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행기록

0588 광주,화순 지장산~수레바위산~만연산~안양산~무등산~서인봉~새인봉 2011.10.5..수요일 맑음

광주,화순 지장산~수레바위산~만연산~안양산~무등산~서인봉~새인봉

2011.10.5..수요일 맑음

참석인원 ; 나홀로

 

청주 2:30 -조치원역 2:55 ~3:02 -천안역 3:32~5:20 -전동열차 - 아산역 5:30 -천안아산역 5:35 ~5:58 -광주송정역 8:05 -지하송정리역 8:12 -소태역 8:42 ~8:45 -택시 7000(5600) -너릿재공원 9:00 ~9:05 -이정표(너릿재 0.6km) 9:12 -이정표있는 봉(너릿재 1.0km) 9:17 -송전탑 9:19 - 9:29 -지장산 9:37 ~9:43 -안부(산소,소나무) 9:56 -나무계단(로프) 10:08 -수레바위산 10:12 -우측하산로 있는 봉 10:16 -능선삼거리(만연산 0.3km) (아침식사) 10:39 ~10:52 -만연산 정상 11:03 ~11:10 -수만리3 12:03 -삼거리(우측으로) 12:40 -능선 12:48 -안양산 정상 12:59 ~13:05 -능선삼거리 13:13 -전파기지국 13:16 -능선삼거리이정표(수만2 1.2km) 13:19 -낙타봉(926) 13:45 -능선삼거리(좌 너와나의 목장) 14:07 -장불재 14:12 -입석대 14:24 -서석대 14:38 ~14:41 -임도 14:58 -임도 15:02 -중봉 15:08 -중머리재 15:29 -서인봉 15:35 ~15:50 -새인봉 삼거리 16:06 -새인봉 16:25 - 16:35 -삼거리(,우 봉 하나 지나 만남) 16:43 -쉼터 16:49 -능선끝쉼터(증심사지구로하산) 16:54 -산행끝지점 17:03 -도보 -학동증심사역 17:37 ~17:40 -광주송정역 18:08 ~19:04 -서대전역 20:45 ~21:22 -조치원 21:48 -청주 22:25

~~~~~~~~~~~~~~~~~~~~~~~~~~~~~~~~~~~~~~~~~~~~~~~~~~~~~~~~~~~~~~~~~~~~~~~~~~~~~~~~~~~~~~~~

무등산 1187m

무등산은 무돌뫼(무진악),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서석산 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 무진악이란 무돌의 이두음으로 신라 때부터 쓰인 명칭이다. 무돌의 뜻은 무지개를 뿜는 돌 이란 뜻이다. 무등산이란 명칭은 서석산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 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뜻이다. 무등산에는 수많은 볼거리가 많이 있는데, 어떤 것은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뚝 솟 아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가까이 가서야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무등산은 오르기에 가파르지 않다. 그래서 휴일이면 무등산의 경승을 즐기려는 인파가 끊이지 않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간편한 옷차림으로 산을 찾는다.볼만한 풍경이 있는 구경거리는 서석대, 입석대,세인봉, 규봉, 원 효계곡, 용추계곡, 지공너덜, 덕산너덜 등이 있다. 전망을 즐기려면 중머리, 장불재, 동 화사터, 장원봉 등이 있다. 이 중 화순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입석대, 규봉, 지공너덜,장 불재, 백마능선, 규봉암에서의 동복호 조망 등이 있다. * 무등산의 구성 1) 새인봉 임금의 옥새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인괘봉이라고도 한다. 또 천제등을 향 해 엎드려 있으므로 사인을 닮았다 하여 사인암이라고도 한다. 2) 서석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 있다. 저녁 노을이 들 때 햇살에 반사되어 수 정처럼 빛나기 때문에 서석을 수정병풍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 무등산을 서석 산이라 부른 것은 이 서석대의 돌 경치에서 연유한 것이다. 서석대의 병풍바위 는 맑은 날 광주 시가지에서도 그 수려함을 바라볼 수 있다. 3) 입석대 석축으로 된 단을 오르면, 5~6각형 또는 7~8각형으로 된 돌기둥이 반달같이 둘 러 서 있는데 이를 입석대라 부른다. 이런절경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 온 입 석대는 석수장이가 먹줄을 퉁겨 세운 듯, 하늘에 닿을세라 조심스럽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우람하기만 하다. 옛날에는 이곳에 입석암이 있었고 주변에는 불 사의사, 염불암 등의 암자들이 있었다. 4) 규봉 규봉을 보지 않고 무등산을 보았다고 말하지말라 할 정도로, 한 폭의 한국화를 대하듯, 신들이 옥을 깎아 놓은 듯 무등산에서 가장 절경이 빼어난 곳 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 멀리 바라보면 동복댐의 물이 손에 잡힐 듯 눈에 선하다. 원 래 규봉이란 절 입구에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이 마치 임금앞에 나갈 때 신 하가 들고 있는 홀 같이 생겨서 이를 한자로 취하여 규봉이라 한 것이다.이 바 위를 또 삼존석이라 부르는데 여래존석, 관음존석,미륵존석으로 불리우며 도선 국사가 명명했다고 전한다.

또 규봉십대가 있는데 광석대, 송하대, 풍혈대, 장 추대, 청학대, 송광대, 능엄대, 법화대, 설법대, 은신대 등이 그것이다.규봉에 는 두 바위 사이로 길이 나있는데,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어 문바위라 한다. 이곳에는 김덕령장군이 문바위에서 화순 동 면 청궁마을 살바위까지 화살을 쏘 고 백마가 먼저 도착하는지를 시험하였다가 화살을 찾지 못하고 백마가 늦었다 하여 백마의 목을치니 그제서야 화살이 날아와 바위에 꽂혔다는 전설이 전해온 다.무등의 단풍은 규봉의 것을 제일로 친다. 5) 지공너덜 장불재에서 규봉쪽으로 가다보면 바위무리 바다를 만날 수 있다.이 너덜경은 지공대사가 법력으로 수많은 돌들을 깔아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무등산의 대표적인 너덜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천연석굴 은신대가 있는데 보조국사가 좌선수도 했다하여 보조석굴이라고도 한다. 6) 장불재 광주시와 화순군의 경계가 되고 있는 능선고개로 해발 990m의 고갯길이다. 규봉과 입석대, 서석대로 가는 유일한 등산로이다.이전에 동, 이서 사람들 이 광주를 오갈 때 지나던 고갯마루이다. 정상을 향해 왼편에 서석대,오른편 이 입석대이고, 이서면쪽으로 능선을 따라 돌면 지공너덜과 규봉에 다다른다. 7) 백마능선 장불재에서 방송시설이 있는 쪽으로 펼쳐진 능선인데 가을이면 억새의 흰 손 이 바람에 흩날릴 때 마치 백마의 갈기처럼 보인다. 장불재에서 이어지는 고 산초원지대이기도 하다. 8) 중머리재 증심사에서 지정 등산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3올라가면 대피소가 있다. 이곳에서부터 가파른 고갯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중머리재이다. 산 위에 올라 가서 편안한 능선이 이어져 있어 사람들이 휴식하기에 적당하다. 이곳을 통하여 더 올라가면 중불재로 가고 이어 입석대, 규봉을 갈 수 있다.

 

등산로

* 광주증심사 - 중봉 - 장불재 - 입석, 서석대 - 규봉암 - 꼬막재 - 무등산장 * 광주 증심사 입구 - 바람재 - 중머리재 * 광주 증심사 입구 - 토끼봉 - 중머리재 * 증심사 - 돌샘약수 - 중머리재 * 증심사 입구 - 약사암 고개 - 중머리재 * 증심사 입구 - 보리밥집 - 천제단 - 봉황대 - 중머리재 * 용연마을 - 2수원지 - 중머리재 * 화순읍 만연사 - 선정암 - 농장 - 중머리재 * 화순읍 만수 중지마을 - 안양산 - 장불재 - 중머리재 * 화순 이서면 영평리 장복동 - 규봉암 - 꼬막재 - 무등산장

 

길안내

* 광주(도청) - 증심사, 시내에서 수시운행 20분 소요 * 광주(도청) - 무등산장, 시내에서 수시운행 * 산수오거리 - 무등산장, 시내버스 수시운행 20분 소요\

 * 광주(도청) - 2수원지, 시내버스 1시간 간격 운행 10분소요 * 광주 - 이서 영평리, 217번 야사~화순온천 행 군내버스가 광천동 터미널에서 1시간간격으로 출발. 1시간 소요 ()화순교통 062-373-5666 * 화순읍 - 수만리, 화순군내버스 1 3회 운행 (8:10, 13:30, 16:30) 문의 061-372-0428

 

안양산 853m 전남 화순군 이서면 

전남 화순에 자리한 무등산 남쪽의 안양산(853m) 화순 북서쪽 무등산의 한 위성봉 격인 산이다. 한 치 꺾임이 없이 줄곧 오르막으로만 이어지는 능선길은 결코 만만치 않다. 우선 안양산 자연휴양림 매표소 앞의 주차장에 주차 후 곧장 대나무숲 사잇길로 하여 100m쯤 올라가면 둔병재 마루의 공터의 오른쪽 그늘막 옆에 '안양산 정상 50분 소요' 라고 쓰인 등산로 안내도가 있다. 여기 고갯마루는 임진왜란 때 의병이 주둔했던 곳이라 하여 둔병재(屯兵峙)이니, 안양산 자연휴양림 근처가 주된 주둔지였을 것이다.산길 입구로 접어들어 300m쯤은 길 가운데 풀이 자란 널찍한 임도가 나오고 '안양산 휴양림' 이란 팻말이 선 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숲길로 접어들며 급경사 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1.5km 거리. 통나무를 가로질러 철근으로 고정해 두었고옆에는 굵은 동앗줄을 매어두었을 만큼 경사가 가파르다. 숲 그늘이 짙은곳이다. 경사가 조금 약해지고 작은 바윗덩이가 뵈기에 잠시 걸터앉아 쉬었다가 걸음을 옮기는데,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숲지대가 끝나며 철쭉밭이 시작된다. 휴양림에서 약 30, 700m쯤 걸은 뒤다. 잡목은 다 베어내고 철쭉만 남겨 두어 양쪽으로 시원히 트인 평평한 산록을 철쭉이 사방으로 흩뿌린 듯 뒤덮고 있다. 그 가운데로 길이 나 있으며 모난 석주형의 한 길 남짓한 화강암이 서 있어 조망하기도 아주 좋다.바위 위에 올라 뒤돌아보면  짙푸른 신록의 바다를 배경으로 분홍 철쭉 무리가 선명히 떠오른다. 그 풍경에 누구든 흥분기를 가누지 못하고 긴 탄성이다. 계속해서 오르면  툭 트인 시야.  안양산 정상(853m)이다. 널찍한 평지를 이루었고 그 북쪽 완사면에 철쭉꽃밭이 분홍 융단으로 펼쳐져 있. 정상 북쪽 약 800m의 안부까지는 또한 능선 양쪽으로 50 - 100m 폭으로 철쭉이 피어나 있어, 그 사이로 오는 등산객들은 "화려한 주단길을 밟으면서 근사하게 입장하는 기분" 이라면서 함박웃음이다. 이만한 철쭉 군락은 그리 보기 쉬운 것이 아니다. 이 안양산 철쭉 군락은 안양산 줄기가 호남정맥의 일부를 이루고 있기에 종주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워낙 미끈하게 말잔등처럼 뻗어 있어 백마능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양산은 지형도를 놓고 보면 독립된 산이라기 보다는 무등산에 속한 위성봉이라는 게 더 어울린다. 지형도에는 언제부터인지 안양산으로 표기돼 있지만 한국지명사전에는 안양봉이다. 안양(安養)이란 곧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한다는 뜻의 불교 용어 중 하나로, 안양사라는 절이 많은 것도 그런 연유다.안양산 정상엔 화순군에서 세운 정상비가 있고, 저 앞으로 무등산의 듬직한 풍모가, 올라온 길쪽으로는 긴 산릉이 진초록의 신록을 입고 뻗어나가 있다. 안양산은 철쭉제를 지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철쭉 군락지가 넓다. 철쭉제를 지내는 봉화산이나 백아산보다도 훨씬 넓다. 철쭉밭의 폭이 눈에 띄게 좁아지는 안부의 능선삼거리를 지나서 여기서 곧장 능선길을 따라 무등산의 여러 가닥 등산로를 이어도 된다. 이 삼거리 이후부터는 철쭉은 별로 없다.계곡 하산길은 처음 얼마간만 급한 내리막이다. 통나무로 단을 지어두기는 했지만 휴양림쪽 길에 비하면 양반이다. 오를 경우라도 크게 힘들지는 않다. 500m 남짓 내려가자 바가지가 놓인 샘터가 있다. 바위가 얹힌 계곡 중간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졸졸 소리져 흐르는 것으로 보아 쉽사리 마르지는 않을 샘이다.샘터에서 골짜기를 오른쪽으로 건너며 길이 한결 순해진다. 계단길이 끝나고 좁고 긴 숲속 오솔길이 시작된다. 아름드리 송림이 우거진 길이다. 완경사이고 솔방울이 사방에 떨어져 있는 운치가 그만이다. 이 길로 천천히 올라갔다가 휴양림으로 하산해도 좋을 것 같다.능선 갈림목에서 하산을 시작한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널찍한 농로로 내려선다. 수만리 3, 안양산 정상 2.5km 팻말이 서 있다. 우측 50m 아래에 회색 기와집이 한 채 보인다. 그 기와집 위쪽의 숲 좋은 널찍한 농로

를 따라 내려가자 이내 '수만리 3구 만수마을 경로당' 앞 공터다. 산길 초입에는 안양산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다.철쭉꽃 구경 실컷 하고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서너 시간이면 그만이라 소요시간도 적당하고 또한 바래봉이나 봉화산처럼 너무 산기슭 아래로 내려앉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리지도 않으, 안양산은 한갓진 철쭉 탐승에 적격인 산이라고 할 것이다.# 산행코스안양산은 안양산 자연휴양림 - 정상 - 수만리로 넘어가든, 아니면 출발점으로 되내려가든 4km 3~4시간이면 충분하다. 휴양림에는 주차장이 있으며(입장료를 내고 이용해야 함), 수만리 경로당 옆 공터에 승용차 몇 대는 세울 수 있.휴양림에서 철죽밭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지점까지는 매우 가파르고 그 외는 별로 힘들거나 위험한 데가 없다. 일단 철쭉밭이 시작된 이후부터 능선은 키가 큰 나무는 한 그루도 없어 조망이 매우 좋지만, 그늘은 없음을 알아둔다. 철쭉철 이외의 계절엔 별로 권할 만한 산은 아니다.# 들머리안내광주쪽에서 갈 경우 화순읍내, 만연폭포를 거쳐 이서면 방향으로 간다. 우선 수만리 입구를 지나고 곧이어 둔병재 넘어 안양산자연휴양림에 이른다. 수만리로 하산했다면 화순읍내의 택시(9000)를 불러 휴양림으로 간다

 

대중교통

*화순 시외버스 터미널 국동행 시외버스 승차, '주말농장' 식당 앞 하차 한 뒤 2km정도 도보

*안양산 철쭉 5 20 ~25일경

  [한국의 산천]

 

만연산 668m

만연산은 화순군 화순읍과 광주광역시 동구에 자리한 해발 668m의 산이다. 호남정맥의 명산 무등산(1178m)이 남녁에 안양산(853m)을 향해가다 장불재를 지나자 마자 서남녁으로 곁가지를 일으킨다. 이 산줄기는 이번에 소개하는 만연산과 수레바위산(529m), 지장산(359m)을 일으킨 후 너릿재에 내려선. 너릿재를 지난 이 산줄기는 광주와 전남의 도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달려 소룡봉, 정광산, 건지산, 죽령산 등을 일으킨 후 영산강 상류인 지석강에서 산줄기를 마감한다.

만연산 산행은 만연사를 중심으로 원점산행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도계를 이룬 너릿재에서 시작하여 지장산 수레바위산을 거쳐 만연산에 오르고, 만연사로내려서는 코스야 말로 진정 산을 사랑하는 산꾼들의 산길이다. 지장산~만연산 종주산행의 들머리는 화순군 화순읍과 광주시 동구를 이어주던 너릿재 고갯마루, 광주쪽으로는 포장길이, 화순 쪽으로는 비포장길이 만나는 고갯길은 백번 걸어도 싫증나지 않을 멋진 옛길이다.

1971년 개통된 너릿재터널로 인해 까마득하게 잊혀져간(광주쪽) 중턱에는 시비가 있다. 윽고 올라선 고갯마루에도 듬직한 바위에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옛 시인의 오언율시가 새겨져 있는데, 제목이 광주읍루이다.

광산의 형세 뛰어나 아름다운 곳/ 옛날을 생각하는 듯 유연하여라/ 부라 일컬은 건 어느 때 였을까/ 광주로 승격된 그 해를 묻노라/ 산천은 빼어나 한도에 웅장하고/ 풍성한 민물속에 어진이가 많아라/ 서쪽 마루 끝이 넓음을 깨닫고/ 높은 누에 올라 짧은 글로 칭송하노 오랜 옛날 누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고갯마루에는 땀을 식히며 쉬어가기 안성맞춤인 쉼터가 있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말끔히 정비된수렛길을 따르면 헬기장을 지나고 뒤이어 삼거리에 이른다. 이곳에서부터 오른쪽(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본격적으로 좁아지는 산길이다. 웃자란 풀과 더러는 가시덤불도 헤치는 산길은 호젓한 산길

이다. 지장산(359m) 정수리에 오르면 엉덩이 높이와 어깨 높이의 너럭바위 두 개가 자리한 지장산 정수리에는 삼각점이나 빗돌 팻말등이 전혀 없다. 무심코 지나갈 평범한 능선길이 었다. 다시 동녘능선으로 이어간다. 한동안 곁가지를 헤치노라면 바위봉이 앞을 가로막는다. 설치된 굵은 밧줄을 잡고 올라선 바위봉은 모처럼 시원한 조망을 펼친다. 지나온 지장산 능선이며, 선동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윗길을 넘어 무덤을 지나 수레바위산에 올라선다. 또한 정상석 삼각점이나 알림판등이 없다. 다시 산길을 이어 정상 0.3km, 너와나의 목장 0.8km, 수레바위산이라 적힌 이정표가 있는 630m 봉에 올라선

. 이곳이 무등산과 만연산이 갈라지는 능선삼거리이며, 이곳에서부터 도계 능선을 벗어나 오른쪽(동쪽)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면 정상 0.7km, 만연사 1.7km, 수레바위산 0.8km로 표시된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올라가는 능선길을 이어 마침내 최고봉인 만연산 정수리에 올라선다. 화순군에서 세운 빗돌과 이정표가 자리하는 정상의 조망은 참 시원하다. 동쪽으로 안양산,북쪽으로 무등산의 통신탑이 하늘에 닿을듯하다. 안양산 서쪽의 너른분지에는 올망졸망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암릉길이 이어진 609m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가 있다. 올라온길로 되돌아 내려가 이정표 삼거리에서 만연사 1.7km, 방향으로 따라 내려간다. 산길을 따라 가면 삼거리를 만나고 왼쪽길을 따르면 자그만 폭포가 시원한 계곡길로 내려서고 마침내 만연사로 내려선다. 고려 희종 4(1208) 만연선사가 창건한 만연사는 바로 만연이란 산이름에서 비롯된 800년 고찰이다. 1783년에 제작된 보물1345 만연사괘불을 소장한 고찰의 옛건물은 한국전쟁때 전소되었고 1978년 이후 지금의 대웅전 나한전 명부전등이 복원되었다. 말끔히 정돈된 경내에는 대웅전 앞의 꽃이 만발한 배롱나무와 종무소 남쪽 오래된 감나무는 아득한 사력을 무언으로 전해주고 있다. 지도상의 산이름과 달리 나한산 만연사 고 표시된 일주문 입구에는 높이 29M,둘레3.5M, 수령 820년의 보호수 전나무가 천년을 하루같이 화순 땅의 소중한 명찰을 수호하고 있다.

 

차천과 배씨 처녀 전설

화순읍(和順邑) 에서 보면 남산 입구에 사거리가 있는데 여기 자치샘이란 빗돌이 서 있다. 옆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오랜 이 고을의 역사를 말해 주는듯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이젠 그 도 지난간 세월에 시달리다 지쳐서 말라죽은 고목이 되어 버렸다.

이 물로 빨래를 하면 옷이 깨끗하고 술을 빚으면 술맛이 좋다고 하며 이 속에는 철분과 염분이 없어서 물맛이 좋고 오랜 가뭄에도 샘물이 끊어지지 않은 명천(名泉) 이었다. 옛날에는 이 고장의 명물로 손꼽힌 두부와 초병(기정떡) 이 모두 이 샘물 때문에 유명하였다고 전한다. 여기에 얽힌 전설로는 관직(官職) 은 모르나 옛날 오자치(吳自治) 라는 지리술수(地理術數) 에 밝은 분이 화순을 지나는데, 그 해에 큰 가뭄이 들어 주민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민망히 여겨 이 곳을 파도록 하였다고 한다.(玉水) 가 솟아 올라 그 샘을 자치샘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또 다른 전설은 진각국사(眞覺國師) 의 태생에 얽힌 이야기다. 옛날 고려중엽의 일이었다. 화순읍에 배씨성을 가진 아전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관속(官屬) 인 만큼 그 고을 사람들 사이엔 적지 않은 세력(勢力) 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산(家産) 도 여유가 있어 아무런 구애 됨이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배씨 부부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다가 늦게야 겨우 딸 하나를 얻어 금지옥엽(金枝玉葉) 처럼 귀엽게 기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 배씨내외는 모든 희망을 딸에게 걸고 어린 것이 자라는 것에 낙을 삼았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 로 인생길은 그리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금지옥엽처럼 키우던 그 딸이 열여섯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아버지인 배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별안간 당하는 일이었으므로 온 집안은 근심 걱정으로 가득했고, 더우기 딸과 아내는 날마다 눈물로 지내는데 효심이 지극한 딸은 하루도 빠짐없이 손수 미음을 끓여 아버지께 바치었다.하루는 물동이를 이고 샘으로 가는데, 아직 이른 새벽이라 먼동이 텄을뿐 어슴프레한 아침이었다. 하늘에는 샛별이 떠 있고 주위는 죽은듯 고요할 따름이었다. 배씨처녀는 샘가에다 물동이를 내려놓고 맑은 물을 뜨려고 바가지를 든 순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저게 무엇일까? 배처녀가 놀라 물위에 떠 있는 것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분명히 참외였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겨울에 참외가 있다는 것은 당시 사람으로서는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에그머니! 한겨울에 참외가 왠일일까?  배처녀는 자기도 모르게 그 참외를 건져 들었다. 그것은 아무리 달리 보고 냄새를 맡아 보아도 틀림없는 참외였다. 신기하듯 한참 들여다 보고 있던 그녀는 별안간 그 외가 먹고 싶은 생각이 충동적으로 일어 무심결에 외를 먹고 말았다. 이른 새벽의 참외 맛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참외 한개를 다 먹어 치운 다음 물을 길러 가지고 돌아와 미음을 쑤워 아버지가 갇혀 계시는 옥() 으로 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참외를 먹고 난 뒤, 배처녀는 두달, 석달, 달이 가고 날이 갈수록 그녀의 배() 는 불러만 갔다. 처녀의 몸으로 수태를 하게 된 배처녀는 이상하기도 했지만 부끄러워서 누구에게 말 한마디 못하고 근심속에서 날을 보내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차라리 죽어 버릴까?  그녀는 죽음을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무심한 배는 날이 갈수록 더 불러만 갔다.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된 그녀는 어느날 저녁에 어머님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저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얼굴을 숙인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니, 왜 그러느냐? 어디 몸이 아픈 모양이로구나.」「 아니예요, 어머님, 으흐흐흐......」「 왜 말은 않고 울기부터 하느냐? 네가 내 앞에서 못할 말이 뭐란 말이냐?」「 , 저 저에게 태기가 있어요.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처녀의 어머니는 펄쩍 뛰었다.  ? 그게 웬말이냐! 그럼 도대체 그게 뉘애란 말이냐? 어서 바른대로 말하여라. 딸을 다그치는 어머니의 전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배처녀는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은 양 정신을 가다듬고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딸의 말을 다 듣고 난 어머니는 어이가 없었다. 참 해괴한 일이로구나. 어찌됐던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남들의 이목도 있으니 문밖 출입을 금하여라. 어느덧 만삭이 되어 옥동자(玉童子) 를 낳았고, 때마침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이 되었던 배씨가 혐의가 없음이 판명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집도 안간 딸이 옥동자를 낳은 것을 보고 몹시 놀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행실을 못되게 해서 낳은 아이인가, 의심하여 철저히 꼬집고 힐문하였다. 그러나 배처녀는 전혀 그런 일이 없고, 차천(車泉) 으로 물을 길러 갔다가 샘물에 뜬 외를 한개 건져 먹고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를 사실대로 고백하였다. 아버지도 참으로 해괴하고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이상 딸을 책하지 않았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남보기에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집 뒤에 방 하나를 새로 들이고 그곳에서 얼마동안 아기를 길렀지만 밖에 누설이 될까 두려워 하는 수 없이 아기를 아무도 모르게 읍에서 서쪽으로 3쯤 떨어진 숲속의 큰 정자나무 밑에다 버리고 돌아왔다.남의 이목이 두려워 아이를 갖다 버리기는 하였으나 배처녀는 모정의 아픔을 걷잡지 못하고 남모르게 울기만 하였으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도 마음이 언짢아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밤에 처녀의 어머니는 어린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남몰래 등불을 들고 숲속으로 가보았다. 그런데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아기는 한마리 학의 날개 속에 품겨 있었다. 그것을 보고 더욱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한편 다소나마 안심을 하고 그대로 되돌아 왔다. 그 이튿날도 배처녀의 어머니는 또 숲속에 가보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몇마리의 학들이 나무밑에 모여 발로 땅에 우물을 파가지고 물을 머금어다가 아기에게 먹이기도 하고 다른 큰 학은 날개를 펴서 어린애를 품고 간간이 입으로 젖을 토하여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음날도 가 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씨부인은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참! 이상한 일인데 ...... () 씨도 부인의 말을 듣고 몸소 그 숲속으로 가보았다. 역시 학이 날개를 펴고 어린애를 품고 있는것이 아닌가! 참외를 먹고 수태하여 아이를 낳은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거니와 어린애를 내다버려도, 학이 보호한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아이는 범상한 아이가 아닌 모양이오. 그러니 다시 데려다 기르는 것이 어떻겠오. 배씨는 아내에게 아기를 기르자고 했다. 그러자 아내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첫째, 인생이 불쌍해서 안됐고, 둘째는 날 때부터 보통 다른 애들과 다른 데가 있어요. 내다 버려도 새가 와서 보호하는 것을 보아 아마 큰 사람이 태어난 것 같으니, 우리가 그대로 두었다간 천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저 애도 늘 슬퍼서 울고만 있으니 보기에 안되었구려...... 아내도 남편의 뜻에 적극 찬성했다. 그러나 귀한 딸의 장래를 생각하면 아버지 없는 자식을 낳았으니 앞날이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태연히 그 아이를 데려다가 기르는 수가 없을까 하고 의논해 보았다.  여보, 좋은 수가 있소. 당신이 어디 갔다 오다가 길에서 얻은 것처럼 데려와서 기르면 되지 않겠소 」「 ,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두 내오는 합의를 보았다.이튿날 배씨부인은 일부러 능주에 있는 일갓집을 다녀오는 길에 짐짓 놀란 표정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동행하던 아낙네들에게 말했다.  저 소릴 좀 들어보오. 저기 정자나무 밑에서 어린애 우는 소리가 나질 않아요. 아낙네들도 모두 한마디씩 떠들었다.  글쎄요, 어린애 소리군요.」「 어디 가 봅시다. 누가 이 숲에 어린애를 버렸는가 보오  배씨부인은 동행하던 부인과 함께 정자나무 밑으로 갔다. 거기에는 과연 전과 다름없이 학이 어린애를 품고 있었는데, 그들이 가까이 가자 어린애를 남겨둔 채 푸드득,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에그머니! 이런 곳에 웬 아기가......?」「 정말 웬 어린애일까? 가엾어라. 쯔쯔...... 배씨부인은 달려가서 어린애를 안아들었다. 같이 갔던 부인들도 가엾이 여기며 어린애를 어르고 야단이었다.  , 잘도 생겼네.」「 몹쓸 사람들도 다 있지. 누가 어린애를 나아서 이런데다 버렸을꼬? 그들은 이렇게 주고 받으며 어린애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쯤되자 길에서 내버린 아기를 주워 왔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소문을 내었고, 그 소문은 바람을 타고 불길이 번져가듯 인근에 널리 퍼졌다. 이렇게 하여 배처녀가 내다 버렸던 어린애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들은 정성껏 아기를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 두 살이 되고, 세살이 되고......, 이렇게 자라 갈 수록 어린애는 얼굴이 뚜렷해지고 총명이 넘치니 배씨부부는 물론이고 배처녀의 극진한 사랑을 받게 되었다.그럭저럭 아이의 나이가 열살이 되었다. 어느날 그의 집에 스님이 찾아 왔다. 스님은 어린애를 보자 몹시 놀라며 혀를 차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아이로군. 허나 애석한 일이다. 이 말을 들은 배씨는 스님의 거동이 이상하여  무엇이 애석하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뜻을 좀처럼 말하려 하지 않다가 자꾸만 따져 묻는 배씨부부의 청을 이기지 못하고 스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를 댁에서 그냥 기르면 단명해서 열다섯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요, 그러나 내가 데려다 불공을 드리고 기르면 수명을 누릴 수 있소만...... 스님은 또 다시 애석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배씨는 그 말을 듣고 적지아니 놀라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스님에게 물었다.  오래 살고, 잘 되게 하시려면 그 애를 나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절에 데려다가 수양을 쌓게 하고 공부를 가르치면 후일 크게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그 아이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청했다. 배씨는 안에 들어가 가족들과 의논을 했다. 정리로 보아서는 차마 내주기가 어려웠으나 단명한다는 말과 후일 잘되게 해 준다는 말에 그들은 스님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 길로 스님은 아이를 데리고 절로 떠났다. 이 스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시 유명한 대사인 보조국사였던 것이다. 보조국사는 그 아이를 열심히 가르쳤다.워낙 총명한 재질이라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통해 날로 달로 학식이 넓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가슴에는 감각(感覺) 의 바탕이 숨어 있어 드디어 묘공(妙空) 의 법을 얻었으니 이가 바로 후일에 진각국사가 되신 분이었다. 진각국사(眞覺國師) 가 절에 온지 얼마 후 배씨부부(裵氏夫婦) 는 세상을 떠났고 진각국사 어머니 배처녀는 시집을 가지 않고 그대로 공구(空驅) 만 지키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화순의 만연산 성주암(聖住庵) 에는 몇 십년 전까지도 진각국사 영정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 없고 다만 순천 송광사의 국사전에 모셔져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이요, 진각국사 어록(語錄) 등 여러 기록에서 좀 더 자세한 국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진각국사께서는 서기 1178(명종 8) ~ 1234(고종 21) 의 고려때 스님으로 속성(俗姓) 은 최씨(崔氏), 이름은 식() 이며 호() 는 무의자(無衣子) () 는 영을(永乙) 이다. 나주속(羅州屬) 화순현인(和順縣人) 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부친은 휘(), 자는 완() 으로 되어 있으며 향공진사(鄕貢進士) 였다

그리고 그 어머니께서는 배씨(裵氏) 였다. 꿈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번개 우뢰가 세번 치는 것을 보고 임신(姙娠) 이 되었는데 12개월만에 낳았고, 태포(胎胞) 가 몸을 감아 흡사 연() 잎과 스님의 예복인 가사와 같았다. 태어난지 7일 후에 눈을 떠 맑아졌으며, 어머니의 젖을 먹고 난 즉시 몸을 돌아 눕고 앉았다. 부모께서는 심히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고 생계가 어려워 품팔이를 하려 할 때 어머니께서 꾸중을 하시며 글 공부를 권하였다. 항상 불경과 주문(呪文) 을 독송(讀頌) 하다 마침내 득력(得力) 하여 요사스런 무당과 음탕한 복자(卜者) 들을 물리치고 왕왕히 병자를 구하였으며 1201( 신종 4) 에 사마시(司馬試) 에 합격하여 대학(大學) 에서 공부하다 어머님의 병환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님의 친가이신 외종형(外從兄) 배광한(裵光漢) 씨 댁에서 어머님의 병환치료를 할 때 관불(觀佛) 삼매지경(三昧之境) 에 들어 성심껏 기도를 드리자 어머님 꿈에 제불(諸佛) 보살이 사방에서 나타나 보호하였다. 그 후 즉시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리고 외종형 무부(外從兄 武富) 도 같은 꿈을 꾸었다. 어머님은 그 후 일년이 지나 돌아가셨다

그때 마침, 보조국사께서 조계산에 수선사(修禪寺) 를 새로 지어 도() 를 세상에 널리 펴고 있었는데 여기 수선사에 어머니의 제() 를 모셔 구천명도(救遷明途) 를 밝혀 드리고자 참례(參禮) 하여 지성껏 기도를 드렸다. 이날 밤, 그의 외숙() 은 꿈에 그녀가 승천(昇天) 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삭발하여 중이 될 것을 보조국사께 청하였는데 쾌히 허락을 하였다. 잔각께서 처음 국사를 뵈올 때 국사께서 보니 중이었는데 다시 보니 속인(俗人) 으로 보이었다. 먼저 꿈에 설매헌(薛梅軒) 선사께서 입원(入院)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상히 여겼는데 다음날 진각께서 찾아오니 더욱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일찌기 오산(鰲山) 에 머무르면서 수도할 때 한 반석(盤石) 에 앉아 주야정진(晝夜精進) 에 매일 새벽 오경(五更) 의 계송이 십리밖에까지 들려 새벽시간을 계송과 목탁 소리로 마을 사람들이 짐작하였으며 또 지리산(智異山) 오대암(五臺庵) 에 자리하고 대상(臺上) 에서 정진 할 때, 적설(積雪) 이 목에까지 덮어 있어 움직이지 않으므로 혹시 얼어 죽지 않았는지 흔들어 보면 숨을 쉬고 있었다고 한다. 용맹으로 정진한 각고는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생과 사, () 과 해() 를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어떻게 이 경지를 이르랴. 그 후 을축(乙丑) 의 가을에 보조국사께서 억보산(億寶山) 에 계실때 선문도화(禪文道話) 로 통하여 무의자제서도 대오(大吾) 의 경지에서 달관 함을 바르게 보시고 국사께서 깔깔 웃음으로 대소하시며, 무의자를 모시고 지리산에 들어가 다시 모든 법을 밀전(密傳) 하시며, ,  오기득여사무한의(吾旣得汝死無恨矣) !  ( 내 이미 너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 하시었다. 보조국사께서 국사의 자리를 물려 이어주시고 규봉암(圭峰庵= 무등산) 안주(安住) 하니 진각께서 굳이 사양하여 지리산으로 자취를 감춰 그림자까지도 찾을 길이 없었다.그 후 대안경오(大安庚午) 에 국사께서 입적(入寂) 하신 후, 부득이 그 자리를 받들게 되어 입원계당(入院啓堂) 하였는데 사방에서 도학일사(道學逸士) 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고 팔도의 귀족, 공경(公卿) 들이 모두 큰 스님의 도풍(道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각국사에 대한 기록은 그 외에도 많다. 고종께서 선사(禪師) 로 재수(除授) 하였고 그 후 다시 대선사(大禪師) 로 재수되었다. 그 후 기묘년(己卯年) 에 단속사 주지(斷俗寺 主持) 를 하였다. 여러차례 사양하여 그 이듬해 송광사(松廣寺) 로 돌아왔다. 그 후로 항상 송광사를 자기 처소로 삼았다고 한다. 계사(癸巳) 11월에 병으로 눕게 되니 고종께서 들으시고 즉시 어의(御醫) 를 보내 치료(治療) 케 하였다. 이듬해 봄에 월등사(月燈寺) 에서 정양을 하였으나 선사께서 몸이 더욱 통심(痛甚) 하니 이에 계왈(偈曰), 중고부도처( 衆苦不到處) 별유일건곤( 別有一乾坤) 차문시하처( 借問是何處) 대적열반문( 大寂涅槃門) ( 중생의 고통이 이르지 못한 곳에 별유( 別有) 의 천지( 天地 ) 가 있네 묻건데 이곳은 다름아닌 깨달아 찾아가는 문일러라.) 라고 하였다.  이 늙은 몸 금일로 고통을 잊으리라.  고 말씀하시며 선사께서는 미소지으며 가부좌로 열반(涅槃) 에 드셨으니 갑오(甲午) 유월 이십 육일이었다. 이십칠일 월등사(月燈寺) 북봉(北峰) 의 다비식(多毘式) 에서 영골(靈骨) 을 모시어 본산으로 돌아왔다.고종(高宗) 께서 들으시고 심히 슬퍼하시며 진각국사(眞覺國師) 라는 시호(諡號) 를 내리셨다. 을미년(乙未年) 중엽(中葉) 송광사의 북쪽에 부도(浮屠) 를 세워 고종께서 사액(賜額) 하시되 원소지탑(圓昭之塔) 이라 하셨다. 향수(享壽) 는 오십칠세요, 법랍(法臘) 삼십이세이다. 국사께서 질병을 얻으시자. 계시던 곳에 홀연(忽然) 바위가 무너지면서 굴러 떨어져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참새떼들이 이 골짜기에 찾아들어 하늘을 가릴 듯이 많이 모여 십여일을 슬피 울었으니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국사는 평생을 통하여 신이(神異) 한 이적(異蹟) 이 많았으니 거북이가 계() 를 받고 두꺼비가 설법을 들었으며 작오(雀烏) 는 합주(合奏) 를 하였고 특히 선사께서 지나가면 소가 길가에서 무릎을 꿇고 일어서지 않고 있다가 지나간 뒤에 일어서는 이적등은 모두 어록에 전하는 사실로서 옛 사람들이 기록한 바에 의하면 선문(禪門) 의 정안(定眼) 이며 육신(肉身) 은 대보살이었다고 높이 찬() 하였다. 이 글은 당시 명세적(鳴世的) 인 문장(文章) 이규보(李奎報) 의 찬으로 되었던 진각국사(眞覺國師) 비문내용(碑文內容) 을 요약한 것이다. 이 비는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에 세워졌으나 그 후 병란(兵亂) 으로 결손(缺損) 되어 모두 읽을 수 없어 동국(東國) 이상국집(李相國集) 의 소재(所載) 을 옮겼다.전후의 글을 보더라도 아버지의 성은 최 () 씨 였으며 모성(母姓) 이 배씨(裵氏) 였음은 틀림 없고 아버지의 성명(姓名) 까지 밝혔던 것으로 보아 최씨집으로 출가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학서도(鶴捿島) 에 천년 묵은 노목(老木) 이 있었는데 삼사십년전,  1927년 정묘(丁卯) 정월 2일 오후 8시쯤 목동(牧童) 김백만(金栢萬)의 실화 (失火) 로 소진(燒盡) 되었다고 한다. 수령(樹齡) 은 약 천년쯤 되고 직경(直徑)  3미터 둘레가 9미터 쯤 되는 거목(巨木) 이 천년의 역사를 산 증물(證物) 로 서 있었는데 이제는 진각국사(眞覺國師) 의 기이하고 신통하며 위대한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주인공이 이 세상에서 흔적을 감추고만 셈이다. 또한 자치샘 물마저 이제는 먹을수 없게 되어 쓸쓸하기 짝이 없다.

~~~~~~~~~~~~~~~~~~~~~~~~~~~~~~~~~~~~~~~~~~~~~~~~~~~~~~~~~~~~~~~~~~~~~~~~~~~~~~~~~~~~~~~~~~

 

광주송정역 8:05

무등산과 안양산으로 가기위하여 여수행 막차를 타고 순천을 경유해서 화순으로 갈까 천안아산역에서 목포로 가는 첫 차를 타고 갈까 고민을 하다가 천안 아산역을 거쳐 가기로 한다. 오송역에서 고속열차가 서지 않는 탓에 서울로 가는 막차를 타고 천안역으로 가 2시간 반 정도를 기다려 신창으로 가는 5:20분 전동열차를 타고 아산역으로 가 천안 아산역에서 5:58분 목포로 가는 고속열차를 타고 한숨 자고 광주 송정역에 내리니 8:05분이다.

 

너릿재 공원 9:00 ~9:05

광주 송정역에서 나오면 곧바로 지하철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와 연결이 되어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다. 송정리역에서 표를 구입하여 들어가자 마자 미니전동차가 들어 온다. 자리에 앉으니 통로가 좁아 앞사람과 무릎이 맞닿을 정도다. 송정리역에서 16번째 역 소태역까지 운행한다. 마지막 역이 녹동역으로 되어 있으나 그곳은 용산기지와 같이 쓰는지 승객들은 소태역에서 모두 내린다. 나도 소태역에서 내려 위쪽으로 올라가니 화순으로 가는 큰도로변이다. 소태역에서 화순쪽으로 500m 전방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간이 시외버스정류장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나도 그쪽으로 가는 중 택시를 만나 너릿재로 가자 하니 택시기사님이 나이가 지긋 하신 분이라 그곳을 아는지 화순 넘어 가는 고개요 한다. 그렇다고 말을 하고 가는 중 택시는 좌측으로 넘어가서는 좁다란 산길로 올라 간다. 예전에는 이길로 버스가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매우 좁다란 길이라 버스가 다니질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다녔다고 한다. 길이 좋지를 않아 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큰길에서 대략 2km 정도를 올라서니 너릿재다. 택시비가 5600원 나왔으나 좀 더 생각해달라고 해 7000원 받으시라고 하니 군말이 없으시다. 워낙 산으로 올라오는 좁은 도로라 이해가 간다.

 

지장산 9:37 ~9:43

너릿재 공원이라고 하기엔 시설이 미비하고 좁다. 쉼터시설이 있고 자전거 보관대가 있다. 도덕산 쪽으로 해맞이 명소 200m라 쓴 대리석비가 있고, 이정표(만연산 5.5km), 몇 개의 운동시설, “광산의 형세 뛰어나 아름다운 곳로 시작되는 광주읍루시비가 있다. 광주쪽은 포장이 된 도로이나 오래되어 훼손이 많이 되었고, 화순쪽은 비포장길이다. 이제 쉼터와 자전거 보관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널찍한 임도길은 풀이 많이 자라 있다. 몇 개의 산소를 지나 너릿재 0.6km가 적힌 이정표를 지나고 다시 5분을 더 올라가면 야트막한 봉에 닿는다. 우측으로 산소가 자리잡고 있고, 좌측으로 광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이후로 길은 좁아 진다. 잠시 후 송전탑을 지나고 10여분 후 봉을 하나 더 지나서 8분을 더 오르니 지장산 표찰이 붙은 지장산 정상에 닿는다. 특이한 것은 없다.

 

수레바위산 10:12

지장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서며 나뭇잎사이로 곡하게 보이는 산이 수레 바위산 인듯하다. 안부로 내려서면 산소가 있고 이쁘게 생긴 소나무 한그루가 오르는 길옆으로 서있다. 10여분을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 막는다. 우측으로 조망이 좋은 작은 바위하나가 서있다. 그곳으로 가니 산 아래 조망이 좋다. 다시 오르니 바위를 돌아 올라 수레바위산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이다. 계단 옆 바위벽에 로프도 걸려 있다. 계단을 올라서니 조망이 매우 훌륭하다. 지나온 능선과 화순 쪽의 경치, 광주 쪽의 마집봉에서 새인봉의 바위들이 보인다. 앞쪽으로 바위를 내려선후 풀 한포기 없는 산소를 지나 오르면 이곳이 수레바위산 정상이다. 이산에는 정상을 표시할 아무런 것이 없으며 그저 밋밋한 봉이다.

 

능선삼거리(만연산 0.3km) (아침식사) 10:39 ~10:52

수레바위산에서 거의 평탄선에 가까운 길을 걷다가 조금 가파르게 올라서면 우측에서 올라온 길이 있는 봉에 닿고, 이후로는 길이 크게 올라서는 곳이 없는 평탄선길이 이어진다. 이런 길을 따라 5분을 더 가니 작은 바위들이 모여 있는 봉을 지나고 다시 4분을 더 가면 우측으로 작은 바위하나와 커다란 소나무가 서있는 봉을 지난다. 이후 10여분을 더 가면 바위에 선비라 적어 놓은 봉에 닿는다. 커다란 소나무가 한그루가 자리하고 많은 사람들이 쉬어간 널찍한 봉이다. 이봉이 630봉이다. 이곳에서 1~2분후 능선삼거리에 닿는다. 우측으로는 만연산 정상 0.3km, 좌측으로는 너와나의 목장 0.9km가 적혀 있다. 이곳에서 늦은 아침식사를 한 후 만연산으로 향한다.

 

만연산 11:03 ~11:10

지금까지 올라온 능선이 광주와 화순의 경계능선이라면 이제 부터는 화순쪽으로 향한다. 능선삼거리에서 우측편으로 내려서면 정상 0.2km, 만연사 1.5km, 수레바위산 1.3km, 너와나의 목장 1.0km로 표시된 이정표가 있는 사거리에 닿는다. 지나온 쪽으로 조금 위 벚나무 기둥에 좌측 너와나의 목장, 우측 중지마을로 표시가 되어 있다. 이곳부터 오름길이며 10여분을 올라서게 되면 만연산 정상에 닿는다. 만연산 정상엔 작은 돌탑이 있으며 의자가 하나있고 대리석 정상석이 있다. 이정표에는 수레바위산 1.5km, 전망대 1.4km, 수만리쪽은 지워졌다. 만연산 정상에 보는 조망이 좋다.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오며 안양산, 안양산에서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조망이 되는 곳이다. 화순쪽의 조망과 산 아래 수만리가 가까이 보인다. 화순에서 큰재를 넘어 안양산으로 오르는 둔병재에 이르는 도로가 시야에 들어 온다.

 

 

수만리 3 12:03

만연산에서 너와나의 목장쪽으로 되돌아 가지 않고 직등하기로 한다. 이정표에 그쪽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으나 다니지 않아서 인지 지워져 있다. 그래도

혹여 길은 남아 있겠지 하는 맘으로 내려서기로 한다. 처음 만연산에서 내려서니 그래도 희미한 길이나마 연결이 된다.

조금을 내려서니 길이 점점 없어지며 이제는 아예 길 흔적도 없어진다. 어쩔 것이냐 그냥 내려서는 수밖에 너덜길과 잡목 넝쿨이 뒤범벅이 된다. 산초 가시

에 찔리고, 멍과나무 가시에 찔리며, 점점 내려설수록 복분자 가시에도 찔리기 일쑤다.

차 소리가 들리며 거의 다 내려왔다 싶나 했더니 너덜에 닿는다. 너덜과 잡목 덤불을 뚫고 간신히 내려서니 도로에 닿는다. 좌측으로는 너와나의 목장이 있는 쪽이고, 우측은 화순서 넘어 오는 큰재가 있는 쪽이다. 좌측으로 조금을 내려가다 우측으로 보니 소나무가 많이 있는 쪽으로 내려간 길이 보인다. 질러서 간다고 이 길로 내려섯다가 또 한번 큰 곤욕을 치른다. 개울에 닿아서 도로쪽으로 올라가는데 찔레나무 가시덤불을 타고 넘어서 오르느라 무진 애를 썼다. 절대로 질러가면 고생이다. 이후 5분여를 가니 수만리 버스정류장에 닿는다. 만연산에서 다시 능선사거리로 내려와 중지마을 거쳐 이곳으로 오는편이 시간도 덜 걸리고 힘도 덜 드는 길이니 그쪽 길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

 

안양산 정상 12:59 ~13:05

수만리 입구에는 녹색 농촌 체험 들국화 약초마을이라 자연석으로 세운비가 있다. 그 옆으로 이정표가 있고 안양산 등산안내도가 있다. 안내도 우측으로 버스정류장이 있다. 이 도로를 따라 오르면 둔병재다. 난 이곳에서 예정대로 안양산으로 오르기로한다. 마을로 들어가니 만수마을비가 있고 옆으로 이쁘장하게 돌탑을 세웠는데 그 아래쪽으로는 샘이다. 샘물도 깨끗하니 맛도 좋다. 이어서 마을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길이 갈린다. 이쪽 저쪽을 헤메다가 노인분이 우측을 가리키며 알려 주기에 그쪽으로 돌아서 오르니 오래된 옛날기와집을 지나 마을꼭대기에서 안양산으로 오르는 길을 만난다. 처음엔 서서히 오르는 듯 하던 길은 지그재그로 오르며 매우 가파르게 올라서게 된다. 등산로는 아주 좋다. 오르는 중 우측으로 목장 들어가는 길이 있고, 수만리 입구에서 40여분이 다 되어 작은 바위가 있는 삼거리에 닿는다. 난 이곳에서 우측으로 오른다. 안양산이 더 가깝지 않나 해서다. 8분을 오르니 능선에 닿는다. 좌측으로 무선기지국 탑이 보이고 우측으로 안양산이 지척이다. 철쭉나무가 등산로 좌, 우로 도열을 해있고, 억새가 손을 내저으며 하늘 거리는 길을 따라 10분을 좀 더 오르니 커다란 공터가 있는 안양산 정상이다. 조망은 아주 좋은 곳이다. 무등산 화순 옹강산 광주 어느 쪽이고 확트인 곳이다.

 

낙타봉 (926) 13:45

안양산에서 다시 되돌아서 무등산으로 향한다. 만수마을에서 올라와 처음 닿은 능선삼거리를 지나 좀 더 가면 전파기지국이 있는 곳을 지나 3분 후 수만리에서 올라와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올라와 만나는 능선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곳이다. 수만리 2 1.2km, 안양산 1.3km, 장불재 2.3km. 능선삼거리를 지나며 서서히 올라선다. 하얀 바위능선을 올라선다. 이곳이 백마능선이라고 한다. 몇 개의 바위들을 지나 앞쪽으로 높다란 바위봉 하나가 남는다. 낙타봉이라고 한다. 낙타의 목덜미 혹같이 생겼다고 낙타봉인가? 백마능선의 하얀바위지대를 지나 좀더 오르니 낙타봉으로 오르는 바위길이다. 옆쪽으로 살짝 돌아서 오를 수 있는 곳이 있다. 낙타봉에 올라서니 몇이서 시원한 가을산을 즐기고 있다. 먼 곳에서 볼 때 보이던 사람들이다. 낙타봉에서 무등산 서석대 천황봉이 지척이고 규봉옆 너덜이 가까이 앞쪽에 다가 섰고, 낙타봉아래 억새밭의 너른 분지가 내려다 보인다.

 

장불재 14:12

낙타봉에서 5분여 내려서면 억새밭이 있는 너른 분지이다. 하늘거리는 억새와 청명한 하늘이 조화가 아주 잘되는 모습이다. 억새밭의 낭만이랄까 그윽한 정취를 느끼며 장불재로 향하니 살며시 올라서 바위봉에 닿는다. 이제 장불재에 있는 통신탑들이 지척이다. 바위봉에서 살며시 내려서니 너와나의 목장에서 올라온 삼거리에 닿는다. 너와나의 목장까지 1.8km, 장불재는 1.3km 남긴 거리다. 이곳에서 통신 탑 앞을 지나 장불재 까지는 5분이면 닿는다.

 

서석대 14:38 ~14:41

장불재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이제 까지는 낙타봉에서 3분을 본 후 장불재로 오면서 마주친 2분을 빼고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다. 장불재에서 1.9km. 좀 전에 장불재에서 쉬고 있던 젊은 팀들이 때 마침 내 앞으로 쏜살같이 입석대로 향한다. 입석대로 향하는 길가에도 억새가 만발을 했다. 이윽고 입석대에 닿으니 전에 없던 입석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통에 잠시 입석대를 사진에 담고는 내려온다. 잠시 후 입석대 해발 1017m 비가 있는 곳을 지나 바위계단을 따라 오르니 작은 입석들이 서있는 지점을 지나 승천암이다. “옛날 이 부근의 암자에 무엇엔가 쫒기던 산양을 스님이 숨겨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이무기가 나타나 산양을 잡아 먹고 승천해야 하는데 네가 훼방을 놓았다며 만약 종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너라도 잡아 먹겠다고 했다. 얼마 후 난데 없는 우렁찬 종소리가 들렸고, 이무기는 곧바로 스님을 풀어 주고 승천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얽힌 바위다.” 승천암을 올라서면 서석대로 올라서는 바위지다. 바위지대 끝 넘어 무등산의 정상인 천황봉이 우뚝 서있으나 아쉽게도 이곳은 군부대가 주둔을 하고 있어 더 이상은 오를 수 없는 곳이다. 언젠가는 풀릴 날을 기다리며 그날을 기약해 본다. 서석대에서 모처럼 내 앞을 질러온 군인들 중 한분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장불재에서부터 내 앞을 앞서거니 하며 올라온 님들은 얘기 소리를 들으니 군인들이었다.

 

중봉 15:08

서석대에서 내려서면 서석대 전망대가 있다. 이곳도 예전에는 없던 것 인데 만들어 놓았다. 뒤쫒아온 군인들중 한분이 군악대장 사진 한장 찍어 드려 한다. 이곳에서는 자동으로 찍기도 어려운데 참 고맙다. 오늘 산행을 이끄시는 대장님이신 모양이다. 비무장 배낭도 안 멘 군인들이라 발걸음이 제법 빠르다. 전망대에서 내려서면 임도가 나온다. 서석대 0.5km, 임도삼거리 0.2km. 임도길따라 우측으로 누에봉 1.6km라 적혀 있다. 군부대쪽으로 올라가다. 누에봉으로 가는 길이 있는 가보다. 천황봉을 우측에 끼고 북봉으로 가는 길이 연결이 되는가 언제 이길도 함 가봐야 겠다. 다시 내려서면 임도삼거리다. 임도 삼거리를 지나며부터 중봉까지는 군부대 복원지역으로 이제는 억새가 많이 자라 훌륭한 억새군락지가 되었다. 하늘 거리며 손짓하는 억새밭길을 따라 가는 정취가 물씬 풍기는 평탄한 능선길이다. 중봉은 억새밭길에서 조금 오르면 된다. 중봉 정상석이 있다. 무등산 중봉 915m. 앞쪽으로 통신 탑들이 또 있다. 조망도 참 좋은 곳이다. 무등산 정상과 서석대 장불재 광주시가지가 두루두루 잘 보이는 조망 포인트다.

 

중머리재 15:29

중봉에서 중머리재 까지는 1.0km. 중봉에서 5분여 내려서면 바위봉에 닿는다. 용추삼거리와 중머리재가 갈리는 곳이다. 여기 바위봉도 몇 개의 선바위가 있는 보기 좋은 곳이다. 바위봉을 좌측으로 돌아서 내려서면 가파르게 내려서는 길이다. 그간 비가 오지 않아 흙먼지가 푸석대고 인다. 산소가 있는 지점을 지나 좀더 내려서니 중머리재다. 중머리재에는 화장실을 짓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내 앞을 걷던 군인들은 증심사로 곧바로 내려서고 난 새인봉으로 향한다.

 

새인봉 16:25

중머리재에서 6분을 가니 삼각점이 있는 서인봉이다. 정상석은 없으나 이정표에 서인봉이라 적혀 있다. 서인봉에서 늦은 점심을 먹은후 새인봉으로 향한다. 서인봉에서 계속 내리막 길이다. 가끔 바윗길도 있고, 16분을 내려서니 새인봉 삼거리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르면 새인봉이다. 커다란 바위 하나를 시작으로 새인봉의 바위지대가 펼쳐진다. 긴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좌우로 바위가 보인다. 이곳에서 좀 더 오르면 좌측으로 바위절벽이 잘 보이는 전망대가 있고 우측으로 수직절벽의 바위지대도 보인다. 다시 좀 더 오르면 정상에 산소가 있는 새인봉이다. 정상석은 없다. 이정표에 새인봉 해발 490m라 적혀 있다. 증심사 지구 까지 2.1km, 중머리재 까지 1.7km 거리다. 정상엔 탐방안내도가 있다.

 

증심사 지구 산행끝지점 17:03

새인봉에서 내려서면 암벽지대다. 암벽을 하는 못이 박혀 있는 곳도 있고 암벽둘레로 줄이 쳐져 있다. 무등산의 또 다른 모습을 여기서 본다. 앞쪽으로 마집봉이 보인다. 암벽지대 위 바위봉을 지나며 부터는 하산길이다. 작은 바위전망대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서며 간다. 봉하나를 놓고 좌, 우로 돌아 가는 길이 있다. 잠시 후 만난다. 여기서 6분여를 더 내려가니 여러개의 의자가 놓여 있는 쉼터다. 쉼터에서 길은 우측으로 돌아서 내려간다. 사면길을 따라 5분을 더 가니 능선 끝지점으로 의자 놓여있는 곳으로 우측으로 증심사로 내려서는 곳이다. 이곳에서 능선을 따라 계속 가면 학운 초등학교가 있는 곳에 닿겠지만 길은 좋지 못하다. 이제 이곳에서 증심사 지구로 하산을 하니 10여분 후 등산구점들이 즐비한 증심사 지구 산행 끝지점에 닿는다. 이것으로 산행을 마치고 좀 더 내려서니 버스정류장이 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학동증심사 전철역까지 걸어 보기로 하고 걸어서 가니 30분이 좀 더 걸린다. 전철역에서 전동차를 타고 송정리 역으로 향하며 시간을 재보니 에고 2~3분 사이로 서대전으로 가는 18:06 차를 못 타겠다. 에고 연신 시계를 보며 가니 마음만 더 급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버스를 타고 올 걸 후회막급이다. 송정리 역에 내리니 18:06 위로 올라가니 18:08 열차는 이미 떠나고 없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19:04 차를 타고 서대전역에 내려 다시 무궁화호로 갈아 타고 조치원역에 내려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 산행 억새와 푸른 창공이 어울리는 가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아주 좋은 산행으로 기억된다.

 

광주 지하철 1200

소태역 ~ 너릿재 택시요금 : 7000(메타요금 5600)

광주 지하철 1200

 

산행시간 ; 8시간 소요

산행거리 ; 20.3km(접근거리 포함 23.3km)

너릿재 ~만연산 5.5km

만연산 ~수만리 2.0km

수만리 ~안양산 2.5km

안양산 ~장불재 3.6km

장불재 ~서석대 0.9km

서석대 ~중봉 1.0km

중봉 ~중머리재 1.0km

중머리재 ~새인봉 1.7km

새인봉 ~무등산장 산행끝 2.1km  20.3km

무등산장 ~학동 증심사역 약 3km 접근거리포함 23.3km

~~~~~~~~~~~~~~~~~~~~~~~~~~~~~~~~~~~~~~~~~~~~~~~~~~~~~~~~~~~~~~~~~~~~~~~~~~~~~~~~~~~~~~~

 

광주,무등산~안양산~만연산~수레바위산~지장산

 

천안아산 5:58 -광주송정 8:04

조치원 7:30 -서대전7:59 ~ 8:24 -광주송정 10:04 ~10:08 -화순 10:38

조치원 0:13 -순천 3:30 ~6:20 -화순 8:03

 

광주송정 17:31 -조치원 20:10

광주송정 18:06 -서대전 19:55 ~20:29 -조치원 21:03

광주송정 19:04 -서대전 20:45 ~21:22 -조치원 21:48

광주송정 19:50 -조치원 22:34

광주송정 20:07 -서대전 21:52 ~22:07 -조치원 22:34

 

화순역 ~지장산입구(너릿재공원) :  5.33km

화순역 ~둔병재 : 11.21km

녹동역 ~지장산입구(너릿재공원) :  4km

녹동역 ~둔병재 : 14.73km

 

예상산행코스

너릿재공원 -20 -너릿재쉼터 -삼거리(너릿재 0.6km,수레바위산 3.4km,만연산4.9km) - 지장산 -나무계단 -암봉 -수레바위산(정상표시 없음,소나무 작은 바위) -삼거리(정상 0.7km, 너와나의 목장1.5km, 만연산정상다녀왔다 너와나의 목장으로) -능선사거리 -만연산 -다시 삼거리 -너와나의 목장 -목장길도로따라 위로 -이정표(장불재방향으로) -너덜경의 약수터 -능선삼거리(너와나의목장 1.8km, 좌 장불재2.3km, 우 안양산3.6km)-백마능선 -안양산 -다시 되돌아서 백마능선 -능선삼거리 -장불재(입석대0.4km, 서석대 0.9km) -입석대 -서석대 -중봉 -중머리재 - 용추봉(830) - 새인봉(608)- 운소봉(610) -증심사 주차장(안양산~장불재 약 1시간30분 소요)

 

산행구간 : 중심사종점-새인봉-서인봉-중머리재-중봉-서석대-입석대-장불재-안양산-휴양림(둔병재)

산행거리 :  12.5km

산행시간 :  4시간 30

 

무등산 누에봉 서석대 세인봉(무등산옛길)

일시 : 2010. 1. 31                                            

 산행코스 : 산수동오거리 -무등파크맨션앞(무등산옛길) -> 잣고개 -> 청풍쉼터 ->충장사 - 원효사(입구부터~원효사까지 7.75km ->꼬막재 ->누애봉 ->서석대 ->장불재->중머리재->약사사삼거리 ->세인봉 ->증심사주차장

산행시간 : 오전08:30 ~~ 오후430 (8시간)

 산행거리 : 2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