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백담사~봉정암~오세암~백담사
2011.10.11.화요일 맑음
참석인원 : 4명 한여사,박여사,악당,나
청주 3:00 -문막휴게소 4:17 ~4:28 -용대리주차장 6:00 ~6:54 -백담사 7:10 -영시암 8:07 ~8:15 -수렴동 8:38 -백운계곡입구 9:38 -대청봉 4.5km전 이정표(구조10-24)(첫번째 폭포위) 10:06 -쌍폭 10:25~10:40 -봉정골입구 11:18 -사자바위 11:35 ~11:43 -봉정암 11:55 ~12:30(중식) -가야동계곡 12:40 ~12:57 -고개(오세암 2.1km지점) 13:20 -고개 14:40 -고개 14:54 -고개 15:13 -고개 15:30 -오세암 15:38 -고개 15:52 -고개(영시암 1.4km, 오세암 1.1km)(구조 01-12) 16:10 -영시암 16:38 ~16:57 -귀때기골 입구 17:35 -백담사 18:02 ~18:18 -용대리 18:32~18:50 -여주휴게소 20:40 ~20:45 -서청주톨게이트 21:35 -청주집 21:45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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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690 033-462-6969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 690년(신문왕 10년)에 불타버려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 이때의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가 있었는데 주위의 산에 짐승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산수가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라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노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며,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려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전으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 6번째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다.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백과사전
봉정암 [鳳頂庵]
강원 인제군 북면 설악산(雪嶽山:1,708m) 소청봉 북서쪽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인 백담사의 부속암자이다. 대표적 불교성지인 오대적멸보궁(五大寂滅寶宮) 가운데 하나로 불교도들의 순례지로서 유명하다. 대청봉 산마루 가까이에 있는데, 해발고도 1,244m 지점에 있어 백담사와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기 위한 산행은 매우 힘겹다.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에 정좌하고 있는 봉정암은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가섭봉·아난봉·기린봉·할미봉·독성봉·나한봉·산신봉이 감싸고 있다.현존하는 전당은 법당과 요사뿐이다. 법당 옆 바위 위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된 봉정암석가사리탑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을 따른 이 오층석탑은 부처의 뇌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여 ‘불뇌보탑’이라고도 부른다.다른 사찰의 여느 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고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다. 이 자연암석에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엽씩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가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맨 위에는 연꽃인 듯한 원뿔형 보주가 높이 솟아 있다.643년(신라 선덕여왕 12) 자장(慈藏)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창건하였다. 원효·보조 등 여러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677년(문무왕 17) 원효가, 1188년(고려 명종 18) 지눌이 중건한 것을 비롯하여 6·25전쟁 이전까지 7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화재로 자칫하면 명맥이 끊어질 뻔하였다.
봉정암 석가사리탑 [鳳頂庵石迦舍利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의 암자 봉정암에 있는 석탑.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76
고려시대 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1호
1971년 12월 17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설악산 대청봉 아래 봉정암에 있는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석탑이다.해발고도 1224m 고지에 있는 봉정암은 백담사에 딸린 암자로,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자장율사 (慈藏律師)가 당나라에 건너가 도선(道宣)율사로부터 수계한 후 가사와 발우 및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를 나누어 받아가지고 돌아와 동왕 12년(643) 이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봉정암이 한국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 불리는 연유이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을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하는 곳이다.
석탑은 봉정암 오른쪽 암벽 뒤에 세워져 있다. 거대한 암벽을 지대(地臺) 겸 기단으로 삼아 복련(覆蓮)받침 위에 초층탑신을 세운 5층 석탑으로, 옥개석과 탑신석을 각각 1매석으로 쌓아올린 일반형이다. 2층 이상의 탑신의 높이는 비슷하면서 탑신과 옥개의 폭이 4/5 정도의 비율로 줄어들어 균형을 이룬다. 옥개받침은 3단이고 낙수면과 옥개받침의 두께가 비슷하며 옥개석은 두터운 편이다. 자장이 세웠다고 하지만 이러한 각부의 작풍(作風)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탑으로 추정된다. 탑의 모양이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고 정교한 균형비가 돋보인다.
[출처] 봉정암 석가사리탑 [鳳頂庵石迦舍利塔 ] | 네이버 백과사전
오세암 [ 五歲庵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22-33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설악산 만경대(萬景臺)에 있는 절.
역사적 변천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普雨)가 중건하였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88년(고종 25)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하였다. 당시 법당을 2층으로 짓고 박달나무로 기둥을 세웠는데, 매끄럽기가 부드러운 명주옷으로 문질러도 결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내용
이 절은 수선도량(修禪道場)인 동시에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손꼽힌다. 아늑한 맛으로는 설악산 내 사찰들 중에서 제일이며, 많은 고승들이 주석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머물렀던 곳이고, 조선 중기 불교의 부흥을 꾀하다 순교한 보우가 수도하였으며, 근대의 고승이자 시인이요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렀던 곳이다. 특히, 김시습과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면서 『십현담(十玄談)』의 주석서를 쓴 것은 매우 유명하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승방ㆍ객사, 새로 지은 산신각이 있고, 옛 절터가 근처에 있어 석물(石物)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약 2㎞ 떨어진 곳에는 마등령이 있다.
설악산 오세암과 만해 한용운
근대사에 만해 한용운스님 만큼 뚜렷한 족적을 남기신 분도 드물다. 스님께서는 1879년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 나셨으니 속명은 유천이며 호적에 등재인 이름은 정옥이다. 6세때에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1894년에는 16세 때에 갑오개혁과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18세 때인 1896년에 동학혁명에 가담한 후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선각자를 찾아 다니며 전국을 주유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설악산 백담사에서 김연곡 스님을 은사로 김영제스님을 계사로 하여 득도를 하여 봉완이라는 법명을 수지하게 된다. 용운이라는 당호는 1907년 건봉사에서 만화선사에게 전법을 하여 받은 당호이다. 이때 스님의 속납이 29세이며 1913년 35세때에 [조선불교월보]에 [승려의단결] [조선불교유신론]의 일부 원고를 기고하면서부터 만해라는 자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스님의 정확한 표현은 용운 봉완이다.
스님의 연보는 일일이 다 설명하기 보다는 오세암을 위주로 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1917년 스님은 오세암에서 화두를 참구하며 정진하던 중 갑자기 바람소리에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심하던 마음이 몰록 풀리면서 오도를 하였다.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挑花片片紅
남아도처시고향 기인장재객수중 일성갈파삼천계 설리도화편편홍
사나이 가는 곳마다 고향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그네 시름을 겪고 있는가?
한마디 큰소리를 질러 삼천대천세계를 뒤흔드니 눈 속에 복사꽃이 곱게 물들었네.
그때가 12월 3일 밤10경이라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1919년 3월1일 파고다 공원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불교측 대표로 스님과 용성진종스님이 참가를 하였다. 3.1운동 주도자로 옥중에 투옥되었으나 스님은 옥중에서도 3대원칙을 세웠다.
1.변호사를 대지 말 것
2.사식을 넣치 말 것
3.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
이것만 보더라도 스님의 기개가 절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투옥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르고 난 후 1926년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를 6월 7일 탈고 하였으며 8월 29일에는 스님의 대표 시인 “님의침묵”을 발표 하였다.
십현담은 중국 당나라 선승인 동안상찰이 조동종의 가풍과 수행자의 실천 지침서 등을 칠현율시 형식으로 노래한 10수의 계송을 엮은 책을 말한다. 매월당 김시습도 십현담요해를 발표 하였다. 오세암은 매월당 김시습, 허응 보우대사, 만해 한용운스님등이 수행하였던 도량이다.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오세암하고 십현담하고는 아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김시습 한용운 두분 다 오세암에서 십현담에 관해 주해를 냈으니 말이다.
암울한 이땅에 등불이 되셨던 스님은 1944년 6월 29일 66세의 일기로 세연을 다하여 심우장에서 입적하여 미아리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을 하였다.
님의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 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때에 떠날 것을 염려 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오세암 관음도량이다. 그리고 정토염불도량이다. 강원도 인제 북면 용대2리에 있는 오세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 말사이며 백담사의 산내암자이다.
오세암의 전설~~<부처가 된 5세 동자>
...<한 스님이 5살 먹은 어린 소년과 이 곳 암자에 머물고 계셨다.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날 스님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속초로 길을 떠나셨다. 이 때 암자에는 5일 분의 식량이 남아 있었으며, 스님께서는 “내가 만일 눈길에 막혀 5일만에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식량을 아껴 먹으면서 꼭 기다리라고” 소년에게 말씀하셨다. 많은 눈이 내린 탓에 암자 주위의 동물들도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암자를 찾았다. 소년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식량을 동물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소년은 굶주림에 지친 상태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하였다. 한 달 만에야 눈길은 뚫렸고 스님이 도착하셨다. 스님이 암자 문을 여니 “스님 이제 오셨어요?” 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미 소년은 숨진 상태였으며 생불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인조21년(AD1643)에는 설정대사(雪淨大師)가 다시 관음현신을 목격하고 중창불사를 편 후 절의 이름을 오세암이라 고쳤다. 이 과정에 너무나 유명한 오세동자의 전설이 생겨났다.
설정대사는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다. 대사는 어느 해 초 겨울날 월동준비를 하기 위해 마등령 넘어 양양의 물치장터로 가게 되었다. 어린 조카를 혼자 두고 가기가 마음에 걸려 며칠분의 밥을 지어 두고 법당안의 관세음보살을 가리키며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에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라고 신신 당부를 한 후 무거운 발길을 옮겨 양양으로 떠났다.
설정대사가 양양에서 장을 본 후 외설악 신흥사(新興寺)에 왔을 때 갑자기 폭설이 내리기 시작해 산길이 막히고 말았다. 대사는 조카가 걱정이 되어 조바심을 태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신흥사에서 그해 겨울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이른 봄 설정대사는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암자로 달려왔다. 그런데 경내에 다달았을 때 뜻밖에도 법당안에서 은은한 목탁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대사는 황급히 법당 문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는 굶어 죽은줄만 알았던 어린 조카가 목탁을 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있었고, 방안에는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대사는 어린 조카를 와락 끌어안고 어떻게 지냈느냐고 다그쳐 물었더니 관세음보살을 가리키며 "저 어머니가 와서 밥도 먹여주고 잠도 함께 자고 놀아도 주었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 때 홀연히 한 백의의 젊은 여인(白衣女人)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부처가 되었다(成佛)는 기별을 주고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다.
설정대사는 그 순간 관세음보살의 가피(加被)에 감격하고 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으로 살아나게 된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절을 중건하고 이름을 오세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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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리 6:00 ~6:54
가을날 설악의 단풍만한 것은 없다. 올해도 단풍이 이쁘게 들었다는 전언들이다. 올해도 마나님 단풍구경 한번쯤은 시켜 주어야 하기에 그래도 설악에서 단풍 좋고 편하게 다녀 올 수 있는 코스로 백담사에서 수렴동을 거쳐 봉정암을 들러 오세암으로 한바퀴 돌아 코스를 잡았다. 집에서 3시 출발한다고 하니 잠도 안자고 우째 가냐고 난리다. 나는 요시간에 가야 이쁜 단풍을 구경할 수 있으니 그리 알라하고 알람을 2시에 맞추어 놓고는 23시 반에 취침에 들어간다. 새벽 2시 알람소리에 깨어 세수 하고 이것저것 준비 하지만 오늘은 내는 크게 꾸릴 것이 없다. 가장 신경 쓰이는 먹거리를 마님이 하였기 때문이다.
새벽 3시 악당과 박여사가 도착하여 무리 없이 제시간에 출발을 한다.
서청주 톨게이트를 경유하여 중부고속도로 호법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문막 휴게소에서 한번 휴식을 취한 후 운전대를 악당에게 넘긴다.
문막에서 만종분기점을 경유 하여 중앙고속도롤 따라 홍천톨게이트를 빠져 나간 후 철정검문소를 지난 후부터 인제 까지 가는 동안 한숨을 돌리고 이후 얼마를 안가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는 용대리에 6시에 도착을 한다.
용대리에 도착을 하여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니 6:35분정도가 된다.
용대리에서 백담사행 첫차는 7시 출발이다. 백담사에서 용대리행 막차로 전보다 한시간을 늘려 오후 7시까지 운행한다.
전에 잠시 방심한 탓에 첫차를 못 탄 경험이 있기에 오늘은 일찍이 매표소 앞에 도착하여 앞에서 기다린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고 7시가 가까워지자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이지 않던 님들이 슬슬 나타나니 오늘도 잠시 방심한 님들은 첫차를 타지 못했을 것이다.
영시암 8:07 ~8:15
용대리에서 첫차가 7시 출발이나 6분 빠른 6:54분 출발을 한다. 단풍철을 맞아 서울 등 각지에서 승용차를 가지고 밤새 모여든 사람들이다. 좁고 가파른 길을 따라 버스는 잘도 달려 간다. 버스 창가에 스치는 붉은 단풍의 모습도 있고, 노란빛으로 변해 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좋다. 아직은 이곳까지 단풍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들이 쓸쓸함과 이제 또 한해가 지난다는 아쉬움과 함께 아름다운 빛만은 눈을 즐겁게 한다.
용대리를 출발한 버스는 15분후 백담사 앞 주차장에 도착을 한다. 하나둘 흩어져 위로 올라 가지만 가는 방향만은 같다. 우측으로 흑선동 계곡입구를 지나고 좌측으로 길골 입구를 지난 후 다시우측으로 귀때기골 입구를 지난다. 한참을 올라간후 곰골을 건너는 교량을 건넌 후 한동안 올라가면 영시암이 나온다. 영시암에 도착을 하니 따끈한 국화차를 내놓는 중이다. 은은한 향이 나는 국화차를 마신 후 봉정암으로 향한다.
쌍폭포 10:25 ~10:40
영시암을 출발하면 소나무 숲을 지나 나무계단을 오른다. 나무 계단 위 공원 지킴터가 있고 그 앞쪽으로 이정표가 있다. 좌측으로 오세암 2.5km, 우측으로 봉정암 7.1km, 지나온 백담사가 3.5km다. 서서히 올라설수록 단풍이 이쁘다. 영시암을 출발하여 23분 후 수렴동대피소에 닿는다. 예전의 허물어져 가는 대피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곳에서 공룡 능선쪽으로 올라가는 계속이 가야동계곡이다. 아직 이 계곡은 올라가 보지 못했다.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며 좌측으로 출입금지표가 세워져 있는 곳이 설악의 대표적인 능선인 용아 능선이다. 이제 등산로는 서서히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새파란 물이 흐르는 소와 하얀 암반이 깔린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주목나무 한그루가 등산로 변에 서있는 곳에서는 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쯔쯔가무시를 옮기는 꼬랑지가 몽땅한 들쥐도 있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다람쥐는 무슨 잘못을 했나 싹싹 손으로 빈다. 어쨌거나 마냥 즐거운 산행길이다. 대피소에서 꼭 한 시간을 오르니 우측으로 백운계곡 입구다. 이곳 앞쪽에 이정표가 있다. 백담사 7.4km, 대청봉 5.5km다. 영시암 삼거리에서 3.9km를 올라온 거리다. 이제 봉정암 까지는 대략 3km 정도가 남았다. 5분 후 다리를 건너고, 서서히 올라갈수록 좌우로 뾰족한 바위봉들이 눈에 들어 온다. 바위 스랩사이에 곱게 물든 단풍이 더욱 고와 보인다. 15분을 더 오르니 다시 다리가 나온다. 그 아래로는 커다란 폭포가 몇 층으로 흐른다. 다리를 건너 나무로 만든 통로를 따라 가면 다시 다리가 나온다. 아래쪽으로 좁다란 물길이 보인다. 그 아래로 몇 층으로 흐르는 폭포가 있다. 이제 좌우로 산기슭에는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제 대청봉이 4.5km 남은 거리다. 이정표가 있다. 백담사 8.4km, 구조 10-24지점이다. 나무통로길 옆으로 그리 높지 않은 폭포가 있는 곳을 지날때는 용아장성 쪽으로 너무도 이쁜 단풍이 시야에 들어 온다. 다리가 나오며 위쪽으로 긴폭포가 흐른다. 간신히 폭포 옆으로 붙어 사진 몇 장을 찍고 위쪽으로 오르니 쌍폭포 전망대다. 쌍폭포는 전망대에서는 한쪽밖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살짝 아래쪽으로 내려가 쌍폭포의 시원한 물과 가까이 하며 즐긴다. 사진도 몇 장 담았다.
사자바위 11:35 ~11:43
쌍폭포를 지나며 곧바로 이정표가 있다. 봉정암 1.6km, 백담사 9.0km다. 이제 봉정암 까지는 1시간여가 남은 거리다. 점점 오를수록 봉정암 부근의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소청아래 뾰족한 바위도 중청 쪽으로 길게 이어가는 계곡과 암릉들이 보인다. 바위벽에 간신히 붙어서 자라고 있는 고목은 몇 백년은 되어 보인다. 넘어지지 않고 견디는 저 힘은 얼마일까 궁금하다. 다리를 건너고 4분여를 더 가면 봉정골 입구 해발 1050m 지점이다. 봉정암 0.5km, 대청봉 2.8km, 백담사 10.1km가 적혀 있다. 이제 가파르게 올라서는 바위길이다. 이 곳 위가 깔딱 고개라고 하던가 모두가 힘겨워 한다. 점점 오르면서 경치는 좋아 진다. 300m를 15분 오르니 깔딱 고개다. 지금은 깔딱 고개라는 명칭이 안보이고 사자바위라고 쓰여 있다. 봉정암이 0.2km 남은 거리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오르면 사자바위다. 조망이 매우 좋은 곳이다. 봉정암을 몇 번을 왔건만 이제 처음으로 사자바위에 올라 와 본다. 지나온 계곡이 시야에 들어 온다. 봉정암주위로 바위들이 도열해 있고 중청의 둥그런 지붕이 보이며 그 아래로 길게 내려지는 계곡의 암반이 보인다. 줄줄이 정상 쪽으로 모여 드는 암릉들로 보인다. 사자 바위 앞에 서서 사진도 찍어 보고 계곡을 배경으로 사진을 담아도 본다.
봉정암 11:55 ~12:30
사자바위 위로 올라가 사진을 담고 나서 이제 사자바위를 뒤로 하고 봉정암으로 가니 아 ~~오늘도 하마터면 밥을 굶을 뻔했다. 주먹밥과 미역국을 주는데 몇 개가 남지 않았다. 에고 주먹 밥 한개 더 주머니에 넣다가 ㅎㅎ 망신살 뻗칠 뻔했네 ~~ 그래도 맛있게 먹었수 아자씨 ~~
식사가 끝나고 울마님은 법당에 인사 하러 가고 난 할 일이 없어 이곳저곳을 둘러 본다. 화장실위로 가서 사진도 담아 보고, 큰 법당으로 가서 사진도 담아 본다. 큰 법당 좌측으로 단풍이 너무 이쁘게 들었다. 선홍색 단풍빛깔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가야동계곡 12:40 ~12:57
봉정암에서 점심 한 그릇 얻어 먹고 이제 봉정암 사리탑을 거쳐 오세암으로 향한다. 사리탑에 오르니 불공을 드리는 몇몇이 있고 사리탑에서 보는 조망이 좋다. 봉정암 일대와 용아능, 공룡 능선이 한꺼번에 보이는 곳이다. 용이 뾰족한 이빨들이 드러내고 하늘을 쳐다 보고 있다. 반대편에 있는 공룡을 잡아 먹을 듯이 말이다. 이제 오세암까지는 4km의 거리다. 가파른 봉정암고개를 내려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숨가쁘게 올라서는 님들이 안타깝게 보인다. 내도 오를때는 저리 힘들었을 긴디 ~~ 서로 반가이 인사를 나누고 지나친다. 점점 더 멀어지는 님들 또 다시 다가 오는 님들 이곳으로 오고 가는 님들은 많지는 않다. 가파른 계곡을 내려서 거의 평탄선길에 닿을 즈음 요란한 굉음이 봉정암 쪽에서 멈추지를 않는다. 분명 무슨 일이 났다 싶다. 모두가 무사하길 빈다. 마침 이글을 쓰는 지금 같이 간 악당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제 그 헬기요 용아에서 한명 떨어져 숨지고 한명 중태래요 ~~안타까운 소식이다. 아무사고 없이 좋은 곳 다녀 갔으면 좋았을 걸 이래서 용아에 접근을 막는 것이리라~ 아니면 몇 군데 안전 팬스를 쳐서라도 등산로를 개발을 하던지 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싶다. 여기에 용아가 있는 한 아무리 막아도 도전하는 님들은 또 있을 것이니 말이다. 여기도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 움푹 패인 곳이 있다. 요런곳 그냥 못 지나가는 나다. ㅎㅎ 또 한방씩 기념으로 남기고 가야동 계곡 아치형 다리에 닿으니 봉정암에서 한 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이다.
오세암 15:38
가야동 계곡의 화려한 단풍나무에서 이쁜 사진 만들기를 하고 과일로 간식을 먹고 오세암으로 출발을 한다. 이정표가 있다 봉정암 1.5km, 오세암 2.5km다. 이곳에서 공룡으로 올라가는 샛길도 있다. 출입금지 팻말이 있는 곳. 이제 나무계단이 나온다. 이곳을 오를 때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곳의 단풍은 참으로 곱다. 긴 계단과 고운단풍이 너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고갯마루에 이정표가 있다. 오세암 2.1km다. 고갯마루에도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고개를 내려서고 다시 오르고 고갯마루 20분이 소요 되었다. 다음 세 번째 고갯마루는 14분이 소요되었고, 다음 네 번째 고갯마루를 넘는 데는 19분이 소요되었다. 쉬엄쉬엄 단풍에 도취해서 가자니 시간이 거리에 비해 많이 걸린다. 마지막 고개를 17분이 걸려 넘고 나서 오세암 까지는 8분이 소요되었다. 고개 하나하나를 넘을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는 곳이다. 설악의 단풍이 곱기로 여기 만한 곳이 또 있겠는가!! 다른 곳이야 멀리서 바라보는 단풍이지만 이곳을 만져보고 맡아 보고 느끼며 가까이서 스치며 지나는 단풍길이다. 오세암에서 마등령까지는 1.4km로 아주 가까운 거리다. 오색에서 대청을 거쳐 공룡등줄기를 타고 이곳으로 하산을 하는 코스도 좋을 것이다. 오세암에는 잠을 자려는 많은 신도들이 몰려와 있다.
영시암 16:38 ~16:57
오세암에서 영시암으로 가는 길에는 등이 매달려 있다. 첫 번째 고개를 넘고 나서부터는 이 등은 없다. 고개를 넘어 다시 평탄한 길을 한참을 가면 두 번째 고개에 닿는다. 공룡 능선쪽으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 그곳으로 오른 것인지는 모르지만 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내려서면 몇 아름씩 되는 전나무가 많다. 이정표 하나를 지나고 또 구멍이 뚫린 커다란 전나무를 지나 두 번째 고갯마루에 닿는다. 이정표가 있다. 오세암 1.1km, 영시암 1.4km다. 이 고개를 지나 8분 후 마지막 고개에 닿는다. 여기에 서있는 구멍이 여기저기 뚫린 나무도 특이하다. 조각을 한듯하다. 이 고개를 지나며 부터는 더 이상의 고개는 없다. 영시암까지 계속 내리막 길이다. 내려서면서 영시암 0.9km가 적힌 이정표가 하나 더 있고 영시암전 봉정암으로 가는 삼거리에 닿은 후 계단을 내려서면 영시암에 닿는다. 영시암에 먼저 도착한 악당은 법당에 인사를 마치고 막나오는 중이다. 영시암에서 보기에는 맛없어 보이는 씨래기국에 밥을 말고 쓰레기 김치를 넣어 먹는 맛도 참좋다. 어떤 이는 뚜껑을 열어 보고는 그냥닫고 말았다는 애기를 들었다. 성의를 무시하는 처사다. 그런 분 절대로 남을 위해 보시를 절대로 못할 분이다. 감사히 맛있게 잘 먹고 갑니다. 스님들 ~~
백담사 18:02 ~18:18
영시암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두 여사님들까지 밥 얻어 먹고 가니 가면서 저녁 먹을 근심은 덜었다. 이제 시간도 넉넉하니 더 이상 보채지 않아도 되겠다. 난 미움 살라고 보채는 줄 알지만 ㅎㅎㅎ 막차 놓치면 요런 걸음이라면 2시간도 더 걸어서 간단 말입니다. 어쨋던 이제는 길도 좋고 거의 평탄선길이니 걱정업이 백담사로 향한다. 올라올 때 1시간이 좀 더 걸렸으니 그 시간이면 내려가지 않겠나 싶다.곰골 입구까지 30분이 조금 덜 걸리고 더 내려가 이제는 귀때기골입구를 지나 길골을 지나고 백담사 가까이 있는 흑선동 계곡을 바라보며 좀 더 내려오니 오늘의 마지막 지점인 백담사다. 백담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10여분을 기다리니 차가 만차가 되고 이제 차가 출발을 한다.
용대리 18:32 ~18:50
백담사에서 출발을 하여 내려가는 길에는 어둠이 깔려 올 때 보았던 좋았던 경치는 볼 수가 없다. 15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버스는 용대리에 도착을 한다. 이용해 주시어 고맙다는 기사님은 끝으로 잊으신 물건 없으신지 다시 한번 살피시고 안녕히 가시란 멘트로 오늘 일과를 마감한다. 내리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안녕히 가시라 인사도 잊지 않는다. 기사님 수고 하셨습니다. 내년 단풍 때 또 뵙겠습니다. ~~~
이렇게 하여 오늘 설악의 붉게 물든 단풍을 눈에 담고는 이제 집으로 향한다.
용대리를 출발하여 여주휴게소에서 한번휴식을 취한 후 청주에 도착을 하니 3시간이 흘렀다. 올해도 무사히 아주 좋은 설악의 단풍을 보고 왔다.
같이한 마나님, 박여사님, 악당 모두 수고 많았다오 ~~~
청주 ~용대리 ; 3시간 소요
백담사 ~봉정암~오세암~백담사 : 11시간소요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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