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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록

0966 구례 봉애산~왕시리봉~평도마을(피아골입구) 2016.11.12.토요일 맑음

구례 봉애산~왕시리봉~평도마을(피아골입구)

2016.11.12.토요일 맑음

참석인원 : 청주 산사랑 산악회 43

 

청주 종합운동장 07:00 -복대동 07:15 -서청주 톨게이트 07:25 -벌곡휴게소 08:03 ~08:19 -오수휴게소 09:13 ~09:24 -구례 화엄사톨게이트 09:49 -한수교앞에서 좌측으로 -토지면 송정리 둘레길 입구 주차장(안한수내, 해발 약110m) 10:12 ~10:15 -둘레길 임도 커브지점에서 산길 초입(우측으로, 1.11km, 해발 약180m) 10:31 -쉼터(1.28km, 250m) 10:37 -목아재 삼거리(2.5km, 480m) 11:00 -잡목길 -봉애산 정상(3.15km, 612m) 11:16 -해발 약800(4.70km) 11:50 -안부(통천문, 6.05km, 1085m) 12:33 ~12:50(중식) -선교유적지 삼거리(6.45km, 1212m) 13:10 -선교사 유적지(7.14km, 1150m) 13:25 -다시 삼거리(7.78km, 1212m) 13:43 -1220(7.99km) 13:46 -왕시리봉 정상(8.11km, 1243m) 13:49 -안부 삼거리(8.42km, 1225m) 13:57 -느진목재(9.53km, 975m) 14:23 -서울대학교 학술림 표지판(11.04km, 600m) 15:00 -세멘트임도(11.85km, 420m) 15:20 -마을 삼거리(좌측으로0 15:35 -남산마을 삼거리 15:41 -피아골 도로(평도마을 경로당, 13.55km, 250m) 15:48 ~17:23 -화엄사 톨게이트 17:55 -여산휴게소 18:55 ~19:05 -서청주 톨게이트 20:00 -청주 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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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시루봉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에 있는 지리산의 봉우리이다.

 

지리산 노고단(老姑壇, 1,507m)에서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을 향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상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 1212.1m이다. 정상부가 펑퍼짐하고 두루뭉술하게 생겨 마치 큰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왕시루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정상에 서면 섬진강이 내려다보이고, 백운산과 마주 보고 있어 경관이 뛰어나다. 왕시루봉에서 북쪽으로 문바우등(1,198m), 질매재를 거쳐 노고단에 이를 수 있으며, 질매재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피아골대피소가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옮김)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지

지리산 왕시루봉 일대에 선교사들이 지은 주택이 모여 있는 곳

 

해발 1200m인 지리산 왕시루봉에 선교사들이 지은 주택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2013 1 29일 한국 내셔널트러스트(National Trust)가 시민공모전 이것만은 꼭 지키자를 통하여 선정한 보전대상지이다. 1900년대 초 기독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국내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풍토병으로 고생하자 이로부터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부가 지리산 일대에 수양관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세계 각국의 건축양식으로 1960년대 무렵에 지어진 목조주택, 토담집 등 창고, 채플실, 수양관으로 쓰였던 건물이 남아 있다.대표적으로는 사롯데 벨 린튼(Charlotte Bell Linton) 가옥이 있다. 이 가옥의 외부는 북미식 오두막 양식으로 지어진 반면 내부에는 한옥 양식인 아궁이, 온돌, 툇마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도성래(Dr Stan Topple) 가옥도 노르웨이 산악 주택의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한국적 요소들을 가미해 서까래, , 도리 등을 배치하였다. 이밖에도 영국식 농촌 가옥을 변형하여 지리산 억새를 엮어 만든 배도선(Peter R. M. Pattison) 가옥, 일본의 갓쇼즈쿠리(合掌造) 양식을 반영한 인휴(Hugh Linton) 목사 가옥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역사문화 탐방 (20) 왕시루봉 외국인 선교사 옛 휴양시설

계절의 변화가 한순간이다. 화려했던 봄은 한바탕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한낮 기온 30를 웃도는 초여름 날씨가 연일 계속된다. 산야도 빠르게 변색을 거듭해 온통 푸른 세상으로 변했다. 계절이 늦는 지리산 고지대 능선에도 초록향연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탐방팀은 부드러운 연초록 세상을 찾아 전남 구례군 토지면 문수골을 거쳐 선교사들의 애환이 서린 왕시루봉 외국인선교사 옛 휴양시설을 찾아 탐방산행에 나선다. 탐방지는 신록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 왕시루봉 자락이다. 그곳에 가면 그림같이 호젓하게 자리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옛 휴양시설이 있다. 문수리 중대마을을 들머리로 지소골을 올라 선교사들의 애환이 담긴 유적을 탐방하고 왕시루봉 능선을 걷다가 느진목재에서 문수사 방향으로 하산했다.

왕시루봉의 외국인 선교사촌 A자형 별장.

탐방팀은 마을을 관통하는 지소골 다리를 건너 마을 뒤의 밤나무 밭을 가로질러 계곡 옆에 난 등로를 따라 오르며 탐방일정을 시작한다. 밤나무 밭에서 능선으로 바로 오르는 갈림길도 있는데 이 길은 왕시루봉 북쪽사면의 능선 조망대가 있는 사거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초입에서 20여 분 계곡길을 오르면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임도를 만나고, 임도 위쪽으로 지소골 토굴이 있던 부근에 절터를 닦고 있다. 잠시 들러 절터를 둘러본다. 입구에는 하얀 수국이 멋지게 피어 있고, 대웅전이 들어설 자리에 올라서니 문수골과 노고단에서 섬진강을 향해 뻗어 내린 월령봉 능선이 조망된다. 이른 아침부터 텃밭에서 일하다 말고 불청객에게 차를 권하는 스님과 잠시 담소를 나눈다. 스님 말로는 옛날 이 골에 닥나무가 많이 나고 한지 만드는 곳이 있어서 지소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이곳에서 10년째 절터를 조성하고 밭을 가꾸며 생활하고 있다는데, 머지않아 멋진 용선암이 건립되길 기대해 본다. 청량한 지소골의 원시적 계곡미탐방팀은 좌측으로 절터 옆 계곡을 건너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임도 끝머리에서 계곡으로 들어서서 산행을 이어간다. 온통 푸른 숲으로 둘러싸인 계곡길, 오를수록 때 묻지 않은 원시 계곡이 산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거진 푸른 숲속의 벽계수는 하얀 포말로 부서지며 소폭을 곳곳에 만들고 음이온을 가득 쏟아낸다. 청량감을 물씬물씬 풍기며 아기자기한 계곡미가 돋보이는 지소골이다. 용선암 절터에서 선선한 계곡길을 따라 오르길 30여 분, 멋진 이단 폭포가 보인다. 지소골에서 가장 크고 멋진 폭포이다. 이름 없는 무명폭포, 지소골을 대표하는 폭포이니 지소폭포 라고 불러주자.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운치 있는 폭포 앞에서 잠시 땀을 식히고 폭포 상단을 가로질러 계곡 깊숙이 접어든다. 예전부터 숲이 깊고 수목이 많았는지 등로변에 숯가마 터도 보인다. 아궁이 윗돌이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이다. 한동안 오르니 점차 계곡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푸른 초원이 서서히 전개된다. 군데군데 철쭉꽃도 활짝 피었다. 초록융단을 깐 듯 부드러운 사초가 바닥에 깔려 하늘거리고, 수목은 온통 녹엽으로 하늘을 가득 채웠다. 그 가운데 초록을 배경으로 활짝 핀 연분홍 철쭉꽃은 더욱 은은하고 빛이 난다.

지소골 폭포.

연초록 세상의 별세계, 옛 선교사 휴양촌지소폭포에서 1시간 30여 분, 외국인 선교사 별장지대에 도착한다. 싱그러운 초록 숲속에 호젓하게 자리 잡은 옛 건물들, 반경 300m 이내 여기저기 적당히 흩어져 위치한 모습이다.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콘셋 막사 형태의 선교사 수양관을 비롯해 목조 오두막 등 현재 이곳에는 12동의 낡은 옛 건물이 남아 있다. 수양관 위쪽에는 물길을 막아 만든 옛 야외풀장도 보이는데 주변에 덩그렇게 놓인 탁자와 의자, 파고라 기둥은 골조만 남겨두고 50여년의 세월 속에 삭아 내렸다.

외국인 선교사촌의 콘셋 막사 형태 수양관.

왕시루봉 자락 해발 1100m 고지대에 위치한 선교사 휴양시설, 이곳은 1962년경에 형성됐다. 1880년경부터 방한한 외국인 선교사들, 그들은 풍토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자 병을 피해 1000m 이상의 고지대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1920년대 노고단 자락에 휴양촌을 만들었으나 여순반란사건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자 이곳 왕시루봉 자락으로 옮겨오게 됐다.탐방 팀은 시설물을 차례로 돌아본다. 건물 형태도 각양각색이다. 자료에 의하면 노르웨이 스토바, 북미식 오두막, 호주식 주택양식 등 세계 여러 나라의 건축물 형태라고 한다. 화사한 철쭉꽃과 생동감 넘친 초록 숲속에 조그맣게 자리한 낡은 별장들, 마치 요정이 사는 동화 속 오두막집 같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숲과 오두막은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왠지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한때는 활기 넘치고 생기로 가득한 휴식과 수련의 장소였을 텐데, 지금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삭고 낡은 모습으로 정적 속에 머물고 있다. 주기적으로 관리는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대부분 목조 건축물이라 삭아 주저앉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근대사의 유산으로 나름의 가치가 있어 보이는데, 근대유산 중 하나로 보존할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빨리 손을 써야 될 듯하다.

외국인 선교사촌 별장.

근대유산, 관리대책도 필요해 보여오늘 밤 비 예보가 있는데 벌써부터 구름이 몰려온다. 이미 주변에는 구름이 가득하다. 탐방팀은 서둘러 왕시루봉 자락의 사면길을 걸어 능선으로 향한다. 녹색 캔버스에 연분홍 물감을 흩뿌린 듯 은은한 철쭉꽃과 스멀거리는 구름이 어울려 묘한 비경을 나타낸다. 요정이 사는 듯한 숲속을 산책하듯 30여 분 진행해 왕시루봉 능선 사거리에 도착한다. 왕시루봉 정상으로 향하는 길과 노고단으로 향하는 능선길, 좌측의 중대마을로 하산하는 지능길이 교차되는 곳이다. 잠시 바로 옆의 전망바위에 올라보지만 온통 운해 속이다.

외국인 선교사촌 별장의 풀장.

탐방 팀은 되돌아 내려와 북쪽 노고단 방향으로 왕시루봉 능선을 걸어 느진목재로 향한다. 부드러운 흙길에 수림이 울창하고 아름드리 노거수도 즐비한 아름다운 능선길이다. 선교사 별장에서 1시간 30분가량 걸어 사거리 갈림길이 있는 안부, 느진목재에 도착한다. 좌측으로 문수사 방향 하산길이 열려 있고 몇 발짝 더 가면 키 작은 산죽 사이에 우측으로 연곡사 아래 신기동으로 내려서는 하산길이 희미하게 보인다. 탐방 팀은 좌측의 문수사 방향으로 하산한다. 큰 볼거리 없는 하산길이지만 하부로 내려설수록 계곡은 제 모습을 드러내고 날머리 부근에는 곳곳에 와폭과 소를 만들며 운치 있는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탐방팀은 느진목재에서 1시간가량 걸어내려 문수사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며 왕시루봉 자락의 별세계, 외국인 선교사 수양시설 탐방을 마무리한다. ·사진= 김윤관 기자 kimyk@knnews.co.kr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사 유적 보존을

오 정 희지리산기독교선교유적지보존연합 이사

지난 5월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36명의 목숨을 앗아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를 겪으면서 1900년대 초 외국인 선교사 67명이 우리나라에서 숨졌던 사실이 새삼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이질, 장티푸스, 콜레라 등 우리나라 풍토병에 면역항체가 없었던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은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는 절반 이상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요즘 같이 매스컴이 발달한 세상이었다면 그야말로 온 세계가 공포에 휩싸였으리라.전염병은 힘들게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우리 민족에게 또 하나의 상처를 남겼다. 1932년 외국인선교사 알렌이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quinine)를 들여왔다. 일제는 한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을 위해서 키니네를 적극 사용했지만 조선인의 병 치료에는 관심을 갖지 않아 2000 여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얼마나 참담하고 암울한 시대적인 상황인가.당시 코잇트 선교사의 2, 4살짜리 남매도 하루 간격으로 목숨을 잃어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나란히 묻혔다.영국, 호주, 미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조선에 온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이 67명이나 목숨을 잃게 되자 본국에서는 송환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들은 귀국하지 않고 병원균이 퍼지지 않은, 고지대인 지리산 노고단에 수양관을 짓고 머물렀다. 선교사들은 단지 은둔하지 않고 그곳에서 한문으로 번역돼 있는 성경을 평민들을 위해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우리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뜻 깊은 일을 했다.그들은 또 전국에 수많은 학교와 병원을 지었다. 선교사들은 이화여대, 대전한남대, 연세대, 배제대, 마산 창신대 등을 비롯한 전주, 광주, 부산, 순천 등 전국 곳곳에 수많은 학교를 세워 문맹퇴치에 주력했다. 세브란스병원, 대구동산병원, 광주기독병원 등 수많은 병원도 세웠다. 이런 외국인 선교사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문명을 누리며 편하게 살아 갈 수 있음을 가슴깊이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이런 공적을 들어 이만열 박사(전 국사편찬위원장) 지리산 수양관이 비단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유산임을 지난 2011 712일 프레스센터 국제홀에서 발표하기도 했다.선교사들이 1921년 지리산 노고단에 세운 50여 동의 수양관은 곡절을 겪었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당시 국군 토벌대가 지리산수양관을 빨치산이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파괴했기 때문에 현재는 훼손된 건물잔해와 일부 골조만 남아있다. 건물들은 아픈 현대사를 증언하고 있다.선교사들은 노고단 수양관이 파손되자 1962년 왕시루봉 1240m 고지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이렇게 탄생한 왕시루봉 수양관은 조선의 해방과 민족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남긴 문화·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유적지다.선교사들로서는 열악했던 삶의 현장이지만 건축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는 공간으로 남았다. 선교사들이 오랜 타국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 각국의 정서를 담은 건축양식으로 집을 지은 덕분에 노르웨이, 호주, 영국, 그리고 미국식 등 특이한 집들이 1240m 산꼭대기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지난 615일 지리산권 시민사회단체협의회 주최로 구례에서 열린 지리산 유적지에 관한 전문가 간담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그런데 그 시절 선교사들이 전기시설 하나도 갖추지 못한 산꼭대기에서 열악한 삶을 살다가 가셨는데도 이들의 머물렀던 공간이 화려한 별장 개념으로 소개돼 참으로 유감스러웠다.그날 간담회에 참석했던 전문가들은 왕시루봉 유적지에 대해 문화재로서 가치는 인정하나, 보존에 따른 자연, 생태 등 상충 되는 부분을 놓고 여러 의견을 나눴다. 반달곰 서식지와 생태계 보존지역으로 지정돼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행정적으로 보존지역으로 지정되기 훨씬 이전에 세워진 건물과 터전이기 때문에 선진국처럼 마땅히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한 작가의 말이 생생하다. “격동의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건축물이 얼마 되지 않는 한국에서는 건축이 아름답고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살아남았기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그 건축은 온몸으로 역사를 보여주고 시대를 증언한다.” 그렇다. 우리는 선교사들의 문화·인류학적인 삶의 현장을 잘 보존하는 한편, 개화기 근대사의 소중한 장소로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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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종합운동장 07:00

이번주는 청주 산사랑 산악회에서 지리산 둘레길 및 왕시루봉 산행이 있어 오래전 다녀온 왕시루봉이지만 다시한번 더 가서 그전에 왕시루봉 정상에서 정확한 정상을 확인하지 못하였기에 확인 차 가보려 한다. 전에는 노고단에서 뒤편 문수대로 돌아 왕시루봉 능선을 따라 문바우등 왕시리봉을 거쳐 다시 뒤쪽으로 이동하여 문수사 쪽으로 직등을 하여 하산을 한 적이 있다. 이때 선교사 유적지나 봉애산 쪽으로 하산을 하려 한 것인데 왕시리봉 정상석을 찾지 못하여 이것을 찾으려다 시간이 지체가 되어 왕시리봉으로 오르던 방향으로 되돌아서 삼거리 바로 위쪽 바위봉에서 문수사 방향으로 직등으로 내려서다 혼쭐이 난적이 있다. 이때를 기억하며 이번 산행을 해보려 한다. 왕시리봉 능선은 노고단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두줄기 능선 중 한줄기로 산길이 험하고 거리도 만만치 않다. 또 한줄기는 형제봉 능선 길로 화엄사골과 문수사가 있는 덕운내골 사이에 있는 능선이다. 또 한줄기는 삼도봉에서 뻗어 내린 불무장등 능선인데 이 산줄기도 왕시리봉 능선과 평행으로 내려오는 산줄기로 피아골을 가운데 두고 있다. 왕시리봉과 마주하는 산은 불무장등능선의 황장산이다. 오늘 산행출발시간은 청주종합운동장에서 7시이기에 난 집 앞에서 타기로 하였다. 버스시간에 맞추어 7시 집을 나선다.

 

토지면 송정리 둘레길 입구 주차장(안한수내, 해발 약110m) 10:12 ~10:15

집 앞에서 10여분을 기다리니 산악회 버스가 온다. 버스에 승차하여 미리 배정된 자리인 23번에 앉는다. 가면서 몇 군데를 더 정차 후 버스는 서청주 톨게이트로 진입을 하여 중부,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잠시 벌곡휴게소에서 휴식 후 다시 달려 순천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오수휴게소에서 두 번째로 휴식 후 25분을 더 달려 구례 화엄사 톨게이트로 빠져 나간다. 버스는 잠시 후 구례를 거쳐 화엄사 방향으로 향하다가 다시 하동방향으로 향한다. 토지면소재지에서 좀 더 가면 한수교가 나온다. 한수교를 건너기전 좌측으로 들어가면 송정리로 안한수내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둘레길 입구에 닿기 전 작은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가 오늘 산행 초입이 된다.

 

봉애산 정상(3.15km, 612m) 11:16

왕시루봉으로 오르는 길은 상당히 많다. 피아골로 들어가는 입구의 원기마을, 오늘 우리가 좌측으로 들어가던 입구의 한수교 좌측과 우측, 토지면소재지, 토지면 구산리, 파도리, 문수리의 중대, 문수제 부근의 보현사, 오늘 우리가 오르려는 송정리 안한수내 둘레길과, 선교사유적지길등이 있어 산행초입은 하산지점과 가까운 방향으로 잡으면 된다. 오늘 우리가 가고자 하는 산길은 지리산 둘레길 15구간을 따라 봉애산을 거쳐 왕시루봉으로 올라 느진목재에서 피아골방향으로 하산을 하는 것이다. 산행시간 대략 6시간으로 산대장님이 7시간을 주겠다고 한다. 작은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곱게 물든 단풍나무길을 따라 세멘트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우측으로 민가를 지나고 둘레길 이정표가 나온다. 좌측으로 기촌마을 8.9km, 우측으로 오미마을 9.7km가 적혀 있으며 한쪽으로 지리산 둘레길 안내도가 있다. 이곳에서 우측 세멘트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잠시 후 작은 개울이 나온다. 징검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민가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측 세멘트 도로가 이어지지만 이 길을 따라 가면 안 된다. 민가앞 개집이 있는 곳의 이정표를 잘보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들어가면 민가 앞을 지나 풀이 조금 자란 임도가 나온다. 이 임도를 따라 가면 산길을 빙 돌아서 지그재그로 오르게 된다. 10여분을 임도를 따라 오르면 임도가 좌측으로 구비져서 오르는 지점에서 우측으로 산길입구에 붙어 있는 표지기가 보인다. 이곳으로 들어가면 곧 계단길이 시작이 되어 능선으로 오르게 된다. 이 능선은 한수교에서 부터 이어지는 능선으로 우리는 봉애산 중간쯤으로 오르게 된 것이다. 이제 능선을 따라 서서히 오르기 시작한다. 10여분을 못가서 첫 번째 쉼터가 나오고 좀 더 가면 둘레 길은 능선 우측 산허리로 돌아간다. 일부는 능선으로 일부는 둘레 길을 따라가면 몇 분후 능선에서 만나고 조금 더 진행을 하면 봉애산과 목아재가 갈리는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가시잡목 길을 따라 16분을 더 올라서야 봉애산 정상에 닿는다. 봉애산 정상에는 산불감시탑이 있고 산소가 1기 있다. 정상석은 없으며 산불감시탑 철망에 표지기만 몇 개 걸려 있다.

 

안부(통천문, 6.05km, 1085m) 12:33 ~12:50(중식)

봉애산에서 잠시 가파르게 내려서고 다시 평탄한 능선을 따라 진행을 한다. 이후 파란 조릿대 길도 지나고 죽어서 말라버린 조릿대 길도 나타난다. 능선으로 길은 그런대로 잘 나 있어 산행 하는데는 무리가 없다. 평탄한 능선을 지나고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여 1000고지 정도에 이르면 암릉이 나타난다. 암릉을 지나고 다시 바위지대를 따라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하여 오르면 우측으로 피아골 방향으로 마을들이 보이고 피아골 건너편으로 삼도봉에서 이어져 내려온 불무장능선이 평행으로 이어져 화개에 닿기 전 황장산이 어깨를 마주 할 즈음 능선 길은 커다란 바위능선을 좌측 사면을 따라 진행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커다란 바위봉을 옆으로 돌아서 가면 바위사이 안부에 닿는다. 우측 바위틈새로 난 곳을 통천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같이 오르던 한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함께 왕시리봉으로 향한다.

 

선교사 유적지(7.14km, 1150m) 13:25

통천문에서 바위를 타고 올라서 좌측으로 돌아 능선으로 올라간 후 다시한번 더 커다란 바위를 좌측으로 돌아서 가게 된다. 여기도 직벽에 가까운 바위지대를 오르게 된다. 이후 능선에 닿은 후 앞쪽에 보이는 툭 튀어나온 바위로 오르면 산 아래 조망이 확 터진다. 이곳을 사자두봉이라고 한단다. 앞쪽으로 봉애산에서 부터 이어져온 능선이 있고, 그 뒤편으로 섬진강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왕의강이라고도 불리는 섬진강줄기 우측으로는 호남정맥의 거의 끝자락에 있는 백운산이 보이고, 봉애산 정면으로 보이는 산은 하천산, 밥봉을 거쳐 호남정맥길의 또아리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좌측으로는 불무장능선의 황장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위쪽으로 연곡사 탐방지원센타 위쪽으로 당재가 보이고 위로 통곡봉 삼도봉 까지 이어진다. 그 뒤편으로 보이는 능선은 뾰족이 보이는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을 필두로 삼신봉으로 이어지져 형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며 섬진강변 좌측 끝 지점은 악양 최참판댁 건너편으로 있는 구제봉을 거쳐 분지봉을 지나 하동으로 이어지는 능선이다. 이렇듯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일품이다. 답답했던 가슴이 시원스럽게 터지는 느낌이다.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똑같은 조망이 펼쳐지는 바위봉이 있고 좀 더 오르면 왕시리봉과 선교사유적지로 향하는 능선이 갈리는 삼거리다. 이곳에서 잠시 선교사유적지를 다녀오려 한다. 좌측으로 300M정도를 내려가면 우측으로 들어간 길이 보인다. 이 길을 따라 150M 정도를 들어가면 길 아래 작은 저수지가 보이고 그 아래쪽으로 둥그런 형태의 양철지붕의 건물이 보인다. 좀 더 가면 능선 우측으로도 6~7채의 뾰족하게 생긴 건물들이 보여서 일단 우측 편으로 있는 유적지를 둘러본 후 다시 돌아 나와 좌측 편으로 이동을 하여 선교사들이 풀장으로 썻다는 작은 저수지를 둘러보고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서면 둥그런 양철지붕에 몇사람이 있으며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있다. 건물을 관리하는 분 같다. 이렇게 하여 유적지를 둘러보고 있자니 안한수내에서 직접 이곳으로 오른 우리팀 들과 만난다. 둥그런 건물의 반대편으로 가면 왕시루봉 유적지에 대한 글이 적혀 있는 안내문이 있고 옆쪽으로 샘터가 있으나 이물은 위쪽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이라 식수로는 부적합해 보인다. 이렇게 하여 선교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왕시루봉으로 향한다.

 

왕시리봉 정상(8.11km, 1243m) 13:49

선교사 유적지 샘터에서 올라오는 길 쪽으로 향한다. 앞서가는 님들은 왕시리봉 정상석을 보러 가는지 계속 간다. 난 능선이 가까운 곳에서 직등하여 올라서 능선을 따라 오른다. 선교사 유적지로 들어가는 삼거리를 지나고 다시 좀 더 올라 봉애산 삼거리에 닿을 무렵 선교사 유적지에서 옆쪽 능선을 따라 오른 사람들과 만난다. 이후 3분을 더 가면 해발 약1220봉에 닿는다. 여기서 조릿대 숲길을 따라 가면 3분후 흙이 드러나고 작은 바위들 몇 개가 보이며 작은 돌 몇 개를 쌓은 것이 있는 봉에 닿는다. 이곳이 왕시리봉 정상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곳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상석이 없다. 이보다 낮은 선교사유적지 아래쪽에 왕시리봉 정상석이 잘못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은 그리 넓지 않으며 조망도 신갈나무에 가려 좋지를 않다. 표지기 몇 개만 나무에 걸려 있는 정도다.

 

느진목재(9.53km, 975m) 14:23

왕시리봉에서 7~8분을 진행하면 안부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앞쪽으로 바위봉이 있으며 그 방향으로 예전에는 등산로가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현재는 등산로가 확실히 나있는 것이 보인다. 문수사계곡까지 등산로가 잘 나있는지는 확인이 되지 않치만 오래전 왕시리봉 정상까지 진행 후 다시 이곳 바위봉에서 문수사로 내려갈 때 고생을 많이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다시 삼거리로 돌아와 느진목재 방향으로 내려선다. 첫머리는 너덜지대로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고 내려서기 나쁘다. 이후로도 길은 좋지를 않아 커다란 바위가 있는 협곡지대를 지나고 좀 더 가서야 길이 좋아진다. 이후 낮은 봉을 오르고 내리며 진행을 하면 좌측으로 문수사로 내려서는 길이 있고 몇 발자욱을 더 가면 우측 조릿대 숲으로 내려서는 길이 보인다. 이곳이 피아골 남산마을로 내려서는 곳으로 이곳을 느진목재라고 한다. 예전에는 이정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현재는 아무런 표시도 없다.

 

세멘트임도(11.85km, 420m) 15:20

느진목재에서 우측 조릿대 숲으로 내려서면 길인 듯 아닌 듯 길이 희미하니 이어진다. 사면을 따라 좌측으로 가면 작은 능선에 닿고 여기서 다시 우측 사면으로 내려서게 된다. 능선으로도 갈수는 있을 것 같다. 우측 사면을 따라 내려서면 계곡에 닿는다. 이곳까지 고로쇠물을 받는 가느다란 호스가 설치되어 있다. 주변으로는 너덜지대로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너덜을 따라 좌측으로 이동을 하면 가끔씩 길이 보이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며 간다. 산길은 계곡의 물줄기를 건너지 않고 좌측으로 이어지니 계곡 반대편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 이렇게 하여 가면 대부분 길 흔적은 보이지 않치만 어느 정도 내려서면 길 흔적이 나타나며 오래전 농사를 짓던 곳으로 보이는 석축을 쌓은 터가 나온다. 이후 좀 더 가면 서울대학교 학술림 46-2번 표지판이 붙어 있는 나무가 나오고 이후로도 길은 가끔씩 없어지다가 다시 나오고를 반복하며 내려서서 우측으로 작은 폭포와 널찍한 암반이 있는 계곡에서 앞서서 내려가던 두 분이 쉬고 있어 우리도 이곳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후 내려서니 3~4분이 지나 세멘트 임도 길에 닿는다.

 

피아골 도로(평도마을 경로당, 13.55km, 250m) 15:48 ~17:23

세멘트 임도를 따라 내려서는 길옆으로는 드릅나무 마른고사리가 널려 있으며 산 사면으로는 차나무가 심겨져 있으나 관리는 되지 않아 상태가 좋지는 않다. 이후 내려서면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여러 그루 있고, 길옆으로 커다란 상수도 물통을 지나 세멘트 길은 우측으로 방향이 틀어져 계곡을 건너게 된다. 이 부근에 화장실등 편의 시설이 있으며 위쪽으로 널찍한 암반으로 시원스런 물줄기가 흘러 내려 피서철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들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서면 마을삼거리에 닿는다. 우리는 여기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나가 연곡사 탐방센타 부근으로 간다. 조금 가면 마을 안길을 지나 남산마을 게시판이 있는 곳에 닿는다. 여기서 조금 아래쪽으로 아스팔트도로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잠시 후 토지초교 연곡분교가 나오고 다리를 건넌 후 조금 더 올라가면 연곡사로 가는 아스팔트도로가 나오고 건너편으로 평도마을 경로당이 나온다. 우리는 이곳에서 산행을 접고 팔각정에 배낭을 벗어 놓고 수도가 있어 세면도 하고 발도 씻고 한 후 커피한잔씩을 타 마시며 기다려 산대장이 도착 후 연곡사 주차장에 있는 차를 불러 내려 이곳에서 간단히 뒷풀이 후 청주로 돌아 왔다.

 

오늘 산행은 송정리 안한수내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둘레 길을 따라 봉애산 능선에 닿은 후 봉애산~선교사 유적지~왕시리봉을 거쳐 느진목재에서 피아골 남산마을로 하산하는 대략 13.5km 5시간 30분의 산행을 마무리 한다.

오늘 함께한 산사랑 산악회원님 수고 많았습니다.

 

산행시간 : 5시간 26

산행거리 : 13.55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