 함께하시어 원을 성취하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화암사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화암사신라 혜공왕(서기 769년)때 창건된 사찰로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화암사는, 창건 이후 5차례의 화재로 설법전 1동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1991년 제17회 세계잼버리 이 후 널리 알려지면서 사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수바위가 눈앞에 보이고, 신선봉과 잼버리장, 설악산 울산바위, 콘도미니엄 등이 주변에 밀집되어 있어 돌아볼 곳이 많다. 또한, 사찰내에 전통찻집이 있어 조용한 산사에서 전통차를 즐기는 것도 좋은 듯 하다. 전통사찰 제27호. 설법전 1동 문화재자료 제114호 화암사가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는 것은 화암사가 금강산의 남쪽 줄기에 닿고 있기 때문이다. 남쪽에서 보면 화암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신선봉 바로 아래에 세워져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화암사의 기록을 전하는 사적기에도 화암사는 어김없이 '금강산 화암사'로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화암사는 우리민족의 통일기도 도량이다. 화암사가 창건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천 2백여년 전인 769년(신라 혜공왕 5), 우리나라에 참회 불교를 정착시킨 법상종의 개조 진표율사에 의해서 이다. 진표율사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는 장안사를, 그리고 남쪽에 화암사를 창건해 금강산을 중심으로 불국토를 장엄하고자 했다. '금강산 화암사' 라는 명칭도 이 창건기록에서부터 출발한다.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화엄경'을 설했는데, 이를 배운 제자 1백명중 31명이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가고 나머지 69명도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얻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때 사찰 이름은 화엄사(華嚴寺)였다. 진표율사가 '화엄경'을 설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또한 진표율사는 이곳에서 지장보살의 현신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 화엄사의 부속암자로 삼았다. 이때 이후 화암사는 지장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지장보살의 가피를 원하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화엄사(華嚴寺)라는 절 이름이 공식적으로 화암사(禾巖寺)로 바뀐 때는 1912년 3월 1일본산 체제로 접어들면서이다. 건봉사의 말사가 되면서 이전부터 사용되어온 화암사란 명칭을 공식으로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절 이름이 화암사로 바뀌게 된 것과 관련된 전설도 전해진다. 화암사 남쪽 3백미터 지점에 우뚝 솟은 왕관모양의 바위는 모양이 워낙 빼어나 빼어날 수(秀)자를 써서 수암(秀巖)이라 불린다. 진표율사를 비롯한 역대 고승들이 이 바위 위에서 좌선수도 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스님, 신도들이 찾는 기도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스님들이 시주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이 절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동시에 나타났다. 백발노인은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알려주면서 끼니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번을 흔들라고 했더니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년 후 한 객승이 이 이야기를 듣고 욕심을 내어 쌀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수없이 흔드는 바람에 쌀보시는 끊어졌다. 화암사가 벼 화(禾)자에 바위 암(巖)자를 쓰게 된 것도 이 전설에 연유한다는 이야기이다. 수바위는 아들을 점지 해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신혼부부들의 중요한 참배 처이기도 하다.화암사는 진표율사 이래로 여러번 중창을 거듭하였다. 특히 1794년(정조 18년)에 이루어진 중창은 화암사의 사격을 증명해 주는 큰 불사였다. 이 불사는 도한스님의 기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도한 스님은 이때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3 . 7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까지 이르렀다고 한다.이에 정조임금은 제조 상궁 최씨를 이절에 파견하여 도한 스님을 궁궐로 데려오도록 하였다. 스님으로부터 경위를 들은 정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암사를 가순궁(嘉順宮)의 원당으로 삼고 요사채를 크게 지어주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미타암의 화응전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병풍 8폭 등을 하사하고 사방금표를 정해 주었다. 이처럼 화암사는 한때 왕의 원당으로 지정될 만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거듭된 화마와 수마, 그리고 6.25 동란으로 사찰은 파손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되어 오다가 90년대 들어서 오늘날의 규모로 중창이 되었다. 현재는 대웅전, 명부전, 인법당, 금강루, 일주문, 미타암, 요사채, 선원, 비림(부도군) 등을 두루 갖추어 대찰로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신평벌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큰 일주문 옆에는 춘담대법사탑을 비롯, 화곡, 영담, 원봉, 청암스님 등의 부도 15기가 모셔져 있고 한참을 걸어 닿은 금강교는 세개의 홍예가 떠받히며 수려한 화암사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설악산국립공원외설악지구(강원 속초시 설악동)
설악산국립공원은한라산,지리산에이어남한에서3번째로높은산(대청봉)을중심으로속초시,인제군,고성군,양양군등4개시군에걸처자리잡고있는354.6㎢의면적으로설악산이란이름에대하여삼국사기에는"설산:눈설,뫼산""설화산:눈설,꽃필화또는빛날화,뫼산"으로기록되었고,양양군지에는"한계산:찰한,강과계곡을뜻하는시내계,뫼산"설악은내설악과외설악,남설악으로구분되는데태백산맥주능선을경계로동쪽을외설악,서쪽을내설악이라하며남쪽을남설악이라한다
설악산 (강원도 속초시)
설악산은 우리 나라에서 세 번째 높은 산으로서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에 이어 해발 1,708m로 세 번째로 높으며 명산이다. 1970년 3월 24일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외설악, 내설악, 남설악으로 나눈다.
삼국사기에는 설악을 설화산 또는 설산이라 적고, 동국여지승람에는한가위에 눈이 오면 다음해 하지에 눈이 녹아 설 악이라 적었으며, 다른 기록에는 봉우리마다의 바위가 눈같이 희어서 설악이라 불렀다 한다.
산은 세 가지로 나눈다는데,
첫째, 육산 : 흑으로 이루어져 나무가 무성하다. 대표적인 산은 백두산.
둘째, 골산 :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경색이 수려하다. 대표적인 산은 금강산.
셋째, 웅산 : 연봉이 면면하여 산세가 웅장하다. 대표적인 산은 지리산.
설악산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섞어, 골짜기마다 폭포와 기암괴석이며 반달곰을 비롯하여 531종의 동물과 희귀식물인 에델바이스 및 758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조선 선조 임금때 명재상이었던 송강 정철은, 설악산이 명산이라 역절이 난다하여, 임금의 명을 받고 설악산의 혈을 찌르러 왔다가 갑자기 벼락과 천둥이 일어나니 혈을 찌르지 못하고 돌아가며 설악이 아니라 벼락이요, 구경이 아니라 고경이며, 봉은이 아니라 난은이라고 중얼거리며 과연 설악은 명산
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가라피계곡(오색계곡)(강원 양양군 서면 오색리)
양양에서홍천쪽으로약10분정도가다가44번국도와56번국도갈림길에서우측고개를넘으면바로넓게펼쳐지는계곡이나오는데고개아래다리입구에서좌측으로보이는마을에있는계곡으로깊은골짜기만큼빼어난경관을자랑하는계곡하천이다
울산 바위
이 암산은 일명 천후산이라고 한다. 둘레가 10리나 되며 높이는 950m, 계조암에서 808계단을 올라가면 설악산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며 동해의 파란 바다가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전설】
유달리 금강산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산신령은 봉우리를 1만2천 봉으로 하고 그 형체를 가지각색으로 하려고 전국의 각 산에다가 큰 바위를 모조리 금강산으로 보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이때 경상도 울산 땅에, 이 고을에서는 내가 최고 큰 바위라고 뽐내는 울산바위가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이웃 친구 바위들에게 금강산에 최고 봉우리가 되겠다며 자랑을 늘어놓고 길을 떠났다. 남에게 뒤질세라 부지런히 걸었지만, 워낙 큰 덩치라 걸으니 더디었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북으로, 북으로 걸었다. 어느새 날이 저물어 기진 맥진한 울산바위는 지금의 울산바위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자 다시 출발하려 하는데 금강산은 어제 밤으로 1만 2천 봉우리가 다 차버렸다는 전갈이 왔다. 고향에서 친구들에게 자랑만 하고 온 울산바위는 고향으로 갈 수도 없고 하여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그 자리에 눌러 앉으니 오늘날 울산임이 서 있는 자리다. 그 후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조선조 숭유 억불 시절 한 원님이 울산에 부임하였다. 설악산에 울산암을 빼앗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보복의 일환으로 설악산 스님들을 골탕먹이자는 계획을 꾸몄다. 지금이나 그 때나 외설악 일대는 신흥사의 땅이었다. 어느 해질 무렵 울산원님의 교자가 신흥사 앞뜰에 놓여졌다. 그는 대뜸 소리쳤다. 이 방자한 중놈들아. 우리 바위가 너희 설악산에 버젓이 있으니 올해부터는 바위 세를 꼭꼭 내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을 대는 폐찰을 면치 못하리라. 이후부터 신흥사는 매년 가을 해괴한 바위 세를 울산에 바쳤다. 이로부터 신흥사는 바위세 때문에 날로 기울어져 갔으며, 주지승의 얼굴은 날로 여위어 갔다. 그것을 본 한 동자승이 그 연유를 물었더니 스님은 네가 알 일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소승이 알면 안되나요? 혹시 대책이 강구될 지 모르니 말씀해 주세요, 주지승은 귀찮아하면서도 동자승에게 그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동자승은 뭘 그까짓거 가지고.......하면서, 울산 원님이 바위 세를 받으러 오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울산원님이 바위 세를 받으러 행차하였다. 동자승은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러잖아도 저 바위를 가져가라고 전하려고 갈 참이었습니다. 저 바위 터에 내년부터는 곡식을 심어 절 식량을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깜짝 놀란 원님은 동자승의 계략에 질 수는 없었다. "좋다. 그러면 파갈 터이니 그 바위를 파 가게끔 새기를 태운 재로 묶어 놓아라." "좋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꼭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울산 원님이 떠난 후 동자승은 마을 청년들을 시켜 새끼를 꼬게 하고 그 새끼를 동해 바다 소금물에 절였다.
그런 다음 그 위에다 그름을 부었다. 이렇게 소금에 그름을 덮어씌운 새기로 울산 바위를 묶고는 그 위에 불을 질렀다. 새끼는 기름에 불이 붙어 훨훨 타 새까만 재와 같이 되었으나, 소금에 절은 속만은 튼튼했다. 다시 신흥사에 온 원님은 동자승의 기지에 의한 새끼줄을 보고 탄식했다. "네놈이 세월을 잘못 타고 나와 중놈 된 것이니 아깝구나" 하면서 울산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입니다.
오색약수(양양군 서면 오색리)
이 약수는 약 500년 전 어떤 승려가 반석 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발견, 마셔 보고 약수로 판매되었고, 다섯 가지 맛이 난다고 하여 오색약수라 불렀다 하기도 하고, 약수터 부근 성국사라는 절에 한 나무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판다 하여 오색약수라 불렀다 한다.
수질은 탄산수이며 철분이 많아 위장병과 신경통, 빈혈에 특효하며 기생충 구제에도 좋다고 한다.
내설악과 남설악
설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외설악은 크게 알려진 흔들바위, 울산바위, 권금성, 신흥사가 있는 북쪽이며, 내설악은 대승폭고, 한계령 등이 있는 곳을 말하며, 남설악은 오색약수, 주전골, 오색골, 칠형제봉이 있는 남쪽을 말한다.
오색온천
일제 때는 고려온천이라 불렸고, 일제 때 온천을 개발한다고 폭약을 터트려 잡수가 섞여 수온이 24℃밖에 안 된다. 유황성분이기 때문에 피부병에 효력이있다.
한계령
조선시대에는 오솔길로 도둑 떼가 들끓어 해가 지면 넘지 말라는 금표를 양양군 서면 오가리에 세워 둘 정도로 험했던 이 도로는 , 옛 고사에는 오색령이라 불렸고, 1966년 착공 1971년 12월 완공 6년간에 걸쳐 육군 제1102야전공병단 장병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을 1979년 9월 20일부터 1980년 12월30일까지 롯데와 평화건설에서 확장 포장하여 오늘날 이렇게 좋은 도로가 되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해발970m로서 인제군과 양양군의 경계가 되겠고, 대륙성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합쳐져 평지의 기온보다 7℃나 낮다고 하며 108계단을 올라 설악루에 오르면 멀리 동해 바다와 기암괴석, 산허리를 감싼 안개 등이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하며, 이 도로를 만들다 희생된 7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비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구룡령
구룡령 옛길(4.4km).구룡령은 강원도 홍천과 양양 사이에 있는 높은 고개(해발 1,013m)입니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으로, 아홉 마리 용이 구비구비 휘저으며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굽이친다고 하여 구룡령(九龍嶺)이라 부른다.
지금은 포장도로여서 자동차로 단숨에 넘지만, 옛날엔 이 고개를 걸어서 넘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옆 숲속의 구룡령 옛길입니다. 산세가 험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보다 길이 완만하여 동해안 사람들이 한양을 오갈 때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다고 합니다. 등짐장수들이 영동의 해산물과 영서의 농산물을 부지런히 져 나르던 길이기도 합니다.이 길은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현지 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살아난 길입니다. <구룡령 옛길>은 문화재청이 명승 제29호로 지정한 <문화재길>이기도 합니다. 구룡령 옛길을 포함해 문경새재, 문경의 토끼비리, 죽령 옛길 등이 우리나라 4대 명승길로 등재돼 있습니다.구룡령 옛길의 단풍길은 화려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옛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오롯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가을의 단맛을 더해줍니다.옛길은 신비한 원시림 속을 용이 굽이치듯 고불고불 흐르며, 길의 중간중간에 위치를 표시하던 횟돌반쟁이, 묘반쟁이, 솔반쟁이 등이 자리하여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줄 뿐 아니라 옛 이야기까지 전하고 있어 옛길 걷기의 향기가 가득합니다.구룡령 옛길은 56번 국도 구룡령 고갯마루가 들머리입니다.구룡령에서 백두대간에 올라 약 40분쯤 부드러운 능선을 타면(1.2km) <구룡령 옛길 정상 사거리>(1,089m)와 만납니다. 산길로서는 꽤 넓은 공간으로 옛날 고개를 넘던 사람들의 '쉼터'였습니다. 여기서 직진하면 백두대간길로 갈전곡봉에 이르고, 좌측으로 내려가면 홍천군 내면 명개리에 닿으며, 우리는 우측으로 방향을 잡아 양양쪽으로 계속 내려갑니다. 본격적인 구룡령 옛길에 접어듭니다.옛길은 구절양장으로 흘러가지만 쌓인 낙엽이 너무도 폭신해서 오랜만에 원시림 속을 걷는 맛을 만끽하게 합니다. 사방은 온통 가을색으로 완연한데 주변에선 새소리,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에 낙엽 밟는 소리만이 귀를 간지럽게 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험준했을 이 길은 이렇게 옛 사람들의 무수한 사연이 담긴 발걸음으로 인해 순해졌다."약 40분쯤 걸어 내려가면 <횟돌반쟁이>와 만납니다.횟돌은 자연석으로 양양 지역 장례 풍속에서 하관시 횟가루로 땅을 다질 때 갈아서 썼습니다. 이는 양양 지역의 독특한 매장 문화로서, 나무뿌리가 목관을 파고드는 걸 예방하는 지혜였습니다. 행인들이 쉬어가던 이곳에서 횟돌이 나왔다 하여 <횟돌반쟁이>라 불렀다 합니다. '반쟁이'는 반정(半程)에서 유래된 말로 두 지점의 '중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다시 20분쯤 가면 이번엔 <솔반쟁이>입니다.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곳의 울창한 숲은 양양의 자랑거리이며 구룡령의 금강소나무는 특히 유명하여 경복궁 복원에 사용된 바 있고 송이를 비롯해 산림자원이 풍부하다 합니다.이어서 <묘반쟁이>입니다.조선시대 양양과 홍천의 수령이 각각 출발하여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양양의 한 청년이 수령을 업고 빠르게 달려 홍천군 내면 명개리에서 만나자 그곳을 경계로 정했답니다. 그러나 청년은 돌아오는 길에 지쳐서 죽었으므로 그 공적을 기려 묘를 만들었다 하여 <묘반쟁이>라 전하며, 당시의 묘는 옛길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구룡령 옛길이 끝나갈 무렵, 옛길은 우리를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수백년 된 금강소나무들이 도열하여 우리를 환송하는 장면은 가히 장관(壯觀)입니다. 그저 탄성(歎聲)을 남길 뿐입니다.구룡령 옛길을 빠져나와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 닿으면 대략 12시 30분.우리는 <갈천약수가든>에서 오리요리에 막걸리를 곁들여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 버스로 약 10분 이동하여 미천골에 닿습니다.미천골 입구에서 미천골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선림원지(禪林院址)까지 왕복 4km를 산보 삼아 걷습니다. 미천골 계곡은 약 7km에 달하며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가 만들어내는 수려한 계곡미는 전국적으로 유명합니다.선림원지는 신라시대의 아름다운 옛 절터로, 양양 진전사지와 더불어 한국 선종(禪宗)의 개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폐사지로 꼽힙니다. 선림원은 804년(애장왕5년) 무렵 순응(順應)법사가 세운 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순응법사는 802년 해인사를 세웠는데, 이로써 선림원이 신라 불교 최대 종파였던 화엄종에서 세운 사찰임을 알 수 있습니다.선림원은 이후 9세기 중엽 홍각선사에 의해 대대적으로 중수되었는데, 홍각선사는 선종임으로 선림원이 이때 선종 사찰로 전향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85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은 900년 전후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절터가 완전히 매몰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도비와 석등, 삼층석탑 등은 1965년에 복원한 것입니다.문화재로는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444호), 선림원지 석등(보물445호),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보물446호), 선림원지 부도(보물447호)가 있으며, 이밖에 80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금은동불입상과 금동풍탁, 납석제소탑, 귀면와, 암막새 기와, 수막새 기와 등이 출토되었습니다.특히 이 절에 있었던 신라 범종은 양식이 독특하여 한국 범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였으나 6·25전쟁 때 불에 타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선림원지는 1982년 강원도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미천골의 미천(米川)이란 이름도 선림원의 공양미를 씻은 물이 온 계곡을 뿌옇게 물들였을 정도라 하여 붙여졌다 합니다. <자료 출처 : 양양군, 홍천군, 문화재청, 네이버백과사전, 강원도 걷기여행, 대한민국 걷기여행111 등>
운두령
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해발 1,089m이다.
계방산(桂芳山) 자락에 있는 고개로 강원도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용평면의 경계에 위치한다. 해발 1,089m로 남한에서 자동차로 넘나드는 고개 중 만항재(해발 1,330m) 다음으로 높다. 항상 운무(雲霧 )가 넘나든다는 뜻에서 ‘운두령(雲頭嶺)’이란 지명이 유래하였다. 계방산을 오르는 기점의 하나로, 해발고도가 높아 운두령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계방산을 쉽게 오를 수 있다. 31번국도가 지나며, 이승복 기념관을 지나 노동계곡 입구부터 홍천 방면으로 경사와 굴곡이 심한 운두령 고개가 시작된다. 정상에는 평창군에서 마련한 쉼터가 있으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홍청군 내면과 서쪽으로 회령봉(會靈峰)을 조망할 수 있다.
이승복기념관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327-1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에 있다. 1968년 10월30일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하여 우리군과 싸우다가 잔당 5명이 우리 군과 경찰 예비군을 피해 북쪽으로 피해 도망가다가 산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에 위치한 이승복군의 집에 침투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그들의 뜻에 동조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순간에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그러나 이승복군의 형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공비의 만행을 이웃에게 알렸다. 이에 이승복 소년의 넋을 위로하고 반공 정신을 알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승복 어린이가 희생된 뒤 1975년 대관령에 '이승복 반공관'을 설립하여 운영하다가, 1982년에 이승복 군이 다니던 속사초등학교 계방분교 자리로 이전하면서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기념관 내에는 이승복 군과 가족의 묘소가 있다. 기념관의 이승복 동상 앞 광장에서는 매년 10월 셋째주 목요일에 지역 주요 인사, 재향군인회원, 학생 등이 참여하는 공식행사인 <이승복 추모식>이 열리고, 12월 9일 묘소 앞에서는 유족 중심의 추모제가 열린다. 이승복 군 일대기 영화 상영 및 일반 자료를 전시하는 본관, 이승복 군이 다녔던 학교 전시관, 그리고 강원도 교육 홍보관, 자연학습 전시관, 민속 자료관, 야생화 단지, 탱크와 전투기를 비롯한 군용장비 전시장 등으로 구성된 종합기념관이다. 이승복 군이 살았던 집도 복원, 전시하고 있다. 본관 전시실에는 이승복의 생애를 기록한 그림과 유품, 노획한 북한 무장공비 장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통일의 메아리 전시장에는 이승복 추모 문예 공모전에 입상된 학생들이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승복 관련 출판 간행물 등도 있다. 기념관에서 상영하는 이승복 기록영화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에서 이승복 가족이 참변을 당하기까지의 내용을 영화화한 것이다. 야외에 마련된 군용장비 전시장에는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전차(M4A3 셔먼) 2대, 90㎜ 대공포 1대 , 정찰기 1대, 헬기 1대, 전마선, 제공기(F5B) 1대, 상륙용장갑차(LVTP7) 1대, 함포 3문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학습 전시관에서는 강원도 계방산 일대에서 자라는 야생화 70여 종, 어류와 암석 표본 등을 볼 수 있다. 이승복 기념관은 2004년 이승복 장학목장 매각대금과 기부금, 기금 운용 수익금 등으로 이승복 장학회를 창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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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발 5:10
한달전부터 경북에 있는 울릉도와 독도를 예약해 놓구 갈날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몰아친 비바람으로 인해 가기 전날 오후 1시경 출항이 취소되었다는 통보를 받고는 어찌 할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이왕지사 휴가도 내고 한 것이니 전라도 송광사 운주사를 들러 오려 했으나 울마님 이왕이면 하룻밤 자고 오자고 하니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하여 낙산에 있는 수련원을 조회 하여 보니 방이 몇 개 남아 있어 예약을 하고는 갈 곳을 대충 짜 본다.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기에 광광지가 겹치는 곳도 있고 시간도 잘 짜여진 것인지 모르겠다. 가면서 보충을 해가며 가기로 하고 아침 5시 출발예정으로 준비를 하였으나 10분이 늦은 5시 10분집을 나선다. 같이 가기로 한 4분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어 금시 강원도로 출발
증산 설렁탕집 7:35 ~8:10
국도를 타고 제천 쪽으로 달리니 부지런한 님들이 벌써부터 많이 움직이고 있다. 주덕을 지나 충주를 우회 하여 보조댐 쪽으로 해서 제천으로 가는 길을 따라 박달재를 넘고 제천을 지나 영월을 지나니 2시간이 소요 되었고 서서히 정선으로 접어들어 마차령을 넘어 증산에 이르러 설렁탕집에 들어가 아침식사를 한다. 이곳에는 민둥산 억새축제 기간으로 일찍이와 아침식사를 하는 몇 팀이 있다.
정암사 8:35 ~8:52
식사가 끝나고 25분을 달리니 고한 함백산아래에 있는 정암사에 도착을 한다. 정암사 입구에서부터 곱게 물든 단풍이 깊어 가는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한다. 정암사 입구 다리 아래쪽 계곡과 주차장 위쪽 산기슭에도 정암사 절 뒤편으로도 단풍은 곱게 물들었다. 정암사의 이모저모를 둘러 본 후 수마노탑에 올라 내려다보는 경치도 좋다.
함백산 9:12 ~9:17
정암사를 둘러 본 후 만항재로 향한다. 만항재로 오르는 함백산 기슭에도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이윽고 만항재와 태백선수촌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함백산 쪽으로 향하니 서서히 구름속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는 주위에 보이는 것이 없다. 함백산 등산로 입구 앞쪽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차를 몰고 오르니 점점 가파라지며 안개속을 오르자니 쉽지는 않다. 가끔씩 내려오는 차량과 마주칠 때는 도로가 좁아 간신히 피해서 오른다. 헬기장 옆을 지나 송신소 앞 조금 너른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개설한지 얼마 안 되는 함백산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오르니 2~3분후 새로 새운 함백산 정상석이 있다. 둥그런 형태로 되어 있으며 함백산에 대한 내력이 적혀 있다. 끝으로 대량의 석탄이 묻혀 있다 해서 “ 불의 나라”,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이 있어 “ 물의 나라”, 야생화의 천국이라 하여 “천상의 화원”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봄에 함백산에서 영월 계족산까지 2회에 걸쳐서 종주를 할적에 올라 왔을적 보았던 빛깔 좋은 철쭉 생각이 난다. 참으로 좋았었는데 ~~ 주위의 경치 또한 너무 좋아 한동안 이곳에서 머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늘은 함백산 정상부에 짙은 구름대가 덮여 있고 내가 서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최 정상부에 있는 정상석을 간신히 찍고는 몇 초 만에 내려왔다. 차량에서 5분이면 함백산 정상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함백산 임도는 최정상부 까지 놓여 있다. 정상 바로 밑으로 여러개의 송신탑들이 있으나 오늘은 전혀 볼 수가 없다.
구문소 10:13 ~10:50
함백산에서 임도를 따라 내려오자니 올라갈 때 보다 더 어렵다. 살살 속도를 줄려 가며 내려와 만항재에 이르니 몇몇 사람들이 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산을 오르는 사람들 이곳에서 잠시 머물러 쉬고 있다. 만항재는 해발 1330m로 우리나라에서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이다. 아직은 낙엽송잎이 노란색으로 변하지 않아 좋은 경치는 아니지만 구름속에 보는 만항재의 솟대와 쓸쓸해져가는 모습들이 아쉽기만 하다. 이곳에서 우측능선 쪽으로 난 하늘길을 따라 화절령까지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능선을 따라 백운산까지 가느라 고생한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만항재에서 내려서면 영월상동으로 내려가는 삼거리에 장산등산안내도가 보인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산속에 이쁘게 지은 집들이 보인다. 이곳이 만항재 아래 장산콘도다. 이곳에서 꼬불꼬불 도로를 따라 내려가는 길가에도 곱게 물든 단풍이 반긴다. 이윽고 태백과 영월이 갈리는 화방재에서 좌측으로 가면 태백산을 오르는 유일사매표소를 지나고 태백과 동점이 갈리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동점으로 가기 전 작은 터널이 있는 옆으로 구문소가 나온다. 구문소에는 이런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구문소에 구멍이 뚫리기 전에 석벽을 두고 동쪽에는 철암천이 큰소를 이루고 청룡이 살고, 서쪽에는 황지천이 큰소를 이루고 백룡이 살았다. 두용은 낙동강의 지배권을 놓고 항상 서로 다투었다. 매일 석벽꼭대기에서 싸움을 하였는데 항상 뇌성이 일고 안개가 자욱하니 끼어 천지를 분간 못하였고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어느날 백룡이 꾀를 내어 석벽을 뚫고 공격을 하여 청룡을 물리 치고 그 여세로 승천하였다고 한다. 백룡이 지나간 산을 용우이산이라고 하는데 구문소앞에 높이 솟은 산이다. ”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석벽에 구멍이 뚫려 물이 흐르다니 저 굴이 아니 었으면 태백쪽으로 커다란 호수가 생겼지 않나 싶다.
경포대,오죽헌 12:50 ~14:10
구문소 구경을 마지막으로 이제는 동해 쪽으로 넘어간다. 동백산역 쪽으로 하여 넘어가니 연화산 유원지를 지나 동백산역 전에서 좌회전하여 한보사원아파트가 있는 삼거리인 백병산 입구가 있는 곳으로 나온다. 이곳에서 조금을 더 가 통리역 건널목을 넘어서 조금을 내려가면 앞쪽으로 미인폭포아래쪽으로 케언이 보이는 고원관광휴게소가 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문 다음 긴 고개를 내려가면 이제는 동해안쪽인 도계를 거쳐 삼척을 거쳐 동해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강릉에서 나와 경포호변 주차장에 주차를 하였다가 걸어서 경포호변을 걷는 여사님들을 다시 태우고 오죽헌으로 가 입장료를 끊으니 3천냥이다. 오죽헌에 들어가 오죽헌 문성사 앞마당에 들어서니 600년이 되었다는 배롱나무와 율곡송이 있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율곡이이가 태어난곳이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섰다고 한다. 오죽헌과 문성사 좌측으로 안채 바같채와 어제각이 있다. 어제각은 율율이이의 저서 격몽요결과 어린시절 쓰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이밖에도 박물관등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초당순두부집 14:15 ~14:52
오죽헌에서 나와 얼마 안가면 선교장이 나온다. 선교장은 차로 지나며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옆으로 있는 초당순두부집으로 들어가 점심식사를 한다. 원래는 400백년이 되었다는 운치 있는 집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그 옆에 있는 순두부집 아자씨의 손짓에 의해 그 집 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켜 할 수 없이 그 집에서 순두부 전골로 점심식사를 하였다.
휴휴암 15:27 ~16:07
순두부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경포호를 차로 한바퀴 돌아보고 난후 주문진을 경유 하여 양양을 거쳐 휴휴암에 도착 후 40여분에 걸쳐 이곳저곳을 관람한다. 그전에 한번 가본적이 있어 새롭지는 않치만 바다옆에 세운 높다란 불상 옆으로 동자승이 둘이 더 추가 되었고 다른것들은 전에 보던대로다. 바닷가에 기어가는 거북상은 그대로 이며 지금도 물고기 밥을 주어서 모여드는 고기떼는 여전하다. 여기에 있는 고기가 황어라고 한다.
화암사 17“17 ~ 17:50
휴휴암에서 설악동 입구를 지나 속초시내를 지나 미시령 쪽으로 올라가서 울산바위를 구경하고는 다시 화암사로 향한다. 화암사 못미처에 차를 주차시키고 해가 지기 전에 얼릉 수바위에 올라가니 아 ~~여기도 바람에 엄청 거세다. 간신히 수바위 슬랩으로 올라가 설악산 달마봉과 울산바위를 바라보니 그 모습이 멋지다. 아래쪽으로 화암사 절이 보이고 위쪽으로는 금강산의 끝봉이라는 신선봉이 보인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오르면 신선봉으로 오를수 있지만 등산로 입구에 출입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다. 수바위에서 내려서 화암사를 둘러 본 후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속초 덕흥식당 18:10 ~19:20
화암사에서 구경을 마치고 속초시내에 있는 덕흥식당으로 향한다. 이곳으로 오면 꼭 들르는 식당이다. 몇 번을 와봤지만 오늘도 덕흥식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잘못 들어 금시 찾지를 못했다. 오늘도 역시나 생선찜을 시키니 기다리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우리가 들어가며 기다리는 팀이 몇팀이 있어서인지 다른때 보다도 더 오래 기다린듯하다.
숙소 19:40
속초에서 저녁식사를 먹고 20여분을 달려 설악동 입구를 좀 지나 물치항 조금아래에 있는 낙산연수원에 도착을 하니 19:40분이다. 이것으로 오늘 하루 일정을 마친다.
2일차
흘림골입구 7:35
어제 일직 덜 주무신 탓인지 새벽녘 일찍 일어나 부산을 떠시는 바람에 내도 5시 기상하려 알람을 맞추고 잠을 잣건만 4시반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고 말았다. 티비를 켜고 세수를 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도 6시가 좀 넘는다. 동녘 바다에서는 금시 해가 떠오를 것 처럼 온통 붉은 빛을 띠고 있다. 서서히 햇살이 바다에서 하늘로 치켜 오르더니만 드디어 노란 태양이 바다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서서히 조금씩 떠오르는 태양을 10여분 이상에 걸쳐 맞이하고는 이제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이 하나둘 밖으로 나간다. 카운터에 이르니 아직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 직원을 깨울수도 없고 하여 7시가 되기를 기다려 계산을 요구 한 후 숙소를 떠나 35분 정도를 달려 오색약수 위쪽에서 한계령 중간지점에 있는 흘림골 입구에 일행을 내려놓고 나는 다시 차를 용소폭포입구 주차장에 내려다 놓고 대략 2.5km 거리를 걸어 올라간 후 흘림골로 진입을 한다. 먼저 간 일행보다 35분 정도가 늦은 시간이다.
등선대 8:50
흘림골입구에서 진입을 한 시간이 8:11분이다. 전에는 없던 나무계단길이다. 좌측으로 뾰족한 봉이 보이며 우측으로 칠형제봉이 하나 둘 나타기 시작한다. 계곡아래쪽을 바라보노라면 오색약수입구에서 대청봉으로 오르는 능선들이 보인다. 먼저 올라간 여사님들을 따라 잡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라 쉬지 않고 오르지만 보이지 않는다. 20여분 후 여심폭포를 지나고, 이제 부터는 가파르게 오르는 계단길이다. 숨을 몰아쉬며 고갯마루에 오르니 앞쪽에 등선대로 오르는 우리 여사님들 뒷 꽁무니가 보인다. 등선대가 가까워지며 바람은 무척 거세게 몰아친다. 혹여 바람에 날려 낙상이라도 할까 등선대에 앞서기니 뒷거니 하며 거의 동시에 올랐다. 등선대에도 전에 없던 전망대를 만들어 놓아 한결 터가 넓어지긴 했지만 정작 만물상의 모습을 제대로 볼수 있는 바위꼭대기를 비켜서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기에 거센 바람을 피해 다시 바위꼭대기로 올라야 한다. 위치가 몇 미터 차이지만 보이는 조망은 큰 차이가 난다. 거센 바람을 더 이상 견딜수 없어 바위꼭대기를 피해 전망대로 내려와 조망을 한번 더 살핀 후 하산을 시작한다.
등선폭포 9:30
등선대에서 흘림골 반대편으로 하산을 하면 상당히 가파르게 내려서게 된다. 이곳에도 계단을 잘 만들어 놓아 그전보다는 걷기에 한결 나은듯하다. 내려서는 길에 다래나무넝쿨 그네를 타기도 하며 이미 지고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단풍잎이 거센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은 아 ~~이제 머지않아 겨울이 다가옴을 느낀다. 등선대에서 30분을 내려서니 우측으로 작은 물줄기가 내리는 폭포가 나온다. 이름하여 등선폭포다. 신선이 하늘로 오르기 전 이곳에서 몸을 깨끗이 한후 등선대로 올라다 해서 등선폭포라 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요즘 비가 오지 않아서인지 수량은 매우 적다.
십이 폭포 10:15
등선폭포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길도 예전에 비하면 매우 좋아 졌다 거의 나무계단길로 산림훼손을 최소화 하기 위한 국립공원의 노력이 보인다. 25분여 내려오면 보이는 좌우의 바위봉들의 모습이 좋고, 계곡에서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능선마루에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지나온 연봉들을 다시 한번 감상한 후 내려서면 점봉산에서부터 내려온 긴 폭포가 나온다. 이폭포가 십이폭포다. 굽이굽이 바위를 타고 내려오는 십이폭포도 수량만 좀 많다면 좋겠지만 갈수기라 수량이 너무 적은 것이 흠이다.
용소폭포 10:45
십이 폭포에서 내려서는 계곡길에 단풍이 비로소 곱게 물들었다. 단풍이 고지대는 이미지고 이제 거의 바닥에 내려왔다고 보면 되겠다. 이곳도 거의 나무계단으로 만들어 놓아 등산로가 매우 좋아졌다. 십이폭포에서 25분여를 천천히 이쁜 단풍과 좌우로 펼쳐지는 경관을 감상하며 내려오면 용소폭포 삼거리다. 이부분이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많은 비로 인하여 주전골에서 용소폭포로 이어지던 길이 없어지고 나무통로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여기 삼거리에서 오색폭포 쪽으로는 예전에 몇 번씩 다니던 길이라 생략하고 용소폭포로 하여 산행을 접기로 한다.
용소폭포 입구 10:53~10:58
용소폭포의 맑은 물을 뒤로 하고 10여분 오르면 용소폭포 입구 주차장에 닿는다.
이렇게 하여 흘림골 등선대 산행을 일찍이 마치고 구룡령을 거쳐 운두령으로 하여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송천떡마을 11:24 ~11:30
설악산 흘림골 산행을 마치고 양양으로 향하다 우측으로 빠지는 길이 나온다. 구룡령으로 가는 길이다. 구룡령입구에는 구룡령까지 24km 이정표가 보인다. 한적한 길을 따라 접어 들면 미천골휴양림 안내도도 보이고, 30여분을 갔을까 앞쪽으로 높다란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보이는 지점에 송천떡마을 간판이 보인다. 잠시 서서 떡마을 앞 판매점에서 몇 가지 떡을 주문하여 입을 즐겁게 하며 가니 배도 부르고 맛도 좋고 마님들 기분도 좋아 보인다.
갈전약수 12:12
송천 떡마을에서 15분 후 맛있게 먹던 떡이 거의 바닥이 날 무렵 갈전약수 간판이 보인다. 구룡령으로 오르기 전 가파른길이 시작되는 부분에서 우측으로 들어간다. 대략 1km 정도를 차로 들어가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지점이 나온다. 차를 돌릴 수 있는 정도의 넓이와 3~4대 차량을 주차 할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이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오르면 대략 1km 정도 거리로 15분 정도가 소요 되어 갈전약수에 닿는다. 약수터에는 황갈색 너울이 낀 아래쪽통과, 깨끗한 약수가 흐르는 위쪽통으로 구분이 되어 있다. 물맛이 강해 비위가 약한 분들은 많이 마시지는 못한다. 난 거의 한바가지를 퍼마시고 나니 한참 후에 게트름이 난다. 갈전약수로 오르기 전에 백두대간으로 오르는 길도 있어, 이곳으로 하여 백두대간에 닿은 다음 갈전곡봉을 다녀온 후 다시 구룡령 옛길로 내려오는 산행도 좋을 듯하다. 대략 올라갔다 오는대 9km 정도의 산행거리가 나오니 5시간 정도를 잡고 단풍이 곱게 물든 이계절에 한번쯤 다녀가는 것도 좋겠다.
구룡령 12:55 ~13:03
갈전약수를 다녀온 후 큰길로 나와 조금 오르면 구룡령 옛길입구다. 이곳부터 몇구비인지 모를 기나긴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한구비 한구비 돌 때 마다 힘겨워 하는 차를 몰고 20분을 올라서니 온 산하가 발밑에 보이는 구룡령 정상이다. 잠시 구룡령 정상의 시원한 바람을 마신 후 출발
칡소폭포 13:25 ~14:20(중식)
구룡령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이 올라갈 때 보다 더 힘이 든다. 속도를 최대한 낮추며 내려간다. 내려가는 주위로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구룡령고개를 다 내려간 후 올 여름 비를 맞으며 산행을 했던 석화산 입구 만나산장앞을 지나고 내면을 지난 후 한동안을 더 가니 칡소폭포입구가 보인다. 칡소폭포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칡소폭포로 가보니 폭포규모는 작은 편이나 물은 풍부하여 시원한 물줄기가 펑펑 쏟아져 내려온다. 폭포주차장 앞에 있는 막국수집에서 막국수로 점심식사를 한 후 출발한다.
이승복기념관 15:35 ~16:25
칡소폭포에서 나와 다시 운두령 구비구비를 돌아 오르니 몇몇 나이 드신 분들이 맛있게 술을 드시며 즐거워 한다. 잠시 머물다 가는 차량들이 들어왔다 나가고 한다. 우리도 운두령에서 잠시 머문 후 속사로 향하니 운두령 아래 마지막 굽이에 단풍이 너무도 이쁘게 들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이곳에서 또 단풍을 구경한 후 속사로 향한다. 속사에 닿기 전 마지막으로 이승복기념관에 들려 50여분간에 걸쳐 반공소년 이승복 기념관을 살펴보며 그당시에 참혹했던 현장을 자료를 통해 살펴보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너무도 행복함을 느낀다. 기념관 위쪽의 산소에 오르니 어머니 동생 묘소까지 해서 4기의 산소가 나란히 있다. 기념관 안에는 얼마 전 당시의 사건이 조작이라는 논란이 많았었는데 이승복의 친형이 당시 30여군데의 칼을 맞고 살아난 이 사건이 어찌 조작이란 말인가에 대한 글로 종지부를 찍은듯하다. 진실로 받아들여야 맞지 않겠나 싶다.
이렇게 하여 이틀간의 여행겸 설악산 흘림골 등선대 산행을 마치고 이제는 집으로 향한다. 울릉도 여행이 취소되고 갑지기 계획을 하여 이루어진 여행겸 산행이라 짜임새가 없고 하지만 그래도 곱게 물든 단풍과 시원한 가을 바람은 좋았지 않나 싶다.
같이한 마님들 수고 많았습네다.
흘림골 등선대 산행거리 : 4km
흘림골 등선대 산행시간 : 3:18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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