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공룡~칠불봉~상왕봉~만물상(성주,합천)
백운대-동성봉(1,227m)-상왕봉(1,430m)-칠불봉(1,433m)-만물상 능선
2010.10.27.수요일 맑음
참석인원 ; 3명 악당,적막,나
청주 6:05 -선산휴게소 7:10 ~7:15 -성주톨게이트 7:42 -수륜삼거리 7:53 -백운동주차장 8:05 ~8:13 -백운2교지나 1분후 이정표(백운동주차장 1.3km,05-02지점) 8:37 -마애불 9:22 -소원성취탑 - 백운대(소원성취탑 남쪽봉) 9:32 -소원성취탑 -동장대 -하늘바위 10:00 ~10:07 -동성재(헬기장) 10:16 -동성봉 9:32 -고개 11:10 -우측바위봉 11:17 -다시고개 11:25 -바둑이바위 11:30 -전망봉 11:45 ~11:49 -고개삼거리(좌측 용기사지) 11:53 -바위봉(되돌아서 우회하여 내려옴) 12:10 -좌측으로 돌아 슬랩지대 올라봉( 좌측 측면타고 내려옴) 12:35 -좌측 측면타고 내려옴 -다음 작은 바위봉은 우회함 -바위봉(우측으로 길있음) 12:50 -협곡에서 우측으로 내려옴 -고드름이 있는 바위사면쪽으로 길있음 -바위봉(칠불봉전봉) 13:16 -칠불봉 13:25~13:50(중식) -상왕봉 14:05 ~14:10 -서성재 14:54 (백운동주차장 3.6km) -상아덤안내문 (상왕봉 1.6,백운동 3.4) 14:58 -이정표(백운동 3.2)(06-05지점) 15:08 -안부 이정표(백운동 2.9) 15:19 -나무계단 올라서 봉 -바위문 15:23 -암릉 -나무계단내려와 안부(06-04지점) 15:35 - 제단바위 15:43 -헬기장표시있는 바위 14:48 -바위절벽 남쪽편으로 나무계단 15:53 -작은 나무다리 15:59 -계단 연속 2개지나고 -안부 -소나무 전망대 16:10 -바위 남쪽으로 나무다리 -이정표(백운동 1.6,06-02지점) 16:16 -흔들바위(표식기 많이 붙어 있는 전망바위) 16:22 -나무계단 -이정표(백운동 1.2) 16:29 -나무계단 -산소2기 지나고 16:36 -시인의 마을 만물상끝지점 16:41 -백운동주차장 16:48 ~16:53 -속리산휴게소 18:12 ~18:18 -청주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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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가야산 (남한 산) [伽倻山]
성주읍에서 27km 떨어진 곳에 있는 가야산은 예로부터 한국 8승지 중의 하나로 이름나 있으며 1972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주봉인 칠불봉은 해발 1,433m이다. 성주군, 합천군, 거창군의 경계에 위치하는데, 이 곳 성주군 수륜면은 가야산의 산세가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곳이다. 수륜면에서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가야산 순환도로를 따라가면 검붉은 기암절벽이 하늘을 찌르는 장쾌한 광경이 나타난다. 이 도로를 다시 되짚어 달리면 가야산은 푸르르고 순한 산으로 거짓말처럼 바뀌어져 있다. 이 일대에는 법수사지, 심원사지 등의 폐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또 계곡, 폭포를 끼고 이어지는 이색적인 등산로가 있어 등산하기에 좋다. 수륜 농협 삼거리에서 가야산 방면으로 5Km정도 가면 길 왼쪽에 탑 하나가 의젓하게 서 있다. 이 탑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인 법수사지 3층 석탑으로, 경쾌한 상승미와 격조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법수사는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되어 천년동안 번성했다
는 절로 100여개의 암자가 딸린 거찰이었다. 세월은 흘러 그 웅장한 규모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탑, 주춧돌, 당간지주만이 빈터를 지키고 있다.
가야산 주차장 서편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600m 정도 올라가면 고요한 숲 가운데 탑 하나가 서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인 심원사지 삼층석탑이다. 1990년도에 주위에 흩어진 탑재를 모아 복원시킨 것으로, 아담하면서도 균형이 제대로 잡혀있다. 첫머리에 등산로로는 용기골, 등산로로 칠불봉에 오르는 코스가 있다. 용기골은 웅장하고 남성적인 가야산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등산로로, 길을 따라 이어지는 맑은 계곡은 등산의 묘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곳은 노각나무와 조릿대 군락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으며, 다람쥐, 토끼 등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뛰놀고 있다. 자연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어 어린이가 딸린 가족동반 등산로로 좋다.
소백산맥의 지맥에 솟아 있으며, 주봉인 상황봉을 비롯하여 주위에 두리봉·이상봉·매화산·남산·단지봉 등이 연이어 있다. 기반암은 화강암과 화강편마암이며, 동남쪽을 제외한 모든 사면이 급경사이다. 상왕봉·두리봉 골짜기에서는 낙동강의 지류인 가야천이 발원한다.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며, 겨울에는 주변 기온보다 5℃ 정도가 낮다. 연평균강수량은 1,100㎜ 이상이며, 대부분이 여름철 강우이다. 높이 1,000m까지는 소나무·젓나무 등의 수림이 울창하며, 그 이상에서는 초본식물이 자란다. 또한 비단개구리 등 희귀동물을 비롯한 많은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웅장하면서도 수려한 산세와 해인사를 비롯한 많은 유물·유적들이 조화를 이루어, 예로부터 '대한팔경'과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혔다. 산 일대가 1972년 10월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총면적은 57.8㎢이다. 산 입구에서 해인사까지 약 4km에 이르는 홍류동계곡은 가야천을 이루는 계곡이다. 폭포를 이루는 절벽, 맑은 물, 울창한 소나무숲과 진달래·철쭉·단풍 등이 어우러져 사계절 모두 독특한 경관을 이룬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계곡 입구에 무릉교가 있었고, 최치원의 유적인 제시석 등이 있다. 계곡을 거슬러올라가면 취적봉·자필암·분옥폭·제월담·낙화담 등 뛰어난 경승지가 있다. 용문폭포는 해인사에서 서쪽 2㎞ 거리에 있으며, 경치가 뛰어나다. 산정에는 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우비정이 있으며, 남북으로 뻗은 능선과 남산 제일봉의 기암절벽이 또다른 절경을 이룬다.
남서쪽 기슭에 있는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이며, 이 일원이 1966년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었다. 법보종찰(法寶宗刹)이며, 호국의 정신이 깃든 팔만대장경판(八萬大藏經板:국보 제32호)·해인사대장경판전(海印寺大藏經板殿:국보 제52호)·마애석불입상(磨崖石佛立像:보물 제222호)·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元景王師碑:보물 제128호) 등이 있다. 그밖에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 등 200여 점의 사보(寺寶)를 간직하고 있다. 802년(신라 애장왕 3)에 창건했으나, 몇 차례의 화재로 불에 타고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조선말에 중건한 것이다. 매화산 기슭에 있는 청량사는 석등(보물 제253호)·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265호)·3층석탑(보물 제266호) 등이 유명하다. 해인사 서쪽 비봉산 기슭에는 원당암이 있으며, 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보물 제518호)과 보광전 등의 건물이 있다. 해인사 남서쪽에 있는 금선암은 불교학생수련장으로 이용되며, 이밖에도 백련암·지족암 등 많은 부속 암자가 있다. 기암절벽, 계곡의 맑은 물, 소나무 등의 울창한 수림이 수려하며, 해인사를 비롯한 많은 문화유적들은 관광객을 매혹시킨다. 10월에는 민속축제인 대가야문화제가 열리며, 주위에 직지사·합천댐·거창온천 등이 자리하여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신부락-해인사-상왕봉-마애불입상-해인사-신부락과 해인사-백련암 동쪽 계곡-정상에 이르는 등산로가 있어 등반객이 많이 찾는다. 숙박시설과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대구·거창에서 해인사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가야산명의 유래〕
가야산 지명의 유래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먼저의 주장은 가야산이 있는 합천·고령 지방은 1,2세기 경에 일어난 대가야국의 땅으로, 신라에 멸망한 뒤로 처음에는 대가야군으로 불렸다. 따라서, 이 산이 대가야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며 가야국 기원에 관한 전설도 있는 까닭에, 옛날 가야 지방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가야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주장은 인도의 불교 성지 부다가야(Buddhagaya) 부근 부처의 주요 설법처로 신성시되는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 왔다는 것이다. 또, 이 산의 정상부가 소의 머리처럼 생겼고,오랜 옛날부터 산정에서 행하여지는 산신제의 공물을 소에 바치고 신성시하여 왔다.
\즉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은 우두였다. 그런데 불교가 전래된 뒤 범어(梵語)에서 ‘가야’는 소를 뜻하고, ‘가야산’은 불교 성지이므로 ‘가야산’이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보는 것이 또 다른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봉 상왕봉의 ‘상왕’은 ≪열반경≫에서 모든 부처를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불교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결국 ‘가야산’이라는 명칭은이 지방의 옛 지명과 산의 형상, 산악 신앙, 그리고 불교 성지로서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것이다. 가야산을 논할 때 해인사와 떼어 놓고서는 설명할수 없다는 것을 그 지명에서부터 말하여 준다.
〔상징성〕
첫째, 가야산은 그 지명과 산신 전설에서 옛 가야 지방을 대표,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이 있는데, 가야산신은 정견모주라는 여신이다
한편, 이른바 오가야 가야연맹의 맹주는 지금 가야산이 있는 고령군·합천군 일대의 대가야와 김해를 중심한 금관가야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가야 시대에 가야산은 낙동강 중하류 일대 가야 연맹의 성산(聖山)으로 산악 신앙의 대상이며, 산신 정견주모는 가야 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 경내에 있었다는 정견천왕사는 가야산신의 사당이다. 또한 가야산 정상에서 근래까지 지내온 산신제는 옛 가야 지방의 신이 산악 신앙형태로 잔존한 것이라고 하겠다.
둘째,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상징된다. ≪택리지≫에 가야산을 비롯한 열두 명산이 “세상을 피하여 숨어 사는 무리들이 수양하는 곳으로 되어 있다.” 하고, 또 “옛 말에 ‘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 하는데, 우리 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으므로 무릇 이 열두 명산을 모두 절이 차지하는 바되었다.” 하였다.
해인사는 가야산의 품에 안김으로써 거찰(巨刹)이 되었고, 가야산은 해인사를 옷자락 속에 둠으로써 더욱 명산·영산의 이름을 얻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는 옛 기록은 바로 이를 말함이다.
우리 나라 대부분의 대사찰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수차의 중흥이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었다. 애장왕의 보은 창건, 고려 태조의 귀의(歸依), 조선 태조의 발원(發願),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다.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 유산인 고려팔만대장경판을 6백년 가까이 고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法寶宗刹)의 명성을 누리고 더욱 민족과 국가의 아낌을 받았다. 이러한 해인사의 흥창과 명성은 뛰어난 형승과 따를 수 없는 지덕을 가지고, 또 삼재불입(三災不入)의 영기(靈氣) 서린 가야산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위란(危亂)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 전통의 중심지였다.
신라 말에서부터 시작된 해인사 승군(僧軍)의 전통은 희랑(希郎)이 군을 일으켜 고려 건국을 도운 것, 임진왜란에 승군 의병을 지휘한 유정(惟政)이 만년을 가야산에서 지내다 입적한 사적으로 이어진다. 또, 민족 항일기에 해인사는 청년 승려들이 중심이 된 독립 만세운동과 항일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셋째, 가야산은 최치원(崔致遠)의 은둔 이후 역대 문인들의 유람과 풍류의 이상향으로 그려졌다. ≪택리지≫에 “산수는 정신을 즐겁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한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러워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生理)가 박한 곳이 많다.
……한낱 산수만 취하여 삶을 영위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에, 지세가 아름다운 곳을 가려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 리밖 혹은 반나절 길쯤 되는 곳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어, 생각이 날 때는 그 곳에 가서 시름을 풀고 혹은 유숙한 다음 돌아올 수 있는 곳을 장만해 둔다면, 이것은 자손 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하고 산수를 유람하는 뜻을 정리하였다 .
여러 문헌에서 확인되듯, 가야산의 아름다움은 여러 사람에게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가야산의 수려한 석봉과 골짜기를 흐르는 계류가 사계절에 변화하는 주위 수목과 어우러져 선인들을 풍류에 도취하게 하였음이 틀림없다.
우리 선현들이 산을 유람하는 뜻이 단순히 풍류에서만 그치지 않았음이 정구(鄭逑)의 〈가야산기행문〉에서 뚜렷이 나타나 있다. 즉, 유람객의 구경거리가 되는 산의 훌륭한 경치는 인자(仁者)로 하여금 산의 오묘한 생성의 이치를 보고 자성(自省)하게 하는 것이며, 높은 곳에 오르는 뜻은 “마음 넓히기를 힘씀이지 안계(眼界) 넓히기를 위함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가야산 정상에 오른 심회를 “천 년 처사의 마음, 말 없는 가운데 합하네(默契千年處士心).”라고 읊었다. 최치원의 입산 이래 천 년 동안 수많은 선현들이 가야산을 람하여, 혹은 바위에 새겨지고 혹은 문집에 남겨 전하는 시와 문장들에 의하면, 경승지를 유람하는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가야산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생활사를 통하여 고대 가야국의 산신이 있는 명산으로서, 법보종찰인 해인사를 품안에 안은 호국불교의 성지로서, 빼어난 경승을 자랑하는 유람처로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
역사와 문화유적〕
(1)해인사 가야산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들지 않았으나 해인사는 임진왜란 후에 7차의 대화재를 겪어, 50여 동의 해인사 건물들은 대부분 2백 년 이내에 중건된 것들이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해인사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에 있다. 이 절은 화엄10찰의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을 봉안한 법보종찰이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합도량이기도 하다. 해인사는 802년(애장왕 3)에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애장왕의 지원을 받아 창건하였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기伽倻山海印寺古籍記〉에 의하면, 순응과 이정은 중국에 가서 보지공(寶誌公) 문하에 불법을 구하였더니, 문도가 지공의 답산기(踏山記)를 주고 아울러 시의 말을 전하였다.
두 사람이 지공의 묘소를 찾아가 법을 청하니 수일 후 지공이 나와 설법을 하고 의발(衣鉢)을 전하며 간곡히 이르되, “너희 나라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너희가 환국하여 절을 창립하라.”하는 말을 들었다. 두 스님이 귀국하여 우두산의 동북쪽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서쪽 골에 이르러 보니, 합당한 곳이 있었으므로 풀을 깔고 앉아 수도하였다.
그 때 애장왕후의 등창병을 고쳐주자, 애장왕이 이에 크게 감사하여 먼저 봉서사(鳳棲寺 : 지금의 願堂庵을 말한다 함.)를 세웠다. 그리고 법당과 승료(僧寮) 40여 소를 짓고 전지(田地) 2천 5백 결을 하사하였다.
개산일(開山日)은 그 해 8월 16일(고적기에는 10월 16일)로 전한다. 화엄종의 개산조인 의상(義湘)의 법통을 이은 순응은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인용하여 해인사로 명명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진성여왕이 죽은 애인을 위하여 해인사를 원당(願堂)으로 삼고, 자신도 왕위에서 물러난 뒤 해인사에서 지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려 태조는 후백제와 싸우다 해인사에 들어와 주지 희랑에게 구원을 청하니 희랑이 군을 일으켜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격파하였으므로, 태조가 전답 5백 결을 내려 절을 확장하도록 하였다.
조선 태조는 1398년 강화도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을 한양에 잠시 옮겼다가 뒤에 해인사에 봉안하고 세조는 대장경판각을 확장, 보수하였다.
1488년에는 왕명을 받은 학조(學祖)가 대적광전(大寂光殿)·대장경판각 등을 비롯하여 160여 칸의 건물을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후 모두 7차례의 화재가 있었으며, 그 때마다 중건 또는 중수하였다. 특히, 1817년의 대화재 때는 대장경판각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뒤 제월(霽月)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건물로는 큰 법당인 대적광전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명부전·삼성각·응진전(應眞殿)·조사전(祖師殿)·퇴설당(堆雪堂)·응향각(凝香閣)·관음전·궁현당(窮玄堂)·구광루(九光樓)·경학원·명월당(明月堂)·사운당(四雲堂)·해탈문·국사단(局司壇)·봉황문·일주문(一柱門) 등이 있다.
가야산 내의 부속 사찰과 암자로는 청량사(淸凉寺)·백련암(白蓮庵)·홍제암(弘濟庵)·약수암·원당암(願堂庵)·삼선암(三仙庵)·금선암(金仙庵)·국일암(國一庵)·희랑대(希郎臺)·용탑선원(龍塔禪院)·길상암(吉祥庵)·지족암(知足庵)·보현암(普賢庵) 등 13개 사암(寺庵)이 있다. 또 해인사는 서부 경상남도 지역
합천·거창·산청·함양·진주 등 5개 군의 65개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또한 해인사에는 여러 국보, 보물이 보존되어 있다.
국보로는 국보 제 32호인 해인사대장경판과 국보 제52호인 해인사장경판전(海印寺藏經板殿)이 있다. 그리고 보물로는 해인사석조여래입상(보물 제264호)·반야사원경왕사비(般若寺願景王師碑, 보물 제128호)·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海印寺願堂庵多層石塔―石燈, 보물 제518호) 등 3점이 잇다.
이 밖에 여러 사보(寺寶)들도 있다. 상탑향로(象塔香爐)·옥제가화(玉製假花)·희랑조사자조목상(希郎祖師自彫木像)·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봉황촛대·일영의(日影儀)·순은향로·옥등잔·숙종어필병풍(肅宗御筆屛風)·오채병풍(五彩屛風)·무공수정(無孔水晶) 등 2백 여점이 그것이다.
(2) 해인사 주변의 유적
① 학사대(學士臺) : 응진전 서쪽에 있는 천년 고목으로 최치원이 심은 전나무라고 한다. 최치원이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② 외나무 다리 : 학사대 아래 계곡을 가로 질러 놓인 다리로 옛날 김천 사이에 보행 통로가 있을 때 일반 왕래객과 우마의 경내 출입을 막기 위한 것이라 한다.
③ 용탑선원 : 해인사에서 외나무 다리 건너 가야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다. 암자는 1945년에 창건되었고, 석굴암과 삼층석가사리탑이 있다. 삼층석가사리탑은 1965년 고암(古庵)이 세운 것으로, 석가사리를 봉안하였다. 1971년 역시 고암이 건립한 석조미타굴 법당에는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음보살 및 세지보살(勢至菩薩)을 모셨다.
④ 용성선사사리탑(龍城禪師舍利塔) : 용탑선원과 홍제암 사이에 있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용성대선사(속명 白相奎)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1941년에 건립하였다. 용성의 비석이 함께 있다.
⑤ 홍제암 : 용탑선원 아래에 있다. 유정이 3년 간 머물다가 입적한 곳으로,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의 시호를 따서 홍제암이라 한다. 1770년(영조46) 해봉(海峰)이 중건하였고, 현 건물은 1979년에 중수한 것으로 단층 H자 목조로 웅장한 규모이다. 영자각(影子閣)에는 휴정(休靜) 그리고 영규(靈圭)의 상을 모셨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6호이다.
⑥ 사명대사비 및 부도 : 비문은 당대 문장 허균(許筠)이 짓고, 1612년(광해군 4)에 건립하였다. 1943년 합천경찰서장 다케우라(竹浦)가 부수어 버린 것을 1958년 조각을 모아 다시 복원하여 옛 자리에 세웠다. 이 비와 부도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5호이다. 옆에 신비(新碑)와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가 있는데, 아무런 글이 새겨져 있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⑦ 원당암 : 해인사 서쪽 비봉산 기슭에 있다. 신라 애장왕이 해인사를 창건할 때 여기에 먼저 봉서사를 짓고 정사도 함께 본 곳이라 한다. 1852년(철종3) 중건 이후 퇴락한 것을 1971년 혜은(彗恩)이 새롭게 중건하였다.
개창 당시 왕이 이 곳에서 정사를 살핀 것과 관련, 산너머에 삼정승이 살던 ‘삼정(三政)마을’과 말을 기르던 ‘마장동(馬場洞)’, 극락전 동쪽에는 ‘어수정(御水井)’, 절 앞에는 ‘옥가평(獄街坪)’ 등의 이름이 전한다. 경내에 보물 제518호인 해인사원당암다층석탑 및 석등이 있고, 원당·보광전(普光殿)·염화보(拈花寶) 등의 건물이 있다.
⑧ 금선암 : 해인사 서남쪽 개울가에 있다. 1945년 비구니 하담(河淡)이 세운 여승방이다. 개울가에 있어 불교 학생 수련장으로 이용된다.
⑨ 삼선암 : 금선암 바로 아래에 있다. 1893년 자홍(慈洪)이 창건하여 학사대 북쪽에 있던 것을 옮긴 여승방이다. 1904년 보찬(普讚)과 지종(智宗)이 증축하고, 1971년 혜안(慧眼)이 중건하였다. 뒤에 삼선봉(三仙峰)이 있어 삼선암으로 이름지었다.
⑩ 보현암 : 해인초등학교 뒷산 기슭에 있는 옛 옥가평 자리에 비구니 혜춘(慧春)이 1975년 창건한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선방이다. 약수가 있으며, 수조(水槽)가 아름답다.
⑪ 약수암 : 일주문이 있는 큰길에서 동쪽으로 100m 거리에 있다. 밭 가운데에서 약수가 솟는다고 하여 약수암이라 하였다. 1904년 비구니 성주(性主)가 창건, 1927년 도삼(道三)이 중건, 1972년 법공(法空)이 선원을 지었다. 비구니들의 수도장이다.
⑫ 국일암 : 약수암 뒤에 있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37년(인조 15)·1942년·1948년에 중건하였다. 벽암(碧巖)이 머물렀던 곳으로, 병자호란에 승병 3천을 일으키니 왕이 ‘국일도대사(國一都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부휴(浮休)·고한(孤閑)·벽암의 부도가 있다.
⑬ 희랑대 : 국일암 뒤 산 중턱 절벽에 암자를 지었다. 927년(태조 10) 희랑이 건립, 수도하던 곳으로, 1940년 현옹(玄翁)이 중건하였다. 이 곳 삼성전에 모신 독성나반존자(獨聖那畔尊者, 또는 獨修聖)의 영험은 많은 일화를 전하고 있다.
⑭ 지족암 : 1796년(정조 20) 관수가 세운 것으로 전한다. 삼성전 뒤에 있다. 원래 도솔암(兜率庵)이라 하였는데, 1893년(고종 30) 환운(幻雲)이 중건하고서 지족암으로 바꾸었다. 희랑의 기도처라는 설도 있다.
⑮ 백련암 : 일주문 동쪽 약 1㎞ 지점에 있다. 해인사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암봉(巖峰)과 전망이 좋아 경치가 뛰어났다. 좌우로 용각대(龍角臺)·절상대(絶相臺)·환적대(幻寂臺)·강선대(降仙臺) 등의 기암이 있고, 뜰에 박힌 한덩이 거암이 부처의 얼굴과 같아 불면석(佛面石)이라 부르며, 영구천(靈龜泉)이 있다.
창건 시기는 미상이나 휴정의 제자로서 임진왜란 때 해인사를 보전한 소암(昭庵)이 중건하였으며,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암자이다. 지금은 조계종 종정 성철(性澈)이 머물고 있다.
현재 원통전(圓通殿)·영자당(影子堂) 및 요사(寮舍)가 있다.
극락전 : 창건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488년(성종 19)에 부휴가 중건하였다. 부휴 외 10인의 영정을 모셨다. 합천치인리마애불입상 : 해인사 뒤가야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 옆에 있다. 큰 바위를 광배(光背)로 하여 조각된 높이 7.5m의 거대한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보물 제222호이다. ? 해인사석조여래입상 : 가야산 정상 부근 칠불암 터에 있는 높이 2.1m의 불상으로 보물 제264호이다. 파손이 심하다.
길상암적멸보궁(吉祥庵寂滅寶宮) : 1972년 영암(暎巖)이 창건하였다. 천불동 낙화담 서쪽 거북바위 옆 큰 산봉우리에 부처님 진신사리 2과(顆)를 봉안하고, 묘길상적멸보궁천진보탑(妙吉祥寂滅寶宮天眞寶塔)이라 이름하였다. 또 타이의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주위 경치가 아름다워 기도처로 유명하다.
청량사 : 가야산 어귀 매화산 기슭에 있는 해인사의 말사이다. 신라 시대에 창건된 절로 ≪삼국사기≫ 열전에는 최치원이 합천 청량사에서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대웅전은 근래 해체, 보수한 것이며, 석등·석탑·석가여래좌상 등 통일 신라 시대 작품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량사석등 : 보물 제253호. 높이 3.4m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 석등이다. 8각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간석(竿石)의 변화와 옥개석의 경쾌한 모양이 돋보인다.
청량사석조석가여래좌상 : 보물 제265호로 불좌높이 2.1m, 대좌높이 75㎝이다. 장방형의 좌대 위에 앉은 석가여래좌상인데, 경주석굴암 본존불을 연상하게 하는 불상이다. 불상과 대좌, 광배가 모두 우수하여 8세기의 석굴암에 대하여 9세기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만하다.
청량사삼층석탑 : 보물 제266호로 높이 4.85m이다. 2중기단 위의 삼층석탑으로서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양식이며, 매우 정교하고 우아한 가작이다.
(3) 없어진 사찰 ≪신증동국여지승람≫ 혹은 정구의 〈가야산기행문〉에 기록이 있으나 19세기 읍지에 없다고〔今無〕하였으며, 지금도 중창되지 않은 절은 내원사(內院寺)와 소리암(蘇利庵)이다. 내원사는 해인사 북쪽 2㎞ 지점에 있었으며, 절에서 남쪽으로 수백 리 멀리 지리산의 중첩한 푸른 모양이 보였다는 점으로 보아 산정이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절에 조현당(釣賢堂)·나월헌(蘿月軒)·득검지(得劍池)가 있었다. 서거정(徐居正)·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의 시문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박인량(朴寅亮)의 ≪수이전 殊異傳≫에 “동방에 옛적에 소리암이라는 큰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거정이 중창기를 썼으며, 김굉필이 독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시대에 창건되어 조선 중기까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정각암(淨覺庵)·성불암(成佛庵)·심원암 (深源庵)·원명사(圓明寺)·총지사(叢持寺)·도은사(道恩寺) 등의 암자가 정구의 기행문에 나타난다.
〔가야산과 문학〕
명산·유람지로서 가야산을 기록한 많은 시문(詩文)은 최치원의 가야산 입산에서부터 나타난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시인·문장가로서 우리 나라 한문학의 조종으로 칭송되거니와, 신라의 기울어짐을 보고 은퇴하여 명승지를 유람하며 한거자적(閑居自適)하다가, 마침내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속에 은둔한 뒤로는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인로(李仁老)는 ≪파한집≫에서 “어느 날 고운(최치원)이 아침 일찍 집문을 나선 뒤로는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했으며, 갓과 신만이 숲속에 남아 있었으니, 아마도 신선이 되어 갔을 것이다. 그래서 중들이 그 날로 명복을 빌게 되었다.”고 하였다.
최치원은 〈해인사묘길상탑기 海印寺妙吉祥塔記〉를 찬술하기도 하였는데, 이 기문은 전몰한 승려에 대한 진혼문(鎭魂文)으로서 승군의 전통이 신라시대까지 소급함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 살던 곳을 치원촌(致遠村)이라 하였는데, 후에 치인촌(治仁村)이 되고 다시 지금의 치인리가 되었다.
그러나 최치원의 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은 홍류동 계곡의 제시석(題詩石)이다. 최치원이 바둑을 두던 곳〔碁閣〕이라고도 하는데, 치원대(致遠臺)로도 불리는 바위에는 최치원의 〈가야산독서당시〉가 새겨져 있다.
〈농산시 籠山詩〉라고도 불리는 이 시는 마멸되어, 송시열(宋時烈)의 글씨로 다시 새겨져 있는데, “첩첩한 돌 사이로 미친 듯 내뿜으며 겹겹한 산을 두드리니, 사람의 소리는 지척간에도 분간하기 어렵도다. 세상의 시비하는 소리 들릴까 저어하여, 짐짓 흐르는 물로 산을 둘러 막았네.”라고 되어 있다.
세종 때 문신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가야산 좋단 말 십 년 동안 듣기만 했네. 내가 오니 구름이 짝이 되고 중이 누웠으니 사슴이 벗하네. 손의 베갯머리엔 차가운 시냇소리 맑고, 향반(香盤)엔 고요한 밤 깊었구나. 다생(多生)을 고화(膏火) 속에 괴로워 하던 것, 왜 이다지도 부끄러운가.” 또, 배중부와 김일손도 가야산에 관련한 시문을 남겼다. 배중부(裵仲孚)는 해인사로 가는 친구를 전송하면서 가야산의 사계절을 노래하였다.
김일손의 〈내원사조현당기 內院寺釣賢堂記〉에 “가야산에는 반드시 경치가 기절하여 신선이 머물렀던 것이리라. 문창(文昌 : 최치원의 시호)이 간 뒤에도 반드시 높은 사람과 은사(隱士)가 그 산중에서 서식하였을 것인데, 혹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음인가. 한번 유람하여 그 사람을 탐문하려고 하였다.”고 하여, 은사를 찾아 가야산을 유람함을 밝혔다. 정구 또한 가야산의 절경을 기리는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가야산기행문〉에서 가을철 가야산 사인암(舍人巖)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다.
〔계곡의 경승〕
(1) 무릉교(武陵橋) 이 다리는 가야산 홍류동계곡 입구에 있었는데, 지금은 수재로 없어졌다. 김종직의 시에 “그림 같은 무지개 다리 급한 물결에 비치는데, 다리 위를 지나는 사람 발을 조심한다. 나의 옷 걷고 물 건너려는 것, 그대는 웃지 마소. 고운(최치원)이 어찌 위태로운 길 밟았던가.”하였다.
(2) 홍류동 가야산의 많은 계곡 중에 가장 이름난 곳으로, 무릉교에서 치인리까지 10여 리의 계곡이다. 높은 절벽과 봉우리 밑 골짜기의 흰 돌 계곡을 맑은 물이 흘러 기이한 경치를 이룬다. 울창한 송림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봄에는 양쪽 언덕의 진달래·철쭉꽃에, 가을이면 단풍에 붉게 물든다고 홍류동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 여름철에 계곡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 마치 금강산 옥류천(玉流川)을 닮았다고 옥류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의 가야산국립공원관리소 조금 위에 ‘고운최치원둔세지(孤雲崔致遠遯世地)’라는 비석이 있는 곳에 제시석(題詩石)이 있고, 그 계곡 가운데 농산정(籠山亭)이 송림·계곡과 함께 어우러져 그림 같은 정경을 자아낸다.
김종직의 시에 “아홉 굽이 흐르는 물 우뢰처럼 부딪치니, 낙화가 수없이 물결 따라 오누나. 반생 동안 도원(桃源)길에 올랐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물색(物色)의 시기(猜忌)를 만났구나.”하는 글이 있다. 농산정 부근에 최치원의 사적이 모여 있는데, 계곡 건너 길가에 최치원의 사당인 학사당이 있다.
원래 치인리에 있었다 하나, 풍우에 없어진 것을 후손이 근래에 이 곳 홍류동에 이전하여 영정을 모셨다. 영자각이라고도 한다.
(3) 가야서당(伽倻書堂)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으로, 1937년에 사림과 후손이 창건하였다. 학사당 옆에 있다.
(4) 문창후유적비(文昌侯遺蹟碑) 근래에 세운 것으로, 학사당 앞에 있다. 홍류동 계곡을 거슬러 올라 가면서 가파르고 우뚝한 절벽과 봉우리, 기이한바위, 그 사이로 쏟아져 흐르는 폭포와 연못이 곳곳에 절경을 이루고, 그 중에는 경승의 이름이 바위에 크게 새겨져 있는 것이 많다.
강희맹이 가야산을 유람하다가 음풍뢰·체필암에 이르러 봉우리가 사방에 우뚝하고 급한 물결이 바람을 뿜어서 소리가 전진(戰陣)의 말〔馬〕과 같으며, 커다란 돌이 시내에 임하였는데 이끼가 끼지 않고 미끄럽기가 갈아놓은 것 같아 붓으로 글씨를 쓸 만하다 하여, 물은 음풍뢰, 바위는 체필암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또, 음풍뢰 시에 “뿜는 물방울은 뛰는 구슬이 급하고, 놀란 물결은 주름진 비단이 깊다. 바람맞이에서 볼수록 부족한데, 웅덩이 밑에는 용이 있어 읊조리네.”하였고, 체필암 시에 “쇠로 깎은 듯 천길이 장하다. 구름이 피어나니 일만 구멍이 서늘하다. 아는 것 없이 다만 우뚝 선 것이 창창(蒼蒼)하기만 할 뿐”이라 하였다.
(5) 용문폭포(龍門瀑布) 치인리 신촌락에서 서쪽으로 2㎞ 되는 곳에 있는 큰 폭포이다. 용이 살았다고 해서 용문폭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관광 및 자원〕
가야산이 있는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성주군과 거창군의 일부를 포함한 총면적 57.8k㎡가 1972년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주요관광 자원은 홍류동을 비롯한 계곡과 해인사 일대, 그리고 가야산연봉·능선의 자연 경관으로 나누어진다. 자연 경관과 문화적·역사적 경관이 뛰어난 조화를 이루었다.
관광객을 위한 편의 시설은 치인리 신촌락에 집중되어 있다. 신촌락 집단 시설지는 여관을 비롯한 숙박 업소와 식당 및 기타 위락 시설과 기념품 상가가 밀집하여 있으며, 산채요리·버섯 요리가 일미이다.
우체국(국제전화 취급)·농업협동조합(외국환 취급)·경찰지서·주차장(7천㎡) 등 공공 시설물도 갖추어져 있다. 교통은 서울·부산·대구·마산·진주·합천간에 정기 노선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특히 대구와는 88올림픽고속도로 건설 이후 1시간으로 단축되어, 대구 시민의 일일 휴양지로 되었다.
1972년에 건립한 전망대가 있어 가야산 정상과 해인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서울에서는 추풍령을 넘어 김천시 증산면-성주군 수륜면-홍류동으로 들어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은 맑은 계곡을 끼고 있으며, 〈무흘구곡 武屹九曲〉으로 유명한 절경이 펼쳐진 길이다.
또한, 청암사·수도암에도 들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륜면의 회연서원일대의 절경도 일품이다. 등산길로는 사하촌인 여관촌에서 해인사-용탑선원-정상의 왕복 코스(편도 약 6㎞)와 마애불 갈림길 능선-대피소-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해인사-마애불-정상 등의 길이 있고, 성주 쪽에서는 창천-만귀정-정상의 길이 있다.
상왕봉 정상에 서면, 두리봉·단지봉·수로산·대덕산을 거쳐 덕유산에 이르는 서쪽의 대능선이 장쾌하다. 또한, 정상에는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우비정(牛鼻井)이 있으며,성주군이 동북쪽으로 내려다 보이고, 백련암과 가산(加山, 692m) 쪽으로 뻗은 남북 능선과 남산제일봉 바위 능선의 기암 절벽이 또한 절경을 이룬다.
가야면과 인접 야로면은 예로부터 백토(白土)와 자기의 고장으로 알려져 왔으며, 가야면의 고려도기회사(高麗陶器會社) 등의 도자기는 합천군의 주요공산품이다.
가야면과 인접한 고령군 쪽의 가야산 산록에도 고령토광산이 많다. 가야산이 있는 합천군에는 함벽루(涵碧樓)·연호사(烟湖寺)·대가야 성터·황계폭포(黃 溪瀑布) 등 많은 고적·관광지가 있다.
합천 가야산 칠불봉(1443m)~동성봉(1227m
경남 합천,거창군과 경북 성주군에 걸쳐있는 국립공원 가야산은 조선 숙종 때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이 '석화성(石火星)의 절정'이라고 극찬했을 만큼암봉과 암릉미가 걸작이다.실제로 가야산의 하늘금은 살벌하리만치 생생한 톱날같고 별무리를 이룬 봉우리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가파르게 솟아 있다.하지만 가야산의 이러한 절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찰이자 법보종찰인 해인사의 명성에 가려 상당부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번 주 산&산은 해인사를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산행로에서 탈피,사람들의 발길이 비교적 덜 닿는 가야산 동부능선을 찾아 나섰다. 칠불봉∼동성봉능선을 주 구간으로 소개할 이 코스는 그러나 단순히 호젓하지만은 않다. 푸른 하늘을 뚫을 듯 날카롭게 치솟은 암봉들이 기세 당당하고 하늘바위 동장대 등의 기암과 괴석들이 곳곳에서 장관을 이룬다. 산세 자체만 본다면 해인사를 잇는 주 등산로보다 더 역동적이며 흥미진진하다고 볼 수 있다. 가야산을 처음 찾는 사람들보다 새로운 코스에 목말라 있는 가야산 마니아들이 찾을 만 하다. 코스는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 국립공원 백운매표소를 출발,칠불봉(1,443m),
동성봉(1,227m)에 오른 뒤 동성재,하늘바위를 거쳐 매표소로 다시 내려오는 원점회귀형이다.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30분 정도. 주변을 둘러보며 쉬엄쉬엄 걷는다해도 5∼6시간이면 충분하게 오르내릴 수 있다.산행은 백운매표소를 들머리로 해서 시작한다. 길은 매표소를 오른쪽으로 돌아 다리를 건너면 왼쪽 용기골로 이어진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칠불봉까지 기존 등산로를 따른다. 서성재까지 오르는 길 군데군데 지난해 발생한 수해복구 공사가 한창이어서 다소 산만한 느낌을 준다. 60분 소요. 서성재에 오르면 등로는 가야산성 돌무더기를 지나 몇 차례의 철계단으로 오른다. 다소 급한 경사로 오르지만 길이 반듯해 큰 어려움 없이 칠불봉에 닿을 수 있다. 40분 소요.칠불봉은 대가야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수행력에 감화되어 처음으로 입산 수도한 전설이 전해지는 거대한 암봉이다. 한 점 막힘 없는 봉우리에 올라서면 하늘이 낮아 보인다. 우리나라 4대 종주코스 중 하나인 수도∼단지봉 능선이 서북쪽으로 너울지고, 바위산의 으뜸으로 꼽히는 남산제일봉이 발 아래로 아련하다. 특히 ,토신,극락 골짜기로 펼쳐지는 푸른 숲의 바다는 가야산만의 매력. '속세의 인연도 끊을 듯이' 대가람 해인사를 감싸 안은 모습이 깊은 그윽한 불국토의 세계를 연상시킨다.
칠불봉은 최근 상봉인 상왕봉보다 3m 더 높은 것으로 알려져 상왕봉 대신 주봉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다. 상왕봉은 칠불봉 서쪽으로 200여m 떨어진 소머리 모양의 암봉이다. 그곳에서의 조망도 칠불봉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칠불봉의 위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어 다녀올 만 하다.칠불봉∼동성봉 구간은 클라이밍 수준의 등반기술이 요구되는 암릉길이다. 일반 등산객들은 암릉 북벽 아래 우회길을 통해 이어갈 수 있다. 길은 칠불봉을 내려와 상왕봉으로 향하는 첫 번째 철계단 끝부분 아래서 오른쪽으로 감춰져 있다. 상왕봉을 둘러보고 왔다면 다시 칠불봉을 오르는 첫번 째 철계단 바로 아래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부터 동성봉까지는 부산일보 안내 리본을 잘 살펴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길이 희미할 뿐 아니라 갈림길도여러군데 나와 무심코 따랐다간 엉뚱한 길로 빠질 수 있다. 나침반이 있다면 동쪽 방향을 쫓아 길을 찾으면 된다. 60분 소요.동성봉은 동성재에서 보면정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정작 봉우리 근처에서는 어느 봉이 정상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다.다만 주변에 전망용 너럭바위가 있어 그 바위를 기준으로 키높은 봉우리가 정상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동성봉에서 동성재로 내려서는 부분도 주의해야할 구간이다. 길은 여기서 동서방향의 능선을 버리고 남쪽방향의 지능선을 타게 된다. 남쪽으로 내려서는 길은 공터로 남아있는 경방초소 자리의 흔적을 가로질러 나 있다. 취재 당시엔 낡은 철제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급경사로 떨어지는 남쪽 길을 따라 20분쯤 발품을 팔면 헬기장인 동성재에 닿는다. 진행방향 오른쪽 갈래길은 용기사지로 가는 길. 다시 성산이공의 묘지를 지나 20분쯤 더 내려가면 집채만한 바위와 맞닥뜨린다. 바로 하늘바위다. 큰 바위 위에 밑둥만 살짝 얹여있어 조금만밀어도 흔들린다고 해서 일명 건들바위라고도 하는데 누군가가 받침대를 쑤셔넣어 아무리 밀어도 꿈적도 않는다. 동성봉 코스의 이색 볼거리는 이 바위 주변에 몰려 있다. 신선이 놀았다는 동장대는 하늘바위에서 10m쯤 내려와 오른쪽 갈래길으로 들어서면 일부러 깎아 만든 의자같은 기암으로 만난다. 온후한 미소가 아름다운 마애미륵불은 동장대 아래 오른쪽 절벽아래서 천년의 세월로 새겨져 있다. 주변 석간수의 물맛도 일품.산행 들머리인 백운매표소도 이곳에서 뚜렷하게 보인다.미륵불에서 다소 거친 계곡을 따라 20여분쯤 쏟아질 듯 내려오면 물소리 시원한 용기골과 맞닿는다. 바로 오전에 올랐던 칠불봉 주 등산로다. 부근에 상왕봉 3.3㎞,백운매표소 1.0㎞라고 씌여진 목책 이정표를 확인하면 칠불~동성봉 코스를 제대로 밟았다고 볼 수있다. 백운매표소는 여기서 15분 거리에 있다.
칠불봉의 전설
“가야산은 가야건국 설화를 간직한 해동팔경 또는 영남의 영산으로 예부터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산신이 머무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하’에 감응되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 시조 이진아시왕, 뇌질청예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
고 전해온다. 칠불봉은 가야국 김수로왕이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과 결혼하여 10명의 왕자를 두었는데, 큰 아들 거등은 왕위를 계승하고 金氏의 시조, 둘째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許氏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7왕자는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가야산에서 가장 힘차고, 높게 솟은 칠불봉 밑에서 3년간 수도 후 도를 깨달아 생불이 되었다 하며 그 밑에 칠불암 터가 있다는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예부터 산산이 머무는 가야산은 그 골이 깊고 수려하며 삼재(旱災, 水災, 兵禍)가 들지 않는 해동영지로 일컬어 온 영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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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발 6:05
천안에서 온 적막과 악당 셋이서 6:05분 청주를 출발 하여 서청주 톨게이트로 진입을 한후 상주를 거쳐 선산휴게소에서 잠시 쉬어 간다. 휴게소 뒤편 저수지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너무 이쁜 아침이다. 몇분의 나이 지긋한 아줌니들은 물안개라는 노래를 부르며 향수에 젖는다.
백운동주차장 8:05 ~8:13
선산휴게소를 출발하여 좌측으로 금오산과 영암산~누진산~비룡산 줄기를 지나 성주톨게이트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멀리 보이는 가야산의 높은 봉을 향하여 닫아 간다. 수륜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작은 고개를 넘어 가야산줄기를 따라 오르면 백운동주차장에 도착을 하게 된다. 백운동주차장에는 이미 도착을 하여 산으로 오른 님들의 차가 여러대 주차되어 있다.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님들이 많다.
마애불 9:22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산행준비를 마친 후 백운교로 향한다. 주차장주위의 붉은 단풍이 들어 산행초반부터 기분이 좋다. 호텔과 야생화 전시관 앞을 지나 시인의 마을이라 쓴 예전의 매표소를 지나 백운교를 건너 야영장에서 오르는 길을 찾아보니 우측 끝 지점으로 오른 소로길이 보이나 다시 등산로로 나와 백운1교를 지나 백운2교에서 1분여를 더 올라 백운동주차장 1.3km가 쓰여 있는 이정표에서 샛길로 접어든다. 이곳엔 출입금지 경고판도 있다.
샛길로 접어들면 능선으로 길이 있고 계곡으로 오른길도 희미하니 있다. 희미한 계곡길로 올라가니 무당들이 공을 들이는 장소가 나오고 그후로는 길이 없다. 이곳에서 계곡을 따라 바위 암반으로 오르다 좌측으로 길을 만들며 오르니 금시 능선길이 나온다. 이길이 나온후 조금을 더 가니 앞쪽으로 만물상 능선이 바로 앞쪽으로 조망이 되는 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2분여를 더 오르면 이정표가 있다. 좌측으로일요암터 0.2km, 우측으로 마애불 0.2km로 표시가 되어 있다. 일요암터로는 출입금지 현수막이 걸려 있고 마애불쪽은 없다. 마애불쪽은 가도 좋다는 애기로 알아 듣고 마애불쪽으로 가니 마애불이 쉽게 나오질 않는다. 좌측으로 조그만 바위문을 지나고 더 오르면 돌을 쌓은 곳이 나온다. 이곳에서 능선으로 길이 있고 우측으로 계곡을 넘어 가는 길이 있다. 우측으로 계곡을 넘어 가면 높다란 바위절벽아래 샘이 하나 있고 그 앞으로 몇기의 돌탑이 있다. 이곳의 바위벽에 마애불이 있나 한참을 찾아도 그런것은 없다. 다시 우측으로 더 가니 계곡을 오른 흔적이 있다. 계곡은 비로 인하여 쓸려 나간 터라 길을 알아 볼수가 없을 정도다. 계곡을 거의 다 오르니 능선의 바로 밑 좌측으로 안내도가 하나 보인다. 아~~하 저거로구나 ~ 가까이 다가가니 마애불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으며 그옆쪽으로 큰바위 아래로 조그만 마애불이 들어 서있다. 높이 약 150cm 정도의 작은 마애불이다.
백운대 9:32
마애불에서 곧바로 오르면 금시 능선에 닿치만 위쪽으로 아름다운 바위능선을 그냥 지나치게 된다. 이래서 바위능선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우측으로 가면 소원성취탑이 있는 곳으로 오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있는 봉이 백운대라고 한다. 이봉에 오르니 아래쪽으로 백운동지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며 만물상 능선과 서성재를 거쳐 칠불봉에 이르는 백운동쪽의 가야산 모습이 한눈에 들어 온다. 또한 수륜면쪽으로의 조망도 좋다.
하늘바위 10:00 ~10:07
백운대에서 내려오면 다시 소원성취탑이다. 이곳에서 앞쪽으로 있는 바위암릉으로 오른다. 어떤이는 이곳을 백운대라고도 하고 동장대라고도 한다. 어쨋거나 이곳의 경치가 참으로 좋은 곳이다. 바위암릉으로 오르는 첫머리에 나무를 세워놓아 쉽게 오르도록 하였다. 암릉에 올라서도 몇 번은 힘을 모아 바위에 올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바위암릉을 빠져 나갈때는 우측으로 내려서 바위를 안고 돌아야 한다. 아름다운 바위 암릉을 지나면 마애불에서 올라 온길과 만난다. 여기서 다시 좀 더 오르면 하늘바위다. 이정표가 있다. 용기사지 1.1km, 해발 900m다. 하늘바위에 대한 내력이 적힌 안내문도 서있다.
이런문구가 적혀 있다.
하늘바위 바로 아래쪽에 보이는 기암의 봉우리는 천상의 옥황상제가 내려와 산신과 함께 노닐던 백운대로 속세의 먼지 한 점 때 묻음 없이 수백리 광활한 시계를 펼쳐 주는 성령으로 불려 지고 있다. 주변에는 원형에 가까운 가야산성터와 신라하대의 마애여래 입상, 고려말기의 일요암지, 육대신장등의 문화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런 문구로 보아 아래쪽에 있는 바위봉은백운대가 맞는듯하고 우리는 올라오면서 마애여래입상은 보았고, 이정표에서 일요암지와 길이 갈려 그곳은 보지 못하고 올라 왔다. 잠시 하늘바위 꼭대기에 올라 시원한 바람과 좋은 시게를 감상한 후 내려와 동성봉으로 향한다.
동성봉 10:40
하늘바위를 지나면서 부터는 계속 오른다. 10여분 후 용기사지로 가는 길머리인 동성재에 닿는다. 동성재엔 커다란 산소가 있으며 헬기장으로도 사용을 하고 있다. 몇 달전 용기사지에서 동성봉과 칠불봉사이의 고개까지 오른 후 이곳까지 내려와 용기사지를 거쳐 백운동으로 하산 한적이 있다. 동성재를 지나면서 부터는 고도를 점점더 높여 가파라지기 시작한다. 동성재에서 숨을 몰아 쉬며 24분을 가니 바위봉이 나온다. 아래쪽으로 수륜면일대의 모든 것이 다보인다. 성주톨게이트를 지나며 계속보이던 곳이 이쪽바위봉들이다. 바위봉바로 아래쪽에 비박터가 있는 것이 누군가 애기 했던 의자가 있던 야영터 인가보다. 여기 이바위봉이 동성봉으로 삼각점이나 정상에 대한 표시는 없다.
두 번째 고개안부(좌 용기사지) 11:53
동성봉에서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30여분을 가는 길엔 낙엽이 푹푹빠지는 지점도 지나고 능선을 이쪽저쪽으로 몇 번을 넘어 다닌다. 고개안부전 바위를 좌측으로 우회하여 지나면 첫 번째 고개안부다. 용기사지 쪽에서 올라온 길이 있다. 이곳에서 잠시 배낭을 벗어 놓고 우회하여온 바위봉에 올가가본다. 조망이 참으로 좋다. 수륜면 일대와 올라온 동성봉쪽능선 만물산능선쪽 칠불봉쪽 어느한곳 막힘이 없는 곳이다. 앞쪽으로 바둑이 처럼 생긴바위봉이 특이 하다. 바위봉을 내려서니 바위틈사이에 고드름이 달려 있다. 고개안부로 내려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앞쪽에 보이던 바둑이 바위를 오르는데는 5분이 소요된다. 바둑이 바위를 지나 협곡에서 보는 조망또한 좋다. 다음 전망이 좋은 바위봉까지는 15분여가 소요된다. 전망봉에서 내려오면 다시 고개안부다. 용기사지쪽에서 올라온길이 여기도 있다.
칠불봉 13:25 ~13:50
이제 부터가 가야 공룡의 가장 힘든부분이다. 처다 보면 도저히 오를수 없을것 같은 바위 봉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고개안부를 지나 오르기 시작한다. 바위봉으로 오르는 첫머리에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고드름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는 우회길이 있으나 우리는 바위를 오르기 위하여 좌측으로 붙어서 오른다. 바위 정상까지 오르는데 15분여가 소요 된다. 바위 정상에 올라서니 이곳또 한 조망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칠불봉 쪽으로 비스듬히 이어지는 바위능선을 따르면 급경사로 이어지는 슬랩지대다 슬랩지대를 살금살금내려서 아래쪽을 보니 도저히 내려설수 없을것 같다. 아래쪽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초행길에 이곳으로 무리수를 두어가며 갈수는 없는일 다시 돌아 올라와 올라 왔던 쪽으로 조금을 더가 옆으로 돌아서 내려서 바위봉을 돌아와 올려다 보니 엄청 무시무시한 바위다. 아래쪽으로 깍아지른 절벽에 안쪽으로 푹들어간 형태이므로 잘돌아 왔다는 생각이 절로난다. 30m 보조자일로는 어림도없는 지형으로 위쪽에 보조자일을 걸만한곳도 없다. (12:10)
다음봉은 좌측으로 고개를 넘어서 바위의 각진면을 잡고 올라 긴 60도 경사의 긴슬랩을 올라야 한다. 아래쪽을 내려다 보면 무섭지만 위만 보고 오르면 바위면이 신발에 잘붙어 오르기는 좋다. 이바위봉에 올라 되돌아 우회하여 내려온 바위를 보니 거대한 공룡과 같다. 좀 무서운 생각이 든다. 오늘내 이곳에 잘온것인지 여기를 무사히 관통을 할것인지 도중에 포기를 할것인지 이제 나이 탓인가 자신감이 떨어진다. 이바위의 정상부는 소나무와 잡목이 어지럽게 자리잡고 있어 정상부는 피하고 정상부의 바로 아래지점 소나무가 있는 곳에서 바위사면을 타고 넘으면 손쉽게 바위봉 넘어로 갈수가 있다.
보기엔 어려워 보이지만 막상 붙어 보면 어렵지 않게 통과를 할 수가 있다. (12:35분)
다음 작은 봉은 전혀 오른 흔적이 보이지 않아 옆으로 우회를 한다.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우회를 한봉이다. 규모는 크지 않치만 반대쪽으로 가보니 남쪽면으로 긴 크랙이 아래까지 이어 졋지만 낙석이 많고 위험한 지역으로 보인다. 굳이 이 작은 바위봉을 넘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작은 바위봉을 우회를 하여 다음 봉은 우측편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바위봉을 오른후 암릉을 통과 하듯 여러개의 바위들을 넘으면 앞쪽으로 또 거대한 바위가 나온다. 오를 틈이 없다. 일단 안부에서 내려선 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몇m를 내려서면 나무를 잘라 내여 훤하게 트여 놓은 지점이 나온다.
이곳에 도착했을때 처음으로 칠불봉에서 내려오는 5명의 산행객을 만난다. 남자 1명 여사들4명으로 된 팀인데 무사히 이곳을 통과 할지가 의문이다.
칠불봉에서 내려오는 폼도 계곡길을 따라 간신히들 내려오는 것 같던데 ~~~
우리는 이곳에서 그들이 내려온 계곡길과 달리 바위에 바짝 붙어 가니 하얀 얼음 기둥이 웅장하게 펼쳐진 부분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오른다. 중간지점까지 오르면 길이 양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다시 좌측으로 오르면 우리가 오던 방향 쪽으로 가는듯 하지만 이길이 능선으로 가는 가장 좋은 길이다. 이길을 따라 바위봉 정상까지 올라 갔다 다시 내려와 칠불봉으로 가야 한다. 칠불봉전 마지막 봉이다. 이바위봉에 오르니 아래쪽으로 철계단을 오르는 많은 님들이 보인다. 저곳이 어딘가 한참을 생각하니 아~~하 서성재에서 칠불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저 철계단을 타고 올라야 칠불봉이다. 이곳에서 보니 칠불봉의 끝지점에 세워논 안내판이 보이며 상왕봉이 가까이 보인다. 13:16
이제 마지막 칠불봉만 남았다. 의외로 칠불봉으로 오르는 바위는 쉽다. 오르는 바위면에 자란 천년송이 이곳을 오르는 님들한테 많이 시달렸음직하다.
우리도 이나무를 배경삼아 포즈를 잡느라 많은 고생을 시켯다. 이나무를 통과하여 바위암릉을 돌파한 후 마지막 칠불봉의 바위면을 타고 오르니 아 드디어 무사히 가야공룡을 돌파했다는 뿌듯한 행복감이 밀려 온다. 조금은 위험했고 험했던 가야공룡이다. 많은 님들이 애용하는 코스가 아닌관계로 붙잡고 버틸 줄하나 없는 천연그대로의 때묻지 않은 곳이다. 칠불봉에 오르니 두사람이 있다 내려 간다. 우리셋만이 칠불봉을 점령하고 있는것이 못마땅 한지 금새 여러님들이 몰려 온다. 칠불봉은 두달전에도 올라 왓던 곳이지만 그때와 또 다른 모습이다. 그때는 비가 와 우충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좋은 날씨에 산뜻한 모습이다. 밝고 청량한 단풍은 이미 말라서 떨어졌지만 산아래쪽으로는 아직도 붉은 색깔이 남아 있어 좋다. 칠불봉에서 잠시 점심식사를 한후 상왕봉으로 향한다.
상왕봉 14:05 ~04:10
칠불봉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상왕봉으로 향하니 15분이 소요된다. 정상에 올라 정상석과 우두정에 신고를 한후 하산을 한다.
서성재 14:54
상왕봉에서 다시 내려와 칠불봉사이에 있는 암릉으로 올라가 마지막 칠불봉과 상왕봉사이에있는 암릉마저 타고 넘은후 칠불봉아래 철계단을 타고 내려선다. 철게단을 다지나 조금을 더가면 홀로 서있는 입석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칠불봉에서 본 구미의 아줌니들한테 과일을 얻어 먹은후 서성재에 도착을 하니 이곳에는 많은 님들이 있다.
제단바위(촛대바위) 15:43
서성재에서 서서히 오르면 4분후 상아덤 안내문이 있는 곳을 지난다. 이곳을 지나면 하늘로 오르는 문 인양 우측으로 비스듬히 놓인 바위사이로 바위문이 하나 있다. 이바위를 지나 조금을 더 가면 이정표가 있다. 서성재 0.4, 백운동주차장 3.2km 지점으로 이곳에서 심원능선이나, 백련암쪽으로 빠져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아주 먼 예전에 눈이 많이 쌓인날 백련암에서 이곳으로 온적이 있다. 그때는 샛길이니 비등산로니 하는 말이 없던 시절이 였다.
이곳에서 내려가며 보는 모습이 오르며 보는 모습보다 엄청나게 좋다. 만물상코스는 오르며 보는 것보다 내려서며 보는 모습이 좋다. 만물상의 기묘한 바위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보이는 지점이 바로 이지점인듯하다. 안부로 내려서니 이정표가 있다. 백운동 2.9km 남았다. 나무계단을 올라 봉에 오르고 바위문을 통과한다. 암릉을 지난 후 나무계단을 내려서서 다시 안부의 이정표 119구조 06-04지점이다. 이곳에서 제단바위로 오른다. 지도에는 촛대바위로 표시한곳이다. 이곳으로 오르는 길보다 옆쪽으로 바위를 타고 오르니 그 맛이 더 좋다. 촛대같이 높다란 바위가 서있는 앞쪽으로 넓직한 바위가 두 개 펼쳐져 있는 곳이다. 난 이곳을 제단바위라 한다.
소나무 전망대 16:10
제단바위에서 좀더 가면 길 우측으로 오르는 바위가 있다. 이바위를 오르면 헬기장표시가 되어 있다. 이바위에서 내려서는 높이가 약 1.5m는 될듯하다. 그옆으로 서있는 작은소나무 한그루가 고생이다. 이곳에 오른이는 모두가 다 이소나무를 밟고 내려서야 하니 그고통이 얼마겠는가? 이 때문에 자라지도 못하는가보다. 이곳에서 내려서면 바위절벽 남쪽 편으로 나무계단이 놓여 있는 지점이다. 경치가 좋은 곳이다. 좀 지나면 바위와 바위사이를 건너는 작은 나무다리를 건넌다. 또 한번 나무다리를 건너고 내려서는 길에 2개의 계단이 연속으로 있는 지점을 지나 안부를 거친 후 완만한 능선을 따르면 소나무 한그루가 심원능선을 바라보고 있는 전망대다. 이곳의 소나무도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 많은 산님들의 시중을 들어 주느라 날이면 날마다 밟히고 눌리고 에고 지고 고생이 많다. 이곳에서 보는 위쪽의 만물상의 경치도 좋다. 뾰족이 치솟는 봉우리의 아래쪽으로 붉게물든 단풍이 곱다.
시인의마을 16:41
소나무 전망대에서 부터는 더 이상 오름길이 없는 하산로다. 바위 남쪽으로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고 백운동 1.6km 이정표(구조 06-02)를 지나면 이쁜 바위암릉이 앞쪽으로 튀어 나온 부분이 있다. 이 바위암릉 끝지점의 작은 나뭇가지에는 많은 표식기가 붙어 있다. 이곳으로 오르는 중간지점에 바위하나가 흔들흔들 흔들리는 흔들바위다. 이 바위 암릉 끝 지점의 바위에 올라 내려다 보면 백운동지구의 호텔 야생화전시관등 모든면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흔들바위를 내려와 나무계단을 지나고 백운동 1.2km 이정표를 지나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산소2기를 지난다. 이곳에서 다시 5분여를 더내려오면 만물상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시인의마을 옛매표소 자리다. 앞쪽으로 백운교가 있다.
백운동주차장 16:48 ~16:53
만물상코스 마지막 지점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야생화 전시관과 호텔을 지난다. 많은 님들이 호텔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산행을 했다. 우리도 그랫으면 조금은 덜 걸었을텐데~~
7분을 걸어 내려오면 주차장이다.
오늘 가야공룡 시작 지점인 백운대를 거쳐 하늘바위 동성봉~ 여러개의 바위봉을 넘어 칠불봉~상왕봉 ~만물상으로 이어진 9시간 정도의 어려운 산행 무사히 마치고 돌아간다. 항상 이렇게 무사히 산행마치고 돌아가는 이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오늘은 그간 닥쳐온 감기로 인하여 귀가 멍멍하니 들리지 않을 정도다. 코아래까 헐었다. 쓰라리다. 그래도 무사히 산행마무리 했다는 행복감은 있다. 오늘 같이 한 악당과 적막 고생많이 했수다. 이제 힘이 부쳐 바위에 부닥치면 벌벌 떨기 일쑤인데 끝까지 버리지 않고 같이 동행해주어 고맙네 ~·다음에 언제 또 바위에 붙어 보자구~!~
산행시간 ; 8: 30분 소요
산행거리 ; 약 12km
서청주 ~성주톨게이트 도로비 : 6700x2
연료비 ; 6만원
저녁식대 : 2만원
일인당 ; 3만냥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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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백운동~동성봉~칠불봉~상왕봉~서성재~만물상
가야산,백운대-동성봉(1,227m)-칠불봉(1,433m)-상왕봉(1,430m)-서성재 -만물상 능선 -백운대
2010.10.27.목요일 산행예정
청주 출발 6시 -백운대 8시 도착 -산행 -백운대 18시 - 청주 20시도착예정
청주종합운동장 ~성주군 백운동 : 약 160km
*산행 일시 :2009년 3월 16일 날씨 :무척 맑음
*산행 코스 :백운동-하늘바위-동성봉-칠불봉-상왕봉-서성재-백운동
*산행 진행 시간대 요약
08;26 백운동(국민호텔 주차장) 산행시작 -08;40 백운1교 -08;47 주차장 1.3km지점 (입산금지)플랭카드 -09;00 가야산 18번지점 ..840m...휴식 20분 (일요암터 0.2-마애불0.2) -
09;45 약수터 -09;49 860m지점 -09;53 마애불 -09;58 동장대 -10;07 하늘바위 -10;24 헬기장 -10;40 능선오르기전 (휴식20분) -11;50-12;20 중식 -13;34 동성봉 -14;50칠불봉
15;00 상왕봉 -15;54 서성재 -16;35 백운동(국민호텔)하산완료
05:30 백운동주차장 도착
05:38 주차장 출발
어둠이 남아있는 새벽길을 따라 백운동탐방지원센터 방향으로 올라간다. 백운교를 건너 야영장으로 들어서서 들머리를 찾는다. 다행히 주위를 분간할 정도로 날이 밝아 사면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가보지만 무덤에서 길은 끊어지고 다시 능선으로 붙어보아도 잡목이 앞을 막아 왔던 길의 위쪽 희미한 길로 되돌아 나오다 보니 우측으로 길이 보인다. 하지만 이 길도 어디선가 사라져 버려 적당한 곳에서 무조건 위로 치고 오른다. 초반부터 고전이다. 잡목을 뚫고 급경사 지대를 얼마간 올라서니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바로 전망바위이다. 안내리본도 보이고 제대로 길을 찾은 것이다. 백운교에서 10분 정도면 올라 올 수 있다 했는데 무려 20여분을 까먹었다.
#안내판에 끄적이지는 않았지만 현위치에서 백운교를 지나면서 곧장 야영장 맨윗단 좌측편(바닥에 박스두겹 깔려있다)으로 스며들면 바닥으로 계곡물 끌어가는 PVC파이프가 보이고 길의 흔적이 뚜렷합니다. 이 길을 따라 쉬엄쉬엄 올라서면 곧바로 백운대로 이어지고. 다만,관리사무소에서 바로 보이는 능선이므로 조용히 숨죽여 가야 한다.
(통상 백운2교 지나서 우측 경고판 뒤로 올라가는데 거그는 불법이지요! 여기는 샛길이라는 말도 없고 .. 그냥 산길이니 착한 길입지요 ^^)
하여간, 백운대까지 잠시 릿지를 경험하고-마애불 둘러보고-동성봉 경유하여-호젓한 길과암봉 꼭대기 죄다 올라가며-칠불봉으로 간다.
출발해서 여그 원점까지 도상 10km니까 6시간이믄 충분하것지 했는데 어찌 하다보니 7시간 30분이나 소요되었네요)
06:18 능선 전망바위를 지나 봉우리에 올라서고 암릉길로 진행한다. 가야할 백운대의 절벽이 아찔하다. 저기를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하며 바위사이길을 따라간다. 백운대 오름길 입구에서 길이 보이지 않아 잠깐 헤매다가 바위위로 올라가는 길을 겨우 찾아 따라 가니 우측 바위위에 로프가 걸려 있다.
07:17 로프지대-로프가 없으면 바위에 걸쳐진 고목나무를 이용하여 올라가야할 곳이다. 로프는 최근에 새로 설치한 듯 아주 튼튼하다.
07:33 백운대(동장대)정상-백운대와 마애불과 하늘바위로 사이의 암릉이 아기자기하다. 그러나 암릉을 통과하기는 불가능하다.
07:41 소원성취 돌탑-백운대에서 급경사 길을 내려서니 돌탑이 있는 안부이다. 암릉으로는 진행할 수 없어 좌측 산죽길을 따라간다.
07:44 마애여래입상- 마애불에서 능선 안부로 올라서서 우측의 암릉으로 조금 가면 특이한 바위가 나타난다.
07:49 일명 좌변기(?) 바위-하늘바위에서 내려다 보면 영판 좌변기처럼 보인다.
07:55 하늘바위-이곳에 오니 이정표와 가야산 16번 119 구조요청판이 있다.
08:03-08:29 가야산 15번 119구조 요청지점 바위 전망대에서 빵으로 아침식사
08:34 동성재 - 가야산 14번 구조 요청지점이 있는 헬기장이다. 좌측 용기사지에서 올라오는 길이 보인다. 가야할 길은 직진 산죽길
09:00 사각형의 문처럼 희한하게 생긴 소나무를 통과한다.
09:08 동성봉 전위 바위봉에서 조망을 즐긴다.
09:15 동성봉(1227m) 정상-동성봉 정상은 특별한 표지가 없는 바위지대이며 등로상의 의자가 놓여 있던 야영터를 정상으로 여긴다. 의자는 숲에 버려져 있다. 여기부터 길은 주로 좌측 사면길을 따른다.
10:03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가야 하는 바위오름길
10:26 잘못 들어선 암봉사이의 안부-우측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다가 길을 놓쳐 무심코 오른 곳이 암봉사이의 안부이고 넘어가는 길이 보여서 내려가니 골짜기로 떨어지는 길이다. 얼마간 진행하다 다시 올라와 사면에서 정상 등로를 찾아 진행한다. 암봉으로 릿지할 생각은 엄두도 나지 않아 그대로 사면길을 따른다. 칠불봉 근처에 오니 좌측위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린다.
10:59 칠불봉에서 내려오는 철계단 옆으로 빠져나온다. 철계단을 오르지 않고 바로 상왕봉으로 향한다. 상왕봉 오르는 철계단에서 다리가 너무 아파 힘들다.
11:09 상왕봉(우두봉) 정상 - 수도산 방향은 구름으로 가려 있다. 꼭대기의 연못(우비정)에는 여전히 물이 가득하지만 올챙이는 보이지 않는다.
11:29 칠불봉 정상-사람들로 북적이는 칠불봉에서 지나온 능선을 조망하지만 구름으로 능선을 확연히 가늠할 수 없다. 꼬리를 물고 끝없이 사람들이 올라온다.
12:09 서성재 - 만물상 능선방향은 올라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 중간에 정체가 심하다며 만물상 방향으로의 하산을 통제하고 있다. 눈치를 보고 만물상능선으로 들어선다.
12:20 상아덤(서장대)- 그리움 릿지 능선으로 가서 점심을 해결하려 했으나 상아덤의 바위틈새를 들어서기가 까다롭고 암봉을 넘어가기가 힘들어 이곳에서의 점심장소가 마땅치 않아 계속 진행한다. 올라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정체가 이어진다. 양해를 구하면서 길옆으로 내려간다.
12:33-12:54 점심-등산로를 약간 비켜난 능선의 작은 바위 있는 곳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14:50 백운동 탐방지원센터 앞-
15:03 백운동 주차장
※산행시간 약 9시간 25분
※산행거리 약 1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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