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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0923 보성,순천 제석산~시루봉 2016.03.13.일요일 흐린후 약한비

보성,순천 제석산~시루

2016.03.13.일요일 흐린후 약한비

참석인원 : 충북뫼벗 산악회 32

 

청주 종합운동장 06:00 -서청주 톨게이트 06:25 -오수휴게소 8:00~8:10 -보성군 벌교읍 홍교 09:20 ~09:25 -운동기구봉(0.87km, 해발 176m) 09:50 -안부 삼거리(우측 하산로, 1.29km, 115m) 09:57 -삼거리(우하산로, 1.36km, 115m) 09:58 -운동기구 삼거리(우 태백산맥 문학관, 1.7km, 160m) 10:04 -임도사거리(2.0km, 208m) 10:08 -약수터(우측으로, 2.13km, 240m) 10:13 -338(좌측 우회길 있음, 3.45km) 10:37 -이정표 사거리(3.54km, 370m) 10:39 -신선대(4.07km, 531m) 11:05 -제석산 정상(4.42km, 560.3m) 12:22 -능선상(4.53km, 535m) 11:25 ~11:47(중식) -헬기장(4.76km, 560m) 11:51 -임도따라 -우측 임도삼거리(5.61km, 430m) 12:07 -남도목장 임도 삼거리(동화사 좌측으로, 5.75km, 435m0 12:11 -남도목장 위 능선으로 -493(6.30km, 트랭글 호사산으로 잘못 나옴) 12:25 -남도목장 건물위쪽 임도(6.62km, 445m) 12:35 -능선으로 임도따라 -임도끝 12:38 -능선으로 -시루봉(삼각점, 7.55km, 382.1m) 12:54 -소리재(우측넘어로 힐사이드 골프장, 좌측 편백나무 숲길따라 하산, 7.96km, 307m) 13:00 -비닐하우스 농장(8.32km, 245m) 13:08 -동화사(9.0km) 13:20 ~13:32 -낙안읍성 13:53~15:09 -벌교식당(태백산맥꼬막집) 15:25 ~16:20 -오수휴게소 17:32 ~17:43 -죽암휴게소 19:05~19:15 -청주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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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

1963 1 21 보물 304호로 지정되었다.길이 약 27m, 홍예(虹霓) 높이 약 3m. 3칸의 홍예를 연결, 축조한 석교이다. 이 홍교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에 있는 선암사 승선교(仙巖寺昇仙橋:보물 400)와 함께 그 구조 형식이 가장 뚜렷하다. 홍교는 다리 밑이 무지개처럼 반원형으로 쌓은 다리를 말하는데, 홍예교·아치교·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벌교라는 지명은 예전에 이곳에 있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하였다. 이 홍교는 원래 조선시대인 1718(숙종 44)에 당시 낙안현(樂安縣)의 주민들이 현지에 강과 해류가 교차하는 곳에 원목을 엮어 만든 뗏목다리를 놓았는데, 1728(영조 4)에 전라남도 지방의 대홍수로 이 다리가 무너져서 1729년 선암사의 초안선사(楚安禪師)가 석교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1734년에 완공되었으며, 그뒤 1737년에 다리를 다시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 다리가 만들어졌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보수공사를 하면서, 홍예의 밑부분과 석교 외벽의 시멘트를 제거하고 모두 화강암으로 교체하여 원형을 되찾았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폭 4m, 길이 80m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정된다.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가운데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표현하였다. 다리 밑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다리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지금까지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다리이다.

 

벌교 홍교

벌교는 보성군의 동남쪽 끝에 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곧 고흥반도이고 동쪽 순천만의 한 끝이 읍내의 벌교천 하구에 닿아 있다. 벌교 홍교는 벌교천 위에 걸쳐진 세 칸 무지개 다리를 말한다. 전체 길이 27m에 높이는 약 3m, 폭은 4.5m이며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벌교 홍교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콘크리트 다리와 덧이어져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이 다리는 조선 영조 5(1729)에 순천 선암사 승려인 초안(楚安)과 습성(習性) 두 선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선암사에는 숙종 때 만들어졌다는 유명한 승선교가 있으니, 벌교 홍교를 만드는 데 선암사 홍교가 참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리를 놓아 모든 사람이 편안히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은 불교에서 중요하게 꼽는 보시 가운데 하나다. 이 때문에 예전 승려들 가운데는 다리 축조 기술자가 많았는데, 절뿐 아니라 민간 지역의 다리 가운데도 승려가 놓았다는 것이 여러 개 남아 있다.벌교(筏橋)라는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홍교1)가 놓이기 전에 이곳에는 주민들이 뗏목다리를 놓고 건너다녔는데 걸핏하면 다리가 떠내려가서 불편이 많았다고 한다. 홍교는 만들어진 지 8년 만인 영조 13(1737)에 중수되었고 헌종 10(1844)에 크게 개수되었으며 1984년에 마지막으로 중수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른다. 다리를 중수할 때마다 세운 기념비들이 읍내 쪽 다리 끝에 죽 서 있다.다리의 구조는 부채꼴 모양의 석재를 맞춰 홍예를 만들고 네모나게 가공한 석재로 홍예 사이의 면석을 쌓았으며 그 위에 밖으로 튀어나오게 멍엣돌을 걸치고 난간석을 얹은 후 판석을 깔아 다리 바닥을 만들었다. 홍예를 제외하고 각 홍예 사이의 면석과 난간의 축조 방식은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예전에 찍은 사진과 요즘 다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특히 면석 부분이 많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전에는 지금처럼 반듯반듯하게 가공한 돌이 아니라 막돌이 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홍예마다 아래쪽 가운데에 이무기돌이 박혀 물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처럼 다리 천장이나 멍엣돌 마구리 등에 동물이나 도깨비의 모양을 새겨 놓는 것은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옛날에는 벌교 홍교의 이무기돌 코끝에 풍경이 달려 있었다고 한다. 원래 맞은편 강 언덕까지 다리가 계속되어 있었는데 손상된 것인지, 처음부터 그만했던 것인지는 지금 단언할 수 없지만 세 홍예중에서 가운데 것이 양쪽 것보다 높은 점으로 보아 현재보다 대단히 길었다고 추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이 다리는 지금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으며 홍교에 덧이어 콘크리트 다리가 붙어 있다. 다리 밑에 가끔 백로가 지나가고 다리 위로는 자전거를 탄 학생이나 아이를 업은 엄마, 장난으로 실낚시를 하는 아이들도 왔다갔다 하는데, 옛 다리에 요즘 생활이 잘 어울려서 보기가 좋다. 벌교 사람들은 60년마다 한 번씩 이 다리에서 환갑잔치를 해주었는데 1959년에 6주갑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네이버 백과에서 옮김)

 

제석산 [帝釋山] 563.3m 전남 순천시 별량면 금치리

높이 563.3m이다. 바위봉우리가 빼어난 산이다. 이름은 불교용어 제석천에서 따온 것이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되며, 주변에 낙안읍성 민속마을 동화사·화포해변 등이 있다.

등산길은 여러 코스가 있는데, 동화사에서 시작해 세 갈래 길목이 나오면 왼쪽 임도에 들어서 능선을 타고 억새밭, 제석산 비석을 지나 정상에 오른 뒤 신선대를 거쳐 헬기장, 공동묘지를 지나 회정리로 내려오는 코스가 일반적이다.찾아가려면 순천역에서 벌교행 시내버스를 타고 금동마을 앞에서 내리거나, 순천시에서 대치마을까지 택시를 탄다

보성 벌교 태백산맥 문학관 개관

세계 최대 야외건식 옹석 벽화도 공개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인 전남 보성군 벌교읍 제석산 자락에 태백산맥 문학관이 지난 21일 개관했다.

군에 따르면 2003 태백산맥문학공원 기본계획을 수립해 그동안 현 부잣집 보수 등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회정리 364번지 일원에 대지면적 4,359.6,

연면적 1,375의 문학관 건립 공사를 마무리하고 개관식을 가졌다.

이날 개관식에는 작가 조 씨 부부를 비롯해 박태준 전총리, 이종상 화백, 김원 건축가, 프랑스어판 번역자인 조르주 지겔메이어 등을 비롯해 문학, 건축, 출판, 언론 등 각계 인사 1,000여명이 참여해 자리를 빛냈으며, 소리꾼 장사익이 사랑굿, 아리랑 등 축가를 불렀다.

특이 이날, 문학관 옹벽에 설치된 세계 최대, 최초의 야외건식 옹석벽화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원형상-백두대간의 염원벽화 제막식도 함께 열렸다.

이 벽화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현대 미술의 거장 이종상 교수가 제작한 것으로 문학 무대지를 포함해 지리산, 백두산, 중국, 인도 등지에서 채취한 3 8천 여 개의 자연석으로 이뤄진 벽화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문학관은 태백산맥이 관통하는 시대정신인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을 담아 북향으로 지어졌으며, 1, 2층 전시실과 5층 전망대를 갖춘 모던 양식으로 작업에는 건축가 김원씨가 참여했다.

문학관에는 1983년 집필을 시작으로 6년 만에 완결하고 이적성 시비로 몸살을 앓았으며, 그 유형무형의 고통을 겪고 분단문학의 최고봉에 올랐던 작가 조정래의 소설태백산맥에 대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소설 태백산맥 출간 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소설 태백산맥'이란 장으로 구성되고, 1 6천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한 623점의 증여 작품이 전시돼 있다.

부대시설로는 누구나 책을 볼 수 있는 북 카페와 작가가 직접 머무르면서 집필활동을 하게 될 작가의 방이 있어 타 문학관과 차별을 두고 있다.

 

동화사

정의

전라남도 순천시 별양면 대룡리 개운산(開雲山)에 있는 절.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1047(문종 1)에 의천(義天)이 창건하였다.

의천이 남쪽지방을 유람하다가 순천 낙안면에 이르렀는데, 동쪽 하늘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산 이름을 개운산이라 하였으며, 구름이 일어난 곳에 절을 짓고 동화사라 하였다.

동화사의 ()’은 오동나무로서 봉황이 깃든다는 나무인데, 전국의 현인군자를 봉황으로 비유하여 그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라는 의미라고 한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01(선조 34) 신총(信聰)이 대웅전을 중건하였고, 1630(인조 8) 계환(戒環)이 중창하였다.

1644년 유문(有文, 16141689) 등이 호선루(護禪樓)를 지었고, 1662(현종 3)에는 희안(熙安)이 호선루를 중건하였다. 1666년에는 삼신(三信)이 첨성각(瞻星閣)을 지었고, 의침(義琛)이 범종을 조성하였다. 1972년 무렵에 무너진 요사를 1990년대에 새로 지었고, 1984년과 1994년에 대웅전을 해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응진전·지장전·삼성각·천왕문·선당·범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의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다포계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문은 사각합빗살문을 달았다. 이밖에도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831호로 지정된 동화사삼층석탑과 속장경판본(續藏經版本) 135판이 있었다.

속장경판본은 1970 7 20일에 발견된 것으로 의천이 만든 것이며, 우리나라 인쇄사 및 불교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속장경판본은 동화사에 없고, 다만 1666년에 만든 30여 매의 경판이 전할 뿐이다.

 

낙안읍성

야트막한 산들이 감싸안아 분지를 만드는 자리에 돌담이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 역사 드라마의 촬영장을 찾은 것은 아닌지 잠시 착각하지만 이곳은 분명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이다. 수백 년을 거스르는 시간여행을 한다면 조상들은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낙안읍성민속마을은 과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마을이다. 조선 중기 만들어진 석성 내부로 행정구역상 세 개의 마을 100여 가구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마한시대부터 이곳은 삶의 터전이었다. 토성으로 담장을 둘렀던 마을은 조선 중기 북벌운동으로 유명한 임경업이 군수로 부임하여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현재까지도 허술한 담장 하나 보이지 않는 석성은 1.4를 이어가며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인위적으로 옛 모습을 갖춘 민속촌이나 명망 있는 양반들의 기와 가옥이 남아 있는 경우는 전국적으로 여러 곳이지만 초가집 노란 지붕으로 마을을 이룬 일반 백성들 삶의 터전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곳은 유일하다. , , 남 세 곳으로 자리하는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마을은 물레방아가 마을 공동의 물길을 따라 움직이고 장독보다 더 낮은 돌담만이 남방식 초가집 사이로 경계를 짓고 있다. 민속장터와 기념품점, 짚풀 공예와 길쌈, 대장간 등 옛 모습을 추억하는 체험코스 등이 찾는 사람들을 더욱 즐겁게 한다. 동헌, 객사 등 성 안의 옛 행정기관들이 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초가집들은 남방 특유의 툇마루가 발달한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민속학 자료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읍성의 모습을 갖춘 임경업 장군을 추모하는 비석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자리한다. 400년 이상의 세월이 깃든 마을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위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마을 주민들의 생활에 피해를 주지 않는 방향으로 옛 모습 그대로 가치를 보존하는 장소로 자리하기를 바란다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 전기의 읍성.

고려 후기부터 왜구가 자주 침입하자 1397(태조 6)에 낙안 출신의 절제사(節制使)인 김빈길(金贇吉)이 흙으로 성곽을 쌓았다.세종실록에는 1424(세종 6) 9월부터 성벽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원래의 규모보다 넓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축으로 고쳐 쌓는 작업은 1450년 경에 거의 마무리되었는데, 당시 성벽의 둘레는 2,865척이고, 높이는 평지에서 9.5척이지만, 높은 곳은 8.5척이었으며,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 420개로 높이가 2.5척이었다고 한다. 또한 성문은 3곳이었는데 옹성을 두지 않았고, 옹성과 성문을 지키기 위해서 성문 옆에 쌓은 네모난 적대(敵臺) 12개를 만들기로 하였지만 4개만 설치하였다고 전한다. 성 안에는 우물 2곳과 연못 2곳이 있었으며, 성 밖에 성벽을 둘러 판 해자(垓子)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옹성은 그 뒤에 설치되었고, 여장도 무너진 것을 다시 고쳐 쌓았지만 지금은 모두 무너져 없어진 상태이다.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모습은 성벽의 축조나 적대의 존재 등에서 조선 초기 성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읍성은 낮은 구릉을 포함한 평지에 동서 방향의 긴 장방형으로 자리하고 있다. 동문은 악풍루(樂豐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鎭南樓), 서문은 악추문(樂秋門) 등으로 불렸는데 터만 남아 있을 뿐이고, 옹성은 남문터와 서문터에서만 흔적을 볼 수 있다. 적대는 전하는 기록대로 동문터 좌우와 동북쪽·동남쪽 모서리에 각각 하나씩 있다.

성벽의 둘레는 1.385이다. 동문터의 남쪽 부분이 가장 잘 남았는데, 높이는 4.2m이고, 위쪽 너비와 아래쪽 너비는 각각 34m, 78m이다. 아래쪽에 커다란 깬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리면서 틈마다 작은 돌을 쐐기박음하였으며, 위쪽으로 갈수록 석재의 크기를 줄였다.

이 읍성은 가장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된 조선시대 읍성 가운데 한 곳이다. 특히 성 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984년부터 낙안읍성민속마을보존정비계획이 수립되어 보존을 위한 정비사업이 연차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네이버 백과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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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종합운동장 06:00

이번 산행은 보성벌교와 순천의 경계지역에 있는 제석산으로 간다. 바닷가 가까운 곳에 우뚝 솟은 산으로 정상주변은 바위로 되어 있어 사방으로 조망이 좋고 산행도 비교적 수월한 편이라 벌교에 유명한 꼬막도 맛볼 겸 좋은 산행지다. 오늘 날씨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다. 많은 량은 아니지만 비가 온다고 한다. 올봄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와 산불 날 위험은 없어 좋지만 산행하기에는 좋지를 않다. 저번 불곡산 산행시도 산행이 끝나자 마나 많은 눈이 와 청주로 돌아오는 길에 차량이 지체되어 많은 고생들을 했었다. 오늘이야 약간의 비소식이니 그런 낭패는 없을 걸로 생각이 들지만 제석산 정상부근이 바위지대라 조금은 걱정이 된다. 오늘 다른 때 보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1시간을 당겨 6시 출발 한다고 한다. 나는 가는 도중에 승차를 하기 때문에 집에서 버스가 출발하는 시간에 맞추어 6시 집을 나선다.

 

보성군 벌교읍 홍교 09:20 ~09:25

청주를 출발하여 서청주톨게이트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잠시 운영진의 산행에 관한 안내가 끝나고 아침으로 김밥 식수등을 나누어 주고 먼 거리 이동에 대비하여 소등 후 대부분 취침으로 들어간다. 버스는 달려 어느덧 호남고속도로에서 완주~순천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달리고 있다. 완주, 임실을 지나 오수휴게소에서 정차를 한다. 휴게소에서 정차 후 출발하여 남원을 지나고 견두지맥 길의 천마산아래를 통과하는 긴 터널(천마터널, 3944m)을 지난 후 견두지맥 능선의 3~4부 능선을 따라 진행이 되기 때문에 터널이 많다. 좌측으로 만복대를 비롯하여 지리산의 주능선이 시야에 들어오며 지리산톨게이트부근을 지나 구례 오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섬진강을 건너며 좌측으로 구례구역이 잠시 보인 후 황전휴게소를 지나 좌측으로 오산에서 둥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높다랗게 보인다. 오래전 간전농공단지에서 계족산을 필두로 천황봉~둥주리봉~오산으로 이어지는 산행 중 큰 알바를 한덕에 중간에 천황봉은 건너뛰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 둥주리봉을 거쳐 오산까지 산행을 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이제 버스는 광양 백운산에서 뻗어 내려온 호남정맥 줄기의 갓거리봉 부근의 서면터널을 지나 순천으로 접어든다. 순천에서 구 길을 따라 벌교로 진입하여 우리의 목적지인 홍교 앞에서 정차를 하니 청주에서 3시간 20분이 소요된 09 20분이다.

 

운동기구봉(0.87km, 해발 176m) 09:50

벌교 뗏목을 이어서 만든 다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홍교가 있는 자리는 나무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가 있었는데 조선 영조 때 홍수가 나면서 다리가 떠내려간 후 다리를 놓았는데 승선교로 유명한 선암사의 스님이 공사 감독을 하였다고 한다. 제석산 반대편으로 아치형3개의 다리와 제석산 쪽의 복원한 다리가 분명이 표시가 난다. 소설<태백산맥>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 1980년대 초에 보수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치 아래 중간에 용이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건축학적으로 아치를 만들 때 마지막 돌을 넣어 전체를 고정시키는 중요한 자리라고 한다. 옛날에는 용의 코끝에 방울을 달아 바람이 불면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고 한다.

 

오늘 산행은 여기부터 시작된다. 단체로 기념사진을 촬영 후 다리를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도로 옆으로 이정표가 있다. 제석산 정상 5km, 쉼터 1.2km가 적혀 있다. 이정표 앞쪽으로 널찍한 공터 안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간다. 민가의 윗부분에서 우측으로 산기슭을 따라 올라서면 벌써 매화꽃이 만개를 하여 우리를 반긴다. 능선 끝 부근에 닿으면 직접 산으로 오르는 길과 우측으로 돌아서 오르는 두 길이 있다. 어느 길이건 위쪽에서 만난다. 우리는 직접 오르는 좌측 길을 따라 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후 편백나무가 가득한 숲 가운데를 가르는 가파른 길이 시작된다. 10여분을 오르면 다소 완만한 능선에 닿는다. 조망이 트이며 우측으로 벌교읍의 전경이 보이며 고흥 쪽으로 뾰족하게 솟은 첨산이 보인다. 첨산 옆으로 비조암, 병풍산을 거쳐 두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인다. 몇해전 진달래가 곱게 피던 때 첨산에 올랐었다. 커다란 바위봉에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때 나마 즐거움이 가득했던 곳이다. 능선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운동기구가 있는 곳에 닿는다. 운동기구가 있는 위쪽으로 삼각점이 있다. 해발 176m가 되는 봉으로 조망도 괜찮은 곳이다.

 

338(좌측 우회길 있음, 3.45km) 10:37

운동기구봉에서 이어지는 능선은 거의 평탄하게 조금씩 내려서고 또 오르고 한다. 7분여 능선을 따라 가면 우측으로 빠지는 하산로가 있는 안부삼거리다. 그전에는 좌측으로도 길이 있었던 같은데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1분을 더 가면 우측으로 내려서는 하산로가 있고 이후 좋아진 등산로를 따라 6분을 더 가면 운동기구가 설치되고 앞쪽으로 묘지가 늘어선 곳으로 우측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올라온 길과 만난다. 여기부터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다. 4분후 능선을 가로 지르는 좁다란 임도를 건너고 다시 오르기 시작하면 5분이 지나 약수터에 닿는다. 먼저 올라온 몇 분이서 이곳에서 쉬고 있다. 약수터에서 등산로는 우측으로 방향이 꺽여서 진행이 된다. 조금 지나면 벌교읍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바위지대에 닿는다. 벌교읍과 첨산일대가 시원스럽게 보이며, 고속도로가 지나는 곳으로 벌교에서 순천만으로 빠지는 물줄기가 보이며 장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들이 시야 들어온다. 순천만을 가운데 두고 동쪽으로는 여수로 이어지는 반도가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고흥으로 이어지는 반도가 펼쳐져 순천만은 그 가운데로 둥그렇게 자리 잡고 있다. 바위지대를 지나 잠시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면 다시 평탄한 능선에 닿는다. 걷기 좋은 능선을 따라가면 길이 양쪽으로 갈린다. 좌측 길은 388봉을 우회하여 가는 길이고, 우측 길은 388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우리는 우측 길로 올라 388봉에 오른다. 잡목으로 뒤덥힌 봉으로 둥그렇게 날개가 있는 안쪽에 봉긋이 솟아 있는 봉분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묵묘가 아닌지 싶다.

 

제석산 정상(4.42km, 560.3m) 12:22

338봉에서 급하게 내려서면 안부사거리로 이정표가 있다. 좌측은 낙안 구기마을, 우측은 별령 대치마을, 벌교2.7km, 제석산 0.9km가 적혀 있다. 안부를 지나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다. 점점 가팔라지며 바위지대가 나온다. 한발한발 바위를 밟고 올라서면 앞쪽으로 수직으로 된 신선대가 올려다 보인다. 이윽고 신선대 앞으로 닿아 서서 예전에 올랐던 우측으로 돌아가니 그때 매여 있던 밧줄인지는 몰라도 시커멓게 썩어 있어 잡고 오르기가 겁난다. 안전을 도모 할 수 없어 좌측 우회 길을 따라 신선대로 향하니 먼저 오른 몇몇이서 내려서고 있다. 잠시 기다려 신선대로 올라서니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엄습한다. 잔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도 눈이 왔었던 것 같다. 신선대는 두 개의 바위봉으로 되어 있다. 첫머리 바위봉은 몇 개의 바위기둥으로 이루어져 위험한 곳을 오르지 않는 것이 좋다. 다시 되돌아서 두 번째 신선대의 바위를 넘어서 잠시 내려서 바위지대를 따라 오르기 시작하면 3~4분이 지나서 제석산 정상석이 있는 곳에 닿는다. 제석산 정상부는 신선대에서부터 이곳까지 바위지대로 되어 있고, 조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올라보면 감탄사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제석산 정상이나 조금 전 지나온 신선대나 조망이 매우 좋아 고흥반도로 들어서는 초입의 첨산 병풍산 두방산을 필두로 순천만으로 이어지는 바다가 보이고 오봉산을 지나 금전산으로 이어지는 산군과 그 아래 낙안읍성 마을이 보이며 벌교의 널찍한 평야지대에는 벌써 봄이 왔는지 새파란 새싹이 돋아나 푸르름을 뛰고 있다. 벌판 뒤편으로 호남정맥 한다고 할 때 고생하던 존재산이 우뚝 솟아 있다. 지금은 공군부대가 철수를 하여 손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지만 그때는 갈수 없는 곳이었다. 봄철에 철쭉이 필적 오르면 좋다.

 

목장 임도 삼거리(동화사 좌측으로, 5.75km, 435m0 12:11

제석산에서 기념사진을 찍고는 조금 내려서서 아늑한 지점에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한다. 자리가 널찍하지 못해 다른 분들은 좀 더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 몇 명은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식사가 끝나기 전 나혼자 일어서서 먼저 출발을 한다. 몇 분을 가면 오봉산과 동화사길이 갈리는 삼거리지점에 헬기장이 있다. 동화사에서 이곳으로 오르는 임도가 잘되어 있어 이곳에 활공장을 만들어 놓았다. 헬기장에서 부터는 임도가 연결이 된다. 임도를 따라 조금 내려서니 우리팀 여러명이 상을 펴고 점심식사를 한다. 과일 몇 쪽을 맛보고는 나 먼저 출발을 한다. 시루봉을 들러보기 위해서다.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임도는 제석산 방향으로 향하다가 다시 굽이를 지나 동화사 방향으로 이어진다. 임도가 산 능선을 넘어서서 조금 더 내려서면 우측으로 빠지는 임도가 있고 좀 더 가면 남도목장과 동화사가 갈리는 삼거리에 닿는다. 이지점에 몇 개의 의자가 설치되어 있으나 사용을 하지 않아 풀 속에 묻혀 있다.

 

시루봉(삼각점, 7.55km, 382.1m) 12:54

남도목장 삼거리에서 임도사이 중간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누렇게 변색이 된 키 큰 억새가 능선으로 펼쳐진다. 남도목장의 가장자리로 임도길 인것 같은데 이 넘 억새 때문에 상당히 불편하다. 높다란 송신탑이 있는 지점을 지나 좀 더 가면 억새길 임도도 끊기고 지독한 가시밭이다. 이러저리 피하며 오른다. 주변으로는 드릅나무군락지로 1달만 늦게 왔으면 상당량의 드릅을 땄을 것 같다. 가시덩쿨을 헤치고 몇 개의 바위가 있는 493봉 정상에 오르니 트랭글이 호사산이라고 운다. 호산산은 금전산으로 가기 전에 있는 오봉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상에 있는 산으로 트랭글에서 잘못 입력한 것 같다. 493봉은 남도목장의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봉으로 전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서 다시 내려서는데도 가시덤불로 인하여 한동안 고생을 하다가 남도목장 건물이 내려다보이는 임도에 닿는다. 임도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지만 이곳도 억새가 들어차서 걷기는 그리 좋지 못하다. 임도는 잠시 후 끊기고 철사줄이 쳐져 있는 능선을 따라 간다. 길은 없다. 그저 능선을 따르다 보면 고사리가 빼곡이 자라 뒤엉킨 지역을 지나 안부로 내려선 후 다시 오르기 시작하면 삼각점이 나온다. 오래된 표지기 2개만 있을 뿐 사람의 발길이 끊긴지 오래되는 곳이다. 이곳이 시루봉으로 삼각점에 순천 431’이 적혀 있다.

 

동화사(9.0km) 13:20 ~13:32

시루봉에서 좌측 사면을 따라 내려선다. 가시밭은 아니라 다행이다. 나무사이를 빠져서 내려서면 능선이 표시가 나기 시작한다. 6분을 내려서니 임도가 나온다. 임도를 따라 좀 더 내려서면 이곳이 소리재라고 한다. 소리재 우측으로는 힐사이드 골프장이 자리 잡고 있다. 하산 길은 반대편 편백나무숲을 따라 내려선다. 편백나무가 끝나는 지점부터 임도길이 이어진다. 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여러 동의 비닐하우스 농장이 나온다. 비닐하우스가 많이 찢겨진 것으로 보아 올봄 농사는 짓지 않으려는 것 같다. 농장을 지나고 농로를 따라 내려서면 작은 대나무숲 지대가 나오고 좀 더 내려서면 굵직한 대나무숲이 나오며 대나무숲을 빠져나가면 앞쪽으로 동화사의 모습이 전개 된다. 회원들도 대부분 동화사에 도착을 하여 한 바퀴 돌아보는 중이다. 동화사 대웅전 앞으로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고 동화사 뒤편은 온통 동백나무숲으로 둘러 쌓였다. 규모가 상당히 큰 것으로 보아 전성기 때는 많은 승려들이 있었을 것 같다. 잠시 동화사를 둘러 보은 사이 산행이 마무리 되어 다음 목적지인 낙안읍성으로 이동을 한다.

 

낙안읍성 13:53~15:09

제석산 산행을 마치고 20분 이동하여 낙안읍성에 도착을 하여 1시간 10분간 각자 읍성을 돌아본다. 입장료가 개인은 4000, 단체는 3000원으로 비교적 비싼 편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읍성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곳으로 성터에 올라 내려다보는 초가집들은 장관이다. 뒤편으로 금전산이 막아주고 앞쪽으로는 널따란 벌교 평야가 있어 오래전부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낙안읍성은 대부분 한두번씩은 다녀간 곳이기에 정확히 시간을 지켜서 벌교의 꼬막정식집으로 자리를 옮겨 맛있게 들고는 청주로 돌아왔다.

오늘도 산행이 끝나고 부슬비가 내려 저번 산행과 거의 흡사한 형태가 되었다.

시산제를 잘 지낸 탓인지 천지신명께서 굽어 살피시어 우리 회원들의 산행을 도운 것이라 생각이 든다.

오늘 함께한 산행 즐거웠고요~

행복했습니다.

다음 산행에 다함께 하도록 합시다.

 

산행시간 : 3시간 55분 소요

산행거리 : 9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