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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0440 아차산285m~용마산342m~망우산281m (서울.구리)2009.9.5.토요일 맑음

아차산285m~용마산342m~망우산281m (서울.구리)

2009.9.5.토요일 맑음

참석인원 : 흥기랑 둘이서

 

조치원 7:18 -천안 7:43-서울 8:55 -종로3가역 -광나루역 9:55 ~11:00 -아차산 고구려 역사문화홍보관 11:17 -아차산 정상석 11:25 -아차산성 11:35 -구리.광진구고개(낙타고개) 11:45 -고구려정(팔각정) 11:50 -해맞이전망대 11:55 -아차산(제4보루) 12:14 -용마산제2헬기장(삼거리봉) 12:28 -용마산정상 12:38 ~12:55(중식) - 다시 용마산 제2헬기장(삼거리봉) 13:00 -망우산제1보루 13:22 -망우산 13:40 -산불감시초소 13:48 -망우리묘지관리사무소 14:04 -상덕마을입구 신호등(망우리고개) 14:15 -큰마우리고개(57사.용마부대입구) 14:45 -능선안부사거리 15:13 -능선삼거리 15:20 -새우개고개 15:30 -육사후문 15:55 -봉화산역 16:15 ~16:18 -석계역 -지하서울역 16:56 -지상서울역 17:00 ~17:05 -천안역 18:17 -조치원역 18:37 -청주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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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이 산에는 백제 시대에 건축된 아차산성이 있으며, 이 성은 현재 백제의 도성으로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풍납토성과 마주보고 있다. 아차산은 야트막한 산이지만, 삼국시대의 전략요충지로 특히 온달장군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학문적 고증과는 상관없이 이 지역 주민들은 온달장군이 아차산에서 전사했다고 믿고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차산에는 ‘온달샘’이라 불리는 약수터와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지름 3m의 거대한 공기돌이 있다.

대성암 뒤에는 의상대사가 수련을 했던 곳으로 알려진 천연 암굴이 있어 눈길을 끈다. 이밖에 석곽분, 다비터, 봉수대, 강신샘 등이 있다

1950년대까지 한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이곳에 있었고, 쉐라톤 워커힐이 이곳에 지어진 이유도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 때문이었다. 호텔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에는 고급주택가가 조성되었다

 

아차산성(阿嵯山城 / 阿且山城)은 사적 제23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아차산은 해발 285m로 서울 광진구 광장동 한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가 광주에 도읍하였을 때 고구려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쌓은 큰 성이다.

 

아차산 생태공원의 입구아차산 생태공원은 2,307,345m²의 면접으로 조성된 자생식물원이다. 주차장과 바로 위쪽에 조성되어 있으며, 아차산 등산로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아차산의 전설

이조 명종연간에 홍계관이라는 이름을 가진 점쟁이가 있었다고 한다. 족집게처럼 집어내서 맞출 만큼 용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그의 집에는 점을 치려고 몰려드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힘이 없어 억울하게 당한 무지랭이로부터 아픈 사람, 도둑맞은 것이 있는 사람, 소받맞은 아낙네들에 이르기까지 속시원한 말을 들어보려고 찾아드는 사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졌다. 나중에는 그에 대한 소문이 궁중으로까지 퍼져 상궁 나인들까지 찾아다니게 되자 마침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숭유억불의 기치를 내걸고 나라를 열었던 조선조의 임금으로서는 그런 점쟁이를 혹세무민하는 무리로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명종은 어명을 내려 혼계관을 잡아들인 다음 쥐가 든 상자를 하나 내놓고 물었다.

“네가 용하다니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 맞혀 보거라. 만약 틀리게 말하면 얕은 재주만 믿고 세치 혀를 놀려 우민을 속인 죄로 너를 엄히 다스릴 것이니라.”

추상같은 어명이 떨어지자 골똘하게 생각을 하던 홍계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쥐가 들어 있는 줄로 아뢰옵니다. 상감마마.”

임금은 상자 안에 쥐가 들어 있는 것을 알아맞히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여겼다.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듣고 판단할 수 있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수효가 얼마인지를 맞추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상자 안의 쥐가 모두 몇 마리인지도 능히 알렸다!”

다시 생각에 잠겼던 홍계관이 입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모두 열두 마리의 쥐가 들어 있는 줄로 아뢰옵니다.”

“모두 열두 마리라고 했느냐?”

“그렇사옵니다.”

“네, 이놈. 상자 안에 쥐가 들어 있는 것은 맞지만 열두 마리가 아니라 암수 두 마리이니라.”

상자를 여니 과연 열두 마리가 아니라 단지 두 마리의 쥐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네, 이놈! 너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혹세무민하였다. 이러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더냐?”

“마마 죽을죄를 졌사옵니다.”

불같이 화가 난 명종은 홍계관을 사형시키라고 명하고 만다. 상자 안에 갇혀 있던 쥐 중에 암놈이 새끼를 낳은 것은 어명에 따라 홍계관이 참형을 당할 장소로 옮겨졌을 때였다. 신하로부터 암놈 쥐가 열 마리의 새끼를 낳아 상자 안에 홍계관의 말대로 쥐 열두 마리가 들어 있었다는 보고를 받은 명종은 탄복을 했다.. 암놈의 뱃속에 들어 있는 쥐새끼 숫자를 귀신이 아니고야 어떻게 알아맞힐 수 있단 말인가. 잘못이 없는 것으로 밝혀진 홍계관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임금은 즉시 사형을 중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홍계관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던 장소가 지금의 아차산 밑이었다. 어명을 받든 산하가 급히 말을 몰고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어명이니라. 사형집행을 중지하라.”

망나니는 선뜻 목을 향해 칼을 내려치지 못하고 휘두르고만 있었다. 이때 어명을 받든 신하가 달려오며 무엇인가 소리를 지르자 사형집행을 늦추는 것을 책망하는 줄로 생각하게 되었다. 망나니는 더 이상 늦추었다가는 문책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지체 없이 홍계관의 목을 향해 칼을 내려치고 말았다.

“아뿔사!”

사형을 중지하라는 것을 속히 집행하라는 것으로 오해하여 아차하는 순간 홍계관의 목이 달아나고 만 것이었다. 그로부터 홍계관의 사형집행에 이루어졌던 곳의 산 이름을 아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일찍이 한강을 끼고 지금의 광주에 해당하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던 백제는 아차성에다 방어선을 구축하였지만 바로 그곳에서 백제의 개로왕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참살 당하는 비극을 겪고 만다. 서기 475년의 일이다. 그 후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퇴장하여 무대를 웅진과 사비로 옮겼다가 멸망을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한성에서 백제를 몰아낸 고구려는 아차성에다 보루들을 만들고 이곳을 남하정책의 전진기지로 삼았었다. 그로부터 1백년이 흘렀을 즈음 전략적 요충지인 아차성을 신라에게 빼앗기게 된다. 그것을 되찾기 위해 출정했던 고구려 장수가 평강왕(평원왕)의 부마인 온달이다. 그 온달이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쓰여 있다. 죽은 온달을 장사 지내려고 했지만 공주가 오기 전까지 시신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평민 출신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가 나누었던 애틋한 사랑이 희로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만 것이었다. 그 아단성이 지금의 아차산성(阿且山城)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을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이라고 여기는 측에서는 아단성이 단양일각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백제 초기부터 아차성을 아단성으로 부른 기록이 많기 때문에 지금의 아차성이 아단성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도 백제를 공격하여 차지한 아단성에 대한 내용이 암각 되어 있다.

단(旦)이 어떤 경로로 해서 차(且)가 된 것일까. 사학계에서는 그 원인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연관 지어 풀어낸다. 바로 태조의 자가 아단이기 때문이다. 조선 같은 전제국가에서 임금의 이름과 동일한 산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것은 불경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단과 비슷한 모양의 차로 개명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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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역 9:55 ~11:00

오늘 광나루역앞에 있는 치과에 가는날이라 겸사겸사 해서 아차산~용마산~망우산을 거쳐 오리라 맘먹고 조치원역에서 7시 18분차를 타고 출발한다.

천안에서 같이 가기로 한 흥기가 타고 ~

서울역에서 내려 지하서울역으로 이동한후 종로3가역에서 5호선으로 환승 한 후 광나루역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 못된다.

10시가 되어 한시간 동안 치과 치료를 한후 11시 광나루역을 출발한다.

아차산(제4보루) 12:14

광나루역에서 다음 골목으로 들어가 학교가 있는 쪽으로 올라서면 아차산 생태공원이 있고 그안쪽으로 고구려역사문화 홍보관이 있다. 이곳에서 다시 나와 큰길로 나오면 커다란 아차산 정상석이 입구에 놓여 있다. 이렇게 정상석이 산아래 입구에 있는 곳은 몇군데 있다. 적상산등이 이에 속한다.

오늘이 휴일이라 많은 산객들로 만원인 아차산 등산로는 처음엔 걷기 조차 힘들정도로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로 어깨가 부딪친다.

첫 번째 이정표에 아차산까지 1840m로 나와 있다.

얼마안가 토성으로 된 그옛날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로 용맹을 날리던 온달장군이 죽령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이 아단산성 밑에서 싸우다 화살에 맞고 전사햇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는 아차산성을 지난다.

아차산성에서 10여분이면 광진구와 구리로 넘나드는 낙타고개를 지나고 이후 조금 올라서면 바위능선에 팔각정인 고구려정이 날렵하게 서있다. 이 고구려정엔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하며 그위엔 책등이 구비 되어 있는 듯하다.

고구려정에서 바위능선을 따라 올라서면 능선옆으로 한그루의 어여쁜 소나무 분재가 있고 그위로 해맞이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보는 한강과 그주변으로 솟아 있는 검단산,용마산,예봉산등의 모습이 조망된다.

이후 능선을 따라 제1보루,5보루를 거쳐 지금 한창 복원공사중인 아차산 정상인 제4보루를 지난다.

 

용마산 12:38 ~12:55

아차산 정상인 제4보루옆을 지나 조금을 내려서면 긴고랑계곡으로 하산하는 입구를 지나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산이 적어 오래 오르진 않치만 오늘 몹시 더운날씨로 인하여 땀은 많이 흐른다.

5분여를 이렇게 힘들여 오르면 용마산과 아차산 ,망우산으로 갈리는 삼거리봉인 헬기장에 닿는다. 헬기장에서 직진을 하면 망우산이지만 좌측으로 있는 용마산을 잠시 다녀 오기로 하고 500m 거리의 용마산으로 이동을 한다.

헬기장을 하나 더지나고 내려선후 다시 오르면 체육시설이 있는 위쪽의 용마산 정상에 오르게 된다. 용마산 정상에도 정상석은 없고 성동구청에서 세운 삼각점많이 우리를 반긴다. 이곳에 홀로이 서있는 바위엔 348m라 세겨져 있으며 단석산 정상의 바위마냥 반으로 동강이 나있다.

용마산 정상아래 한적한 곳에 자리를 틀고 간단히 준비한 빵으로 곡간을 채운다.

 

망우산 13:40

용마산에서 제2헬기장인 삼거리봉을 다시 거친후 능선을 따라 가면 몇분을 못가 커다란 돌탑이 2기 나온다. 한기는 완성이 된것이고 한기는 아직 미완성의 돌탑이다.

10여분후 중랑구와 아치울마을로 하산하는 지점을 지나고, 다시 10여분후면 망우산 제1보루를 지난다. 5분후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감시초소 아래 이정표엔 용마산,망우공원묘지.백교마을.시루봉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있으며 시원한 그늘아래 많은 무리가 쉬면서 동동주로 목을 축이고 있다.

다시 2분후면 순화도로가 나오며 이순환도로를 따라 갈수도 있고, 능선길로 갈수도 있으나 능선길옆으로 이어지는 길도 산소길로 산행을 하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순환도로에서 10분을 좀 못가 산소에 둘러 쌓인 삼각점이 있으니 이곳이 망우산 정상이다. 그옆으로 망우산 제2보루가 있다.

보루란 : 적의 침입을 막기위하여 돌이나 흙등으로 튼튼히 쌓은 구축물을 말한다.

망우산정상을 지나 15분정도를 진행하면 길은 순환도로로 내려선다. 이곳에서 형제약수로 가는길과 공원관리사무소로 가는 길이 갈린다.

이곳에서 공원관리사무소까지는 8분여가 소요 되었다.

 

육사후문 15:55

공원관리사무소를 지나 10여분을 나오니 망우리고개다. 여기서 길을 건너야 하나 차량이 많이 지나고 중간분리대가 있으니 그냥 건너긴 곤란하다.

우측으로 3분여를 가니 상덕마을 입구에 신호등이 있다.

이신호등의 신호를 따라 길을 건넌후 직진을 하여 절입구를 통하여 능선으로 오른후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30여분을 진행하니 이제 갈길이 없다. 어케 가야 하나 한동안 궁리를 하다 보니 고개위로 커다란 간판이 걸린 세멘 구축물이 보인다. 멀리서 볼땐 그곳을 통하여 지나면 되겟거니 생각햇지만 가까이 가니 그곳으로 지날수가 없다. 다시 생각다가 가느다란 흔적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서니 아하 저것이구나 저것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섯구나 하는 생각에 미쳐 그곳으로 가니 아주 가파른 긴 스텐으로 만든 사다리가 있다. 많이 다니질 않아 낙엽도 쌓이고 하여 조심조심 내려선후 마지막 둥근 원통형 사다리를 통과 한후 큰길로 내려서니 부대로 올라서서 길을 건너는 다리가 있다. 이곳이 큰 망우리 고개로 한쪽엔 52사가 반대쪽엔 용마부대가 진을 치고 있다.

 

이고개를 건너 다시 능선을 찾아 가려니 이것도 마땅치가 않다. 간신히 길을 찾아 가니 무서운 견공이 앞을 막고 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는다. 다시 돌아 나와 위쪽으로 오르니 또다시 철조망길을 따라 한없이 가야만한다.

30여분후 포크레인 작업을 한 지점의 능선사거리를 지나고 다시 서서히 7분을 올라서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삼거리에서 길이 어디로 갈까 망설여 진다. 아무래도 왼편으로 길을 잡아가야 할듯하여 길을 잡아 가니 10분후 터널공사로 한창 엉망진창인 새우개 고개에 닿는다. 이곳에서 새우개동네로 접어 들어 다시 능선을 타고 가니 이윽고 육군사관학교 후문이 나온다. 아뿔사 잘못왓구나 이제사 한탄한들 무엇하랴 새우개 고개에서 이리저리 갈길을 찾아도 나오지 안는 길은 어디로 난것일까?

새우개고개 정상부 길건너엔 담이 쳐져 능선으로 붙을수가 없었고. 새우개 동네에서 능선으로 올려 붙였을때도 길은 이곳뿐이 없엇다.

이제사 생각하건데 그냥 길을 따라 퇴계원쪽으로 진행을 하다가 능선으로 접어 들어야 햇어야 했구나 하는 생각이다. 이렇게 하여 오늘 담터고개까지 가려던 계획은 새우개 고개를 지나 육군사관학교 후문에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오늘도 엄청 더운날씨에 같이 산행에 동참한 흥기 동상 고생무지 많았다우~

다음엔 쉽고. 길도 찾기 간단한 그런곳으로 가도록 합시다.

 

산행거리 : 약 13km

산행시간 : 5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