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록

0519 고성관광및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1일차 고성관광 청간정 ~통일전망대

산야0 2022. 12. 25. 10:43

고성관광및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

1일차 고성관광 청간정 ~왕박마을~통일전망대

2010.10.21.목요일 비

 

참석인원 ; 4명 적막내외와 울집내외

 

청주 4:18 -문막휴게소 5:38~5:52 -홍천톨게이트 6:24 -인제 7:03 -한계삼거리 7:12 -용대리 7:21 -미시령 7:38 ~7:45 -화암사 8:05 ~8:54(조식) -청강정 9:21 ~9:38 -천학정 9:50 ~10:02 -백도항 10:14 -삼포해수욕장 10:20 -송지호해수욕장 10:25 ~10:33 -왕곡마을(입구에 공현진해수욕장) 10:40 ~11:30 -진부령삼거리 11:43 -거진항 11:55-화진포 (김일성별장,이기붕별장,이승만별장) 12:16~13:28 -초도항 13:34~13:45 -대진항 13:52 ~14:25(중식) -마차진해수욕장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14:30 ~15:00 -통일전망대 15:20 ~16:15 -간성대대삼거리(진부령삼거리) 16:50 -건봉사 17:00 ~17:30 -속초덕흥식당 18:23 ~19:03 - 낙산 연수원 19:50 (1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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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고성군은 강원도 동북부에 위치하고 동경 128˚ 35' 18"로 부터 동경 128˚ 13' 41"까지 동서간 32.17㎞이며, 북위 38˚ 11' 06" 로부터 38˚ 36' 38"까지 남북간 48.13㎞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북으로 세계적인 명산인 금강산을 경계로 통천군(通川郡) 과 접하고, 동쪽은 동해(東海), 서쪽은 향로봉을 경계로 하여 인제군(麟蹄郡)에 접하였으며 남으로는 속초시 장사동(章沙洞) 을 경계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 여름은 고온 다습하여 우계가 되며 겨울은 한랭 건조하여 건계가 된다. 두 계절 사이에 봄과 가을이 있어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성 기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후는 지역 특성에 따라 남해안형, 서안형, 내륙형, 동안형, 개마고원형 등 크게 5개로 나눌 수 있다.

고성지방이 속해 있는 동안형은 다시 남부동안형, 중부동안형, 북부동안형으로 나눌 수 있다. 고성지방은 동안형 기후구 가운데서도 비가 많고 바람이 많은 중부동안형에 속한다.

고성지방 기후는 태백산맥과 동해안 바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우리나라의 날씨는 겨울철에는 차고 건조한 북서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추위가 계속 되며 여름철에는 고온 다습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영향을 주로 받아 무더운 날씨가 계속된다. 또 7월에는 일반적으로 장마가 있고, 6·7·8·9월에는 태풍도 한 두 차례씩 불어와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할 때도 있다. 고성지방은 태백산맥과 동해바다의 영향으로 영서지방과는 서로 다른 기후를 보인다. 겨울철이면 연일 혹한이 계속되는 영서지방과는 달리 영동지방에 속하여 있는 고성지방은 겨울철에도 영서지방보다는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여름철에도 영서지방에서는 폭염이 계속 되지만 고성지방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영서지방 보다는 서늘한 편으로 피서객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간성읍

1910년 한일 합방으로 간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19년 고성군에 예속 됐다.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괴치하에 들어갔다. 1954년 10월 21일 법률 제350호인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 시행에 의거 간성면으로 된 후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따라 간성읍으로 승격됐다.간성읍은 현재 흘리출장소를 두고 있었으나 1998년 행정기구 축소에 따라 폐쇄 되었다. 법정리는 17개 행정리는 33개리 116개반을 형성하고 있다. 남·북천 유역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된 전형적인 농축 경영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간성읍의 총면적은 179.95㎢ 이다. 그리고 주민 미거주지역인 수동면의 면적은 144.07㎢ 이다.

 

화진포

1973년 개장된 화진포해변은 수만년 동안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서져 만들어진 모나즈 성분의 모래로 구성된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모래를 밟으면 소리가 나고 개미가 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얕은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우리군 시범해수욕장으로 기암괴석이 신비의 극치를 이루고 있으며 광활한 화진포 호수에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자연풍광이 수려한 해변으로 화진포의성(김일성별장), 이승만초대대통령 별장, 이기붕별장, 화진포해양박물관이 있으며, 동해에 한가로이 떠 있는 금구도의 대나무 숲과 갈매기의 나는 모습은 천하의 절경이다. 1990년11월 24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고 조성계획이 수립되어 주차장과 진입로 확포장, 화장실 등 기반시설 등을 갖추어 가고 있는 곳이다.

 

송지호해변

화진포해변과 성분이 같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곳으로 연간 수십만명의 피서객이 찾아오는 곳으로 수심이 낮고 깨끗한 백사장 전면으로 주위의 경관이 수려한 죽도가 동해바다위에 놓여있다. 주변 송지호와 울창한 송림이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할 뿐 아니라 민박등 숙박시설의 이용이 편리하여 가족단위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백도해변

백도해변백도해변은 수심이 낮고 국도변에 접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해수욕장 서편에는 송림이 우거져 가족단위의 해수욕장으로 매년 해수욕장과 백사장이 사계절 운영된다. 바다의 남동쪽에는 백도라는 아름다운 섬이 있는데, 이는 많은 갈매기떼의 배설물이 쌓여 하얗게 보여 백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최근 주차장 시설등을 확충하여 많은 피서객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며, 주변에 민박이 산재하여 안락한 휴가를 즐길 수 있다.

 

봉포해변

봉포항과 연접하고 천진해변과 연접한 지역에 위치한 곳으로 작은 바위들이 산재해 있고, 백사장이 있어 낚시와 해수욕을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으로 90년 개장한 이래 매년 해변과 백사장이 사계절 운영된다. 이곳에서는 봉포항구에서 생산되는 싱싱한 활어회를 즐길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방파제에서는 연중 바다낚시를 할 수 있다.

 

천진해변

토성면 천진시내와 인접한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천진항과 연접하여 초생달 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백사장이 펼쳐저 있는 곳으로 1972년 개장된 이래 매년 해변과 백사장이 사계절 운영되는 곳으로 민박예고제마을로 운영되는 곳이다. 수심이 낮아 가족단위와 젊은이들의 피서지로 각광받는 곳으로 매년 오징어 잡기대회가 열리는 곳이며, 천진항포구에서 생산되는 싱싱한 활어회를 즐길수 있고, 방파제에서는 바다낚시를 즐길 수 있다.

 

명파해변

동해안 최북단에 위치해 주변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조용한 해변에 희고 고운 백사장은 가족단위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통일전망대 길목에 위치해 있어 통일전망대를 관람하는 피서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매년 군부대와의 협의로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명파천 하구에 위치해 있어 민물놀이도 함께 할 수 있다.

 

아야진해변

아야진해변은 주변경관이 수려한 곳으로 크고 작은 바위와 맑은 바다, 깨끗한 백사장이 어울려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합한 곳이다. 고운 모래가 깔려있고 수심이 해변에서 30m까지는 1.5m~2m정도로 안전하게 수영할 수 있는 곳으로 매년 군부대와의 협의로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으로, 낚시와함께 수영을 즐길 수 있는 피서지이다

등등 ~~~

 

화진포

송림과 해당화가 어우러진 철새도래지고성에는 강 하구와 바다가 닿는 곳에 생긴 석호가 두 곳 있다. 송지호와 동해안 최대의 화진포호가 그렇다.호숫가에 해당화가 만발해 이름 붙여진 화진포는 둘레 16Km의 동해안 최대의 자연호수이며 넓은 갈대밭 위에 수천 마리의 철새와 고니가 날아들고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주변경관이 빼어나 옛부터 주변에 유명한 별장들이 많았던 곳으로 지금도 이승만 전 대통령별장과 이기붕 전부통령별장, 북한 김일성 별장이 안보전시관으로 남아있다.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10호화진포(花津浦)는 (이 일대는 옛적에 가평(加平)이라고 했다) 동해와 연접하여 자연풍광이 수려하고 면적 72만평 둘레 16Km의 광활한 호수의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다. 포구에 기암괴석의 신비가 극치를 이루고있으며 수심이 얕고 해저가 청아하여 주옥같은 백사장이 명사십리(明沙十里)를 이루고 있다. 해안의 솔밭에 펌프를 박으면 자연수의 물맛이 특이하게나오므로 상수도 시설이 필요없는 특징도 있다. 수천년동안 조개껍질과 바위가 부셔져 만들어진 화진포해수욕장은 호수와 교류되어 있는 염담호수(鹽淡湖水)로 해수욕장으로는 최적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연어, 숭어, 도미 등 갖가지 어족이 서식하고 있다. 관광지로서도 아무 손색이 없는 소지와 요건을 풍부히 가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 말까지는 외국인 별장지였고 해방 후 6.25 동란 전 적치하 때에는 김일성(金日成)이 쓰던 별장이아직도 남아 있고 자유당때에는 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휴양지로 사용되었었다.특히 모래빛이 하얗기로 유명하고 모래에 모나즈(monaz)성분이 많아 모래를 밟으면 감촉이 부드럽고 개미등 곤충류(昆蟲類)가 살지 않으며 맑은 동해의 해수가 화진포 담수와 교차하여 해수욕장으로도 최적지이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 호수의 이름은 원래 열산호(烈山湖)로 불리워졌다. 화진포 건너 마을에 열산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고 화진포 물속에서 옛날의 열산현(烈山縣)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 큰 비가 내려서 열산현 마을이 송두리채 물에 떠내려가고 마을이 있던 곳이 차차 물에 잠기기 시작하여 지금의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 사람들은 열산동 산쪽으로 마을을 옮겼다고 하는데 날씨가 좋고 바람이 잔잔하여 물결이 일지 아니할 때에는 그 옛날 촌락이 있던 터와 담장을 쌓았던 자취가 보인다고 한다.가을과 겨울이면 철새들이 떼지어 찾아와 넓은 호수에서 유유히 노닐기도 한다. 또 호수주위의 경치가 좋아 죽정(竹亭), 모연(暮煙), 풍암(楓岩), 귀범(歸帆), 장평(長坪), 낙안(落雁), 가평(加平), 야종(夜種)을 화진팔경(花津八景)이라고 하는데 거진읍 원당리와 죽정리 쪽의 푸른 소나무를 화진포에서 바라보면 마치 정자를 이루고있는 것 같아 옛날에는 화진정(花津亭)이라 하였고 저녁해가 서산에 기울면 죽정, 원당, 산학리에서 저녁 짓는 굴뚝연기가 한폭의 풍경화를 이루어 태평세월을 실감케 한다. 가을이 되어 바위 부근에 단풍이 곱게 물들게 되면 그 경치는 더욱 일품이다. 호수와 맞닿은 바닷가에서 조각배에 몸을 싣고 고기잡이하던 돛단배가 돌아오는 풍경은 마치 선경(仙境)이라 할만하다. 이 외에도 백사장이 광활하여 마치 큰 평야를 연상케 하고 떼지어 놀던 기러기가 하늘 높이 날았다 호수에 내려앉는 모습은 한폭의 그림과도 같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고 무성했던 갈대가 쓰러지면 황금벌판과도 같아 옛날에 봉이 김선달이 서울부자에게 큰 평야라고 속여 이 호수를 팔았다는 전설이 있다. 또, 고성군문화원에서 1997년도에 발행한 고성지역의 기층문화에 의하면 화진포 팔경(八景)의 제 1경은 원당리 마을 앞에 호수에 비친 반달 그림자와 누런

가을곡식,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풍광이 아름다워 '월안풍림(月安楓林)', 제2경은 화포리 찻골에서 저녘 밥을 짓는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과 같다하여 '차동취연(次洞炊煙)' 제3경은 호수 주변 모래밭에 피는 빨간색 해당화가 봄에 피는 모습이 영롱하여 '평사해당(平沙海棠)', 제4경은 호수동편에 있는 장평부근에 찾아오는 많은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청명하여 '장평낙안(長坪落雁)', 제5경은 화진포 앞바다에 떠있는 금구도(金龜島)의 모습이 한가로워 '금구농파(金龜弄波)', 제6경은 화진포 호수의 물이 바다로 빠지면서 바닷물과 부딪치며 물길이 솟아오르는 모습이 마치 용(龍)이 물을 차는 듯하여 '구용치수(龜龍治水)', 제7경은 풍암별장에서 보이는 돛단배가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정겨워 '풍암귀범(楓岩歸帆)', 제8경은 모화정리(茅花亭里:지금의 죽정1리)의 호수변의 모래밭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어'모화정각(茅花亭閣)'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풍류시인인 김삿갓이 화진포에 머무르는 동안 이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 거진읍 냉천리에 있었던 건봉사와 현내면 명파리에 있었던 조제암에서 은은히 울려오는 목탁과 독경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며 삼매선경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고성군의 군화인 해당화가 이곳에서 집단으로 피어나고 있으며 1970년대부터 겨울 철새이면서 천연기념물 제201호인 고니와 청둥오리 등 철새가 많이 날아와 호수일대에 장관을 이루고 있다. 초도리 앞 500m해상에는 1,000여평 면적의 섬인 금구도(金龜島)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신라시대 수군의 기지로 사용해 해안을 지키던 곳으로 섬의 북쪽에 석축이 일부가 남아 있고 대나무 숲으로 이루어진 섬의 중심부에서 와편과 주춧돌이 1997년 4월 문화재연구소 학술 조사반에 의해 발견되기도 했다.

지금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더욱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송지호

겨울철새인 고니(천연기념물 제201호)의 도래지인 이곳은 물빛이 청명하고 수심이 일정해 도미와 전어 등 바닷고기와 잉어 같은 민물고기가 함께 살고있다 송지호 수질환경보전법에 의해 낚시행위금지구역낚시금지기간 2006.9.1~2009.8.31(3년간)6 ~ 9월 에는성인병 예방에 좋은 재첩이 많이 채취된다.송지호 일대 735,952평이 국민관광지로 본격적인 개발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1977년 10월 15일 이며 1984년 2월 1일 교통부장관으로부터 일부 실시계획이 승인 되는 등 관광지 개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었으나 본격적인 개발이 계속 늦어지다가 1997년 1억원을 들여 강원개발연구원에 송지호 관광지 조성계획 수립을 용역의뢰해 개발에 대한 기대가 그 어느때 못지 않게 크다.

 

기본현황○ 위 치 :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 인정리, 오봉리

 면 적 : 관광지 주위면적 - 735,952평

 호수둘레 : 4km (약 20만평)

기후 : 기온 - 최고 33.8℃, 최저 - 12.2℃, 실측기온 26.5℃ 수온 - 실측기온 26.5℃

만 수 시 : 수심 5m , 수면적 49.5㏊

갈 수 시 : 수심 4.5m , 수면적 44.5㏊

수소이온농도(PH) : 7.2 비중 : 1.007

서식어류 : 잉어, 숭어, 돔, 빙어, 장어 외 4종

특이사항 : 겨울철 철새인 고니의 도래지

교 통 : 오호리에서 0.5㎞ 동해 해변북쪽 국도변

 

송지호전설

현재 전해지고 잇는 전설로는 조선초기 약1500여년전에 송지호는 비옥한 땅이였는데 이곳에 정거재(鄭巨載)라는 부자가 마을 한가운데 살고 있었다.

이 정씨는 어찌나 심술이 많고 욕심이 많은지 포악하기로 이름이 높은 부자로서 고래등 같은 커다란 집을 짓고 많은 종들을 거느리면서 권세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성격이 포악하고 인색한 정(鄭)부자는 일꾼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에게 까지 사소한 일에도 트집을 잡고 횡포를 부렸다. 또소작인들에게는 무리한 수탈을 하였다. 어느 화창한 봄날 장님이 딸의 손에 이끌려 정(鄭)부자집 문을 두드렸다. "앞을 못보는 불쌍한 거지이오니 한푼 도와 주십시요." 라고 말하자 정(鄭)부자집 종이 말하기를 "여기가 뉘집인 줄 알고 동냥 구할 생각을 하시오 ? 어서 돌아 가시오.

" 정부자집 종들은 주인이 알아채지 못할 때 보낼려고 했으나 " 이런 부자집에서 동냥을 못하다니?" "가라면 빨리 가시오. 주인마님이 알면 매가 춤을추오." 이런 말들로 장님 거지와 종들이 옥신각신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웬놈이냐? 단잠을 깨우는 놈이..." "그 놈을 어서 끌어 들여라." 라는 정부자의 호령이 떨어졌다. 대청마루에 앉은 정부자에게 도움을 요구하는 장님을 한참 노려보던 정부자는 "저 놈이 내 재산에 달걀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을 방해한 놈이다.

닭이 막 알을 낳고 있는 꿈을 구고 있는 중인데 그 꿈을 깨게 하다니 아이구 원통해라. 저 놈을 마구치고 오줌이나 잔뜩 먹여 보내라." 고 소리쳤다. 장님거지는 동냥을 한푼도 받지 못한채 종들에게 모진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된채 쫓겨나 길가에서 두 부녀가 울고 있는데 이때 금강산의 유명한 고승이 지나가다 발길을 멈추고 울고 있는 장님에게 사연을 물었다. 그러자 장님 부녀는 고승에게 그간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를 하였다. 고승은 장님거지에게 몇푼의 엽전을 들려주고 정(鄭)부자의 집을 찾아 목탁을 치고 염불을 외우며 시주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시끄럽구나. 저 중놈에게 쇠똥이나 한짐 지워 보내라"라는 정부자의 호령이 떨어졌다. 종들은 고승을 외양간에 끌고가 시주걸망에 소똥을 잔뜩 담은 후 중을 내쫓았다. 고승은 문간에 나와 옆에 놓여 있던 쇠절구를 정부자의 금방아가 있는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쇠절구가 떨어진 곳에서 물기둥이 치솟기 시작했다. 고승은 왼쪽 두루마기의 고름을 뜯어 옆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 걸고 주문을 외며 사라졌다. 고승이 사라지자 물기둥은 일곱줄로 늘어나 정부자의 집과 금방아간 그리고 논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놀란 종들은 중이 묶어 놓고간 두루마기 고름에 매달려 물 속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정부자는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송지호가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맑은 날 오봉산에 올라 송지호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정부자집의 누런 금방아가 보인다고 전한다. 그 후 금방아가 탐이나서 물속에 뛰어 들어간채 영영 돌아오지 않은 사람만도 수백명이나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진부령유원지

산속에서 내려오는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관광객을 사로잡고 있으며 주위에 산간. 계곡. 하천이 있는 자연 발생적 유원지로서 이곳 마을에서 생산되는 산채,옥수수,감자,약초,토종꿀등을 직접 산지에서 살 수 있으며, 토종닭을 비롯한 토속음식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는 진부령의 많은 계곡 가운데 유원지로 개방된 유일한 구간이다. 진부령 정상에서 부터 흘러 내려오는 맑고 얼음같이 차가운 물로 유명한 곳이다. 우거진 수목과 넓은 주차공간을 확보하고 있어 진부령을 넘어오는 장거리 여행자들의 피로를 말끔이 씻어주어 관광객에게 호평을 받고있다.

간성읍에서 46번 국도를 따라 진부령 정상 가까운 곳에 진부리 마을관리 휴양지가 있다.간성읍 버스터미널에서 진부령정상인 흘리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일일 5회 운행하며, 진부리 유원지에서 하차하시면 됩니다.자가용이용자는 원통에서 간성방면으로 운행하여 진부령을 넘어, 간성 방면으로 7∼8분 내려오다 보면 우측으로 진부리 마을관리휴양지 간판이 보입니다. 간성에서 진부령방면으로는 대대리 검문소에서 서울방면으로 좌회전하여 건봉사 입구를 지나 20여분 지나면 좌측으로 진부리 마을관리 휴양지 간판이 보이고 이곳에서 좌회전하시면 됩니다.

 

도원유원지

도원1리 휴양지는 국도변에서 6km 떨어진 곳으로 산속에서 내려오는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이 관광객을 사로잡고 있으며 넓은 저수지가 있어 낚시터로도 유명하며 이곳 마을에서 생산되는 토종꿀, 송이버섯을 직접 산지에서 살 수 있으며, 토종닭 및 추어탕등토속음식이 있어 관광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성군에서도 주변의 자연환경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곳 중에 하나다. 유원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반기는 탁 트인 도원저수지, 깨끗한 계곡물이 방문객들로 하여금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하다.

토성면 도원리 소재로 국도에서 10Km이상 떨어져 있어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승용차 : 서울-미사리-양평-홍천-인제-대대리검문소(속초방향우회전)-간성읍-동광농공고앞(좌회전)-학야리(좌회전)-2km(2시간30분소요) 고속버스 : 서울 강남터미널 - 속초 고속터미널(1일28회,4시간)시외버스 : 서울(동서울,상봉동)-고성군(간성시외버스터미널) : (1일11회,3시간30분)

고성군 도원리 심방소(선녀탕)

 

장신유원지

이곳은 진부령 정상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여름에도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 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장신리 유원지는 넓은 주차공간과 수목이 우거져 장거리 여행에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어 관광객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46번 국도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물과 주위의 산, 계곡, 하천이 어우러진 자연 발생적인 유원지이며, 가족단위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여름철 깨끗한 동해바다를 찾는 피서객이 늘어나면서 진부령계곡의 맑은 물을 함께 찾는 피서객이 계속 늘어나자 고성군에서는 비지정 관광지 조례의 의거 1990년 3월22일 고성군 간성읍 장신2리 513번지 일대11.819평을 비지정관광지로 지정, 주차장 200평, 야영장 3,300평, 화장실 1동 등을 갖추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운영 관리하도록 위탁했다. 매년 피서객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이에 따라 유원지의 기반시설을 계속 확충하고 명칭을 "장신리 마을관리 휴양지" 로 개칭해안락한 휴양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장신지구는 산악계곡과 원시림 입지의 특성을살린 산림 휴양촌을 조성하고 계곡 주변 구릉지에 관광농원을 유치할 계획이며, 계곡유원지의 기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어린이 놀이공원 시설과 청소년을 위한 자연학습장을 마련할 계획이다.

간성읍에서 46번 국도를 따라 진부령 방향으로 8km 지점에 장신리 유원지가 있다. 간성읍 버스터미널에서 진부령정상인 흘리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일일 5회 운행하며, 장신리 유원지에서 하차하시면 됩니다. 자가용이용자는 원통에서 간성방면으로 운행하여 진부령을 넘어, 간성 방면으로 10여분 내려오다 보면우측으로 장신리 마을관리휴양지 간판이 보입니다. 간성에서 진부령방면으로는 대대리 검문소에서 서울방면으로 좌회전하여 건봉사 입구를 지나 10여분 지나면 좌측으로 장신리 마을관리 휴양지 간판이 보이고 이곳에서 좌회전하시면 됩니다. 승용차 : 서울-미사리-양평-홍천-인제-진부령-대대리검문소(우회전)-간성읍 -오호리(3시간35분) 고속버스 : 서울 강남터미널 - 속초고속터미널(1일 28회, 4시간소요) 시외버스 : 서울(동서울,상봉동)-고성군(간성시외버스터미널,1일11회,3시간30분소요) 시내버스 : 속초-간성(간성시외버스터미널)-교동리-장신리하차(1일 5회 운행)

 

통일전망대

고성 통일전망대는 동해안 최북단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의 해발 70미터 고지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해발 70m 지점에 위치한 전망대는 금강산이 가깝게는 16km, 멀리는 25km정도 거리로 해금강은 대부분 지역이 한눈에 듭니다. 또 해금강 주변의 섬과 만물상(사자바위), 현종암, 사공암, 부처바위등도 조망할 수가 있습니다. 중앙의 산악 능선을 바라보면 금강산 1만 2천봉의 마지막 봉우리 구선봉(낙타봉)과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을 지닌 감호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일출봉, 채하봉, 육선봉, 집선봉, 관음봉 등이 보입니다.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은 맑은 날씨에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망대에서 눈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면 해금강이 불과 5km 떨어져있고 일출봉을 비롯한 금강산의 신선대,옥녀봉, 구선봉, 접선봉과 바다의 만물상이 손에 잡힐 듯 펼쳐지고 아래에는 조국분단의 현실을 직접 볼 수 있는 비무장지대와 휴전선 철책이 우리의 가슴을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전망대의 주변에는 1983년 세운 지름 1.25m, 높이 1.87m, 무게 500근 규모의 통일 기원 범종을 비롯, 높이 39m, 전등 1천5백개가 달려 있는 전진십자 철탑, 민족웅비탑,1985년 세운 마리아상, 통일 미륵불, 351고지 전투전적지 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통일 전망대의 관문격인 통일안보공원은 전망대 남쪽으로 10km가 채 못되는 거리에 국민 안보현장으로 활용하고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지난 1987년 세운 곳으로 출입신고소, 주차장, 교육영화상영관, 매점, 식당 등을 갖추고 있습니다. 남한 최동북단에 위치한 고성통일전망대는 조국의 분단현실을 실감할 수 있는 국내 최대의 통일 교육장입니다. 1983년 통일의 의지를 다지고 망향과 분단의 설움을 다소나마 달랠 수 있는 기념비적 명소로 알려져 있고 98년부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된 후 더욱 더 국내·외 방문객들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개인 대인 : 3,000원 소인 : 1,500원 단체 대인 : 2,000원 소인 : 1,200원 주차비 : (소형) 4,000원 (대형)5,000원 (단체)5,000원출입신고(대표자 주민

등록증 지참, 통일안보공원) - 슬라이드 관람(통일안보공원 교육관) - 통일전망대 입소 - 통일전망대 전방 설명후 자유관람

 

화진포의 성

화진포의 성(김일성별장)이 세워진 연도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김일성은 1948년부터 50년까지 처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 가족과 함께 하계휴양지로 화진포를 찾았습니다. 48년 8월 당시 6살이던 김정일이 소련군 정치사령관 레베제프 소장의 아들과 별장입구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이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현재 통일부에 보관되어 있는 이 사진은 안보전시관으로 꾸며지는 화진포의 성에 전시될 예정입니다. 화진포의 성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지어져 당시 건축물로는 제법 화려함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이 별장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훼손돼 방치되다가 지난 64년 육군에서 본래의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1층 건물로 재건축, 장병 휴양시설로 이용해 왔습니다. 화진포의 성에는 옛 별장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비롯해 김일성 가족이 사용했던 응접 세트 등 각 종 유품이 모형물로 만들어져 전시됩니다. 해안가 산기슭에 위치한 화진포의 성은 광복 직후 건립, 한국전쟁 이전까지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와 함께 수시로 이용했던 곳으로 본래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물이었으나 전쟁중 크게 훼손되어 64년 육군이 본래 건물을 철거하고 지금의 1층 건물로 재건축 했었습니다.화진포의 성의 절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마주 보이는 금구도라 불리는 바위섬으로 화진포 해변에서 3백여m 떨어진 금구도는 거북 모양을 닮은데다 가을철이면 이 섬에서 자라는 대나무 숲이 노랗게 변해 섬 전체가 황금빛을 띱니다. 여름에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 해초, 전복 등을 따며 해수욕을 즐기고 겨울철에는 천연기념물 201호인 고니를 비롯한 철새가 군무를 펼칩니다.화진포의 성이 동해가 내려다 보이는 해안 언덕에 위치한 것과 달리 이승만 별장은 바다는 보이지 않고 화진포 호수만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서로 3km 정도 떨어져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진포 역사안보관까지 가는 대중교통편은 없으며 국도변(버스정류장)에서 안보관까지의 거리는 도보로 30여분(1.7Km) 의 먼 거리입니다.승용차~ 호수의 남쪽지역 7번 국도에서 진입하거나 해금강주유소 앞에서 출입할 수도 있고거진읍에서도 화진포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시내버스~ 화진포해수욕장 입구(대진중고등학교) 앞을 지나는 시내버스는 속초시 설악산 입구에서 출발하는 동해상사 1번과 1-1번 버스가 있으며 이 버스는 북쪽방면 통일전망대 가는 입구의 금강산콘도 앞이 종점입니다.

 

이승만기념관

이승만별장 뒤에 새로 지어진 기념관으로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등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친필휘호, 의복과 소품, 관련도서 등이 현대적으로 전시되어있다. 이승만별장은 이와는 좀 다르게 졍겹게 꾸며져있다. 침실과 거실, 집무실, 평소에 끼던 안경과 여권, 편지 등 유품이 흥미롭게 진열되어 있다.

 

이기붕별장

이승만과 김일성 별장 사이 호숫가에 위치해 있습니다.이기붕 별장은 192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되어 현재까지 보존된 건물로서 해방 이후에 북한공산당 간부 휴양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휴전 후에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의 처 박마리아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99년 7월 전시관으로 개수 운용하고 있습니다.박마리아는 생전에 인근 고성군 대진읍에 대진교회를 세우고 자주 이 곳을 찾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별장 내 집무실과 응접실 등이 갖춰져 있으며, 주전자, 촛대, 문갑 등이 보관돼 있습니다. 위치는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호리, 북위 38도 35분으로 7번 국도를 타고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달리다 화진포콘도 군휴양지 입구에서 우회전해 2㎞쯤 들어가면 됩니다.

 

건봉사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이다. 인적이 뜸해 한적한 고찰이지만 여름이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야트막한 기와담으로 둘러친 건봉사에는 50여 기에 달하는 부도와 탑비가 있다. 원래 건봉사에는 2백개가 넘는 부도와 탑비가 흩어져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많이 분실되었고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현위치에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우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건봉사는 법흥왕 7년(520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실 법흥왕 7년이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1878년 건봉산에 큰불이 나면서 당시 건봉사의 건물 중 3천칸이 소실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단지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 있다. 건봉사 불이문은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다. 1920년에 세워졌으며 해강 김규진 선생이 글씨를 썼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어 솟대라 할 수도 있겠다.

돌기둥이 서있는 부분은 널직한 공터로 되어있는데, 과거 건봉사의 번창했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곳 절터와 대웅전 사이 좁은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능파교라 하는 이 돌다리는 건봉사의 수많은 건물터 중 그나마 형상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대웅전 앞에도 또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 돌기둥에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5 개씩 10개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10단계 수행을 말한다.

팔상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그 앞에는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 사리탑과 부도 각비가 하나씩 서 있다.

건봉사 진신사리탑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온 뒤 세운 것으로 이로부터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게 되었다.

이 밖에도 건봉사에는 임진왜란때 사명대사에 의한 의승병봉기처이기도 했던 것을 기념하기위한 "의승병기념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6월부터 9월말까지 문화유산해설사에 의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화암사

화암사는 신평리의 세계잼버리장에서 1.5㎞ 떨어진 곳에 소재하고 있으며 신라 36대 혜공왕 5년에 진표율사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이 절에는 관음보살상6첩서병이 정조의 하사품으로 전래하였으나 해방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죽암당 부도를 비롯하여 15기의 부도가 있고 진표당의 진영을 비롯하여 16점의 진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선봉 자락에 위치해 있는 깨끗한 화암골을 비롯해 수바위, 울산바위 등 주변경관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원암온천지구내 많은 콘도미니엄으로 숙박이 아주 편리하다.

 

청간정

토성면 청간리 81번지 동해안 산록에 위치한 청간정(淸澗亭)은 설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만경청파가 넘실거리는 기암절벽 위에 팔각지붕의 중층누정으로 아담하게 세워져 있으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월출시의 장엄함과, 밀려오는 파도가 마치 뭉게 구름이 일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가는 황홀경으로 관동팔경중 수일경으로 손꼽히고 있다. 유형문화재 제32호 지정된 청간정의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미상이나 조선조 중종 15년(1520년)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1884년 갑신정변에 소실되었다가 1928년 당시 토성면장 金鎔集의 발기로 재건하였고, 그 후 1980년 8월 1일 前崔圭夏대통령이 동해안 순시중보수 정화지원한 1억3천만원으로 정자를 완전 해체 복원하여 명실공히 문화재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청간정은 천후산과 설악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리는 청간천이 동해와 연접한 산록의 기암절벽위에 아담하게 건립되었다. 정자를 에워싼 울창한 송림사이로 넘실대는 동해의 만경창파와 군집한 해조의 한가로운 몸짓, 그리고 청간천을 따라 펼쳐진 농경지의 풍요로움과 연이은 해안선 백사장의 시원스러움은 가히 관동팔경의 수일경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청간정은 본래 청간역의 정자였다고 하나 그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분명치 않다. 다만 조선시대 중종15년(1520)에 간성군수 최청(崔淸)이 중수한 기록이 있어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이후 현종 3년(1662)에 최태계(崔泰繼)가 중수하였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당시 좌상 송시열(宋時烈)이 금강산에 머물다가 이곳에 들려 친필로 '청간정(淸澗亭)'이란 현판을 걸었다. 고종 21년(1884)화재로 전소된 채 방치되었다가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金鎔集) 등의 발의로 현재의 정자를 재건하였다. 1953년 5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하였으며, 현판도 이대통령의 친필로 개판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다. 1980년 8월 1일 최규하 대통령이 동해안 순시중 풍우로 훼손되고 퇴색한 정자를 보수토록 지시함에 따라 같은 해 10월 1일에 착공하여 다음해 4월 22일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공사비는 1억3

천만원으로 정자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 건립하였으며, 아울러 휴게소 1동과 주차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초석은 민흘림이 있는 8각 석주로써 전후면 8개의 높이는 220Cm가 되어 마루 귀틀을 받치는 1층 기둥우로 되었있고 중앙부의 높이 1.2m 초석 위에 팔각형의 동자기둥을 세워 누마루형식의 아래층 구조체를 형성하고 있다. 2층은 8개의 기둥이 모두 원주이며 기둥중심에서 외측으로 60Cm정도 띄어 사면을 모두 단층 궁판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바닥은 우물마루이며 지붕측면 첫째와 둘째 기둥 사이에 정자 위로 올라오는 목조계단을 설치하고 있다.정자 주위에는 잔잔한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특히 우거진 노송과 망망대해, 그리고 신평들의 어우러짐은 가히 관동제일경이다. 정자의 바깥 쪽으로 "청간정" 현판이 게판되어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으며 안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휘호인 '청간정(淸澗亭)' 현판이 게판되었으며 이와 마주하여 최규하 대통령의 '악해상조고루상(嶽海相調古樓上) 과시관동수일경(果是關東秀逸景)' 시판에 게판되어 있다. 그리고 동쪽으로 청간정의 변천사를 약술한 '청간정중수기(淸澗亭重修記)'가 게판되어 있으며 이 중수기는 '단기 4286년 5월 10일 청파(靑坡) 김형윤(金亨胤) 병서(幷書)'라고 하여 42년 전에 작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천학정

고성군에 해안가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잘 알려진 청간정 말고도 잘 알려지지 않은 천학정이 있다. 청간정에서 북으로 10분 정도 달려 아야진 고개를 넘어 교암리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천학정은 1931년 지방유지 한치응, 최순문, 김성운 등이 발의하여 정면 2칸, 측면2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자의 정면에는 "천학정" 현판이 게판되어 있고, 정자내에는 "천학정기"와 그 좌측으로 "천학정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천학정은 동해의 신비를 간직한 기암괴석이 깍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 주위에는 1백년 이상이 된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어 풍치를 더해 주고 있다. 이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출명소이다. 보통 동해안 일출은 낙산사 의상대를 연상하는데, 이곳은 높은 기암 절벽 위 정자이며, 주위에 송림이 우거져 천하절경의 일출을 연출한다. 천학정에서 일출을 즐긴 후 북으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 문암리 항구를 들르는 것도 좋다.문암리 포구는 작은 포구이지만, 뒤에 기암 괴석이 바다로 뻗어나와 있고 한적한 어촌의 정취를 느낄수 있다. 문암포구의 능파대 위에서 맞는 일출은 동해안의 어느 해변 못지 않게 아름답다. 조용한 아침의 일출을 감상하기 위해 문암 포구를 찾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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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출발 4:18

몇일째 일기예보를 보고 날씨가 좋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산행일이 내일로 닿아 오니 일기예보가 바뀐다. 속초 강릉 동해안 지방으로 비가 온다는 예보다. 그냥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을 강행할것인가. 아니면 날자를 바꿔서 첫째날 고성관광을 먼저하고 다음날 산행을 할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역시나 비를 맞으며 산행은 무리일듯하여 앞뒤를 바꾸어 고성관광을 먼저 하기로 하고, 설악산 공룡능선은 다음날 타기로 마음의 결정을 한다음 천안에 적막에게 21일 0시 까지 오기로 한것을 4시로 변경을 하여 통보를 한후~~

다음날 3시 기상하여 출발준비를 한다. 울마님은 어제 저녁 가져갈 음식을 다 해논후라 나보다 좀 늦게 일어 난다. 밥을 싸고 반찬을 챙겨 배낭에 넣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3시50분 밖으로 나가니 아직 천안에서 오고 있는 적막이 안개가 많이 낀 관계로 15분 정도 늦겠다고 한다. 4:10여분 도착한 적막님차에 짐을 모두 챙겨 넣고 청주에서 4:18분 출발을 한다.

 

미시령 7:38 ~7:45

청주를 출발하여 중부고속도로 경유 하여 호법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문막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만종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홍천톨게이트로 빠져 나와 인제로 향하는 길에는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 하고 여러대의 차량들이 북으로 향하고 있다. 나도 그행렬의 한 일행이 되어 북으로 북으로 향하니 소양호변을 지나 인제를 지나 한계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십이선녀탕계곡으로 오르는 남교리를 지나고, 백담사 입구 용대리를 거쳐, 진부령으로 가는 삼거리를 지나 옥수골입구를 지나고, 도적소 산장입구를 지나 미시령에 도착을 하니 오늘따라 몹시 쓸쓸함을 느낀다. 불과 열흘전만 해도 차량과 인파로 붐비던 곳인데 오늘은 개미새끼 한 마리 없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하여 그런지 비구름에 묻힌 미시령 휴게소 많이 미시령 고개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미시령에 내려 사진이라도 한방 찍어 보려 했지만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닿쳐 잠시 차에서 내렸다 얼렁 다시 탄다. 미시령고개엔 지금 비구름으로 보이는 것이 없다.

 

화암사 8:05 ~8:54

오늘의 고성관광일정은 미시령부터 였으나 첫 번째 미시령을 비구름속에 맞이한 후 이제 미시령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봉포로 향한다. 봉포로 가는 중 마음이 바뀌어 화암사에 들르기로 하고 거기서 아침까지 해결한 후 가기로 한다.

미시령을 출발하여 속초로 향하는 도중 예전의 잼버리행사장 부근에서 좌회전을 하여 화암사로 들어간다. 이정표가 있다. 약 3km 정도의 거리로 기억이 된다. 화암사에 도착을 하니 금강산 화암사라고 되어 있다. 여기부터 금강산으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돌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가니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차를 주차하고 밖으로 나가니 돌다리 건너 수바위가 단연 눈에 띈다. 수바위에는 전설이 있다.

신라 후기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하며, 진표율사가 여러스님들을 데리고 수바위꼭대기에서 좌선수도를 했으며 바위꼭대기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화암사는 민가와 멀어 수행하는 스님들이 시주를 구해 공양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수행에 열심히던 두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바위굴에 지팡이로 세 번 두드리면 쌀이 나올것이 수행에만 매진하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꿈에서 깨어난 두스님이 아침에 일어나 수바위에 올라 노인이 시킨대로 하니 정말 쌀이 나왔다. 이래서 벼화자와 바위암자를 써서 화암사가 되었다는 애기다.

화암사를 한번 둘러보니 경치가 참으로 좋은 곳이다. 수바위와 화암사가 잘어울리며 조용하고 아늑한 절집이다. 우리는 식당이 있는 요사채 처마밑에 자리를 잡고 아침식사를 한다. 잠시 지나치던 분이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시지 한다. 우리는 여기도 좋으니 괜찬다 하고 울집 마님이 준비한 버섯찌개와 돼지고기 수육과 몇가지 반찬을 놓고 거나한 아침식사를 한후 화암사를 뒤로 한다.

 

청간정 9:21 ~9:38

화암사에서 잼버리 행사장이였던 도로를 따라 고성 쪽으로 나가니 첫 번째 닿는 곳이 봉포다. 봉포는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간다. 얼마 후 우리는 고성팔경중의 하나인 청간정에 도착을 한다. 청간정은 노송들로 둘러 쌓인 아름다운 정자로 이승만 대통령과 최규하대통령의 글씨가 있는 곳이다. 1953년5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정자를 보수하였으며, 현판도 이대통령의 친필로 개판하여 현재에 전하고 있다. 1980년 8월 1일 최규하 대통령이 동해안 순시중 풍우로 훼손되고 퇴색한 정자를 보수토록 지시함에 따라 같은 해 10월 1일에 착공하여 다음해 4월 22일에 준공을 보았다. 당시 공사비는 1억3천만원으로 정자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 건립하였으며, 아울러 휴게소 1동과 주차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천학정 9:50 ~10:02

청간정에서 북으로 10분 정도를 더 올라 가면 아야진 고개를 넘어 교암리라는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천학정은 1931년 지방유지 한치응, 최순문, 김성운 등이 발의하여 정면 2칸, 측면 2칸, 겹처마 팔각지붕의 단층으로 건립되었으며, 정자의 정면에는 "천학정" 현판이 게판되어 있고, 정자내에는 "천학정기"와 그 좌측으로 "천학정 시판"이 게판되어 있다. 천학정은 동해의 신비를 간직한 기암괴석이 깍아지른 듯한 해안 절벽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정자주위에는 1백년 이상이 된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어 풍치를 더해 주고 있다. 이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일출명소이다. 천학정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좌우로는 시를 적어 코팅을 하여 걸어 놓았다. 관동별골 800백리길 제9구간 시작지점이며 남쪽으로 백도를 바라보고 북쪽으로 능파대가 가까이 있어 한층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는데 상하천광 거울속에 정자가 있다하여 천학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넘실대는 푸른파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근심걱정이 일시에 사라지고 드넓은 동해의 풍요로움을 만끽할수 있으며,특히 천학정의 일출은 계절에 따라 가히 선경이라고 한다.

 

송지호 해변 10:25 ~10:33

천학정에서 백도항으로 가는 바닷가에 이쁜 바위로 된곳이 있다. 이곳에 내려 울망졸망 움푹 들어가고 나온 바위틈에 앉아 사진을 몇장 찍는다. 이곳을 돌아가면 백도항이다. 백도항에서 다시 큰길로 나와 6분여를 북으로 더 올라가면 삼포해수욕장이다. 이곳은 지나며 바라보고, 다시 5분을 더 올라가면 송지호 해수욕장이다. 반대쪽 길 건너엔 송지호가 있다. 철새조망대가 있는 송지호도 관동8경중 하나다. 송지호 해수욕장은 널따란 주차시설이 되어 있으며 해변도 모래사장이 엄청 널직한 곳이다. 동해안 해수욕장중에서 가장 좋은 모래사장을 보유한 곳이 아닌가 한다.

 

왕곡마을 10:40 ~11:30

송지호 해수욕장에서 7분여를 더 올라가면 입구에 공현진 해수욕장이 있는 곳에서 지하도를 거쳐 좌측으로 들어가면 왕곡마을이다.

송지호 북쪽에 들어선 왕곡 전통마을은 강원도 북부해안 지방으로 피서여행을 갈 때 꼭 한번 들러볼만한 곳이다. 해변과의 거리는 불과 1.5km인데 묘하게도 마을에서는 파도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오음산, 두백산, 공모산, 순방산, 제공산 등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들이 마을 둘레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산들이 에워싸고 있는 덕에 한국전쟁 때에도 대부분의 집들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까지도 고택들 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전통마을 분위기를 잘 간직하게 된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이나 순천 낙안읍성 마을처럼 규모가 큰 것도 아니고 번듯한 외관을 갖춘 집들이 많은 것도 아니지만 일단 마을 안에 들어서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에 빠져든 듯한 느낌이 든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대형 안내판을 끼고 있는, 수령이 150여 년을 넘은 노송 거목 10여 그루가 솔향을 뿜으며 여행객들을 반기고 있다.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은 총 50가구이고 기와 32동, 초가 9동이 있다. 왕곡마을에서 순메밀국수집을 꾸려나가는 함승본씨는 "이 동네가 그리 부자 동네도 아닌데 기와집이 제법 많았던 것은 더 안쪽의 구성리 마을에 기와를 만드는 가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곳 기와집들은 방과 마루, 부엌과 외양간이 전부 한데 붙은 강원 북부 지방의 고유 가옥 구조를 있다. 이런 구조는 추운 겨울이 긴 지방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양식이다. 마을 위쪽에는 강릉 함씨, 아래쪽에는 강릉 최씨가 집단으로 모여사는데 함씨가 최씨보다 조금 더 많다. 그 밖에 전씨와 김씨 성을 가진 이가 각각 2가구, 박씨가 1가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효자각이 2개나 있는 효자 마을이기도 하다. 옛스런 분위기를 간직한 마을이라 때때로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무대로 등장한다. TV 문학관 - 홍어를 비롯 배달의 기수 등 다수의 반공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엑스트라로 나선 경력들을 자랑하기도 한다. 왕곡마을 사람들의 주업은 논농사. 작게는 1천평, 크게는 1만평정도의 논농사를 짓는다. 4년 전만 해도 감자를 많이 경작했지만 판로가 없어 지금은 식구들 먹을 정도로만 재배한다. 해풍이 불어오는데다 일교차가 심한 기후 탓인지 잡곡 농사도 잘 안 돼서 밭에서조차 밭벼를 재배한다. 왕곡마을 방문을 마치고 가볼만한 인근 해수욕장으로는 송지호, 삼포, 백도해수욕장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백도해수욕장과 삼포해수욕장 중간에 들어선 자작도 해수욕장은 최근에서야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피서지다. 동해안의 해수욕장 치고는 해변 길이가 4백m 정도로 짧은 편이지만, 내륙쪽으로 활처럼 깊게 휘어들어 수심이 얕아 익사사고 번 없었다고 민박집 주인들은 자랑한다. 바다로 1백m를 나가도 깊이가 어른 가슴 정도에 불과하다. 가족 단위 피서지로 인정을 받은 뒤 최근에는 해변가에 콘도식 민박집들이 여럿 들어섰다. 2004년부터 10월 중순 "고성왕곡마을 민속체험축제"가 개최되어 과거로의 여행을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다.

왕곡마을에 도착을 하여 첫 번째로 그네를 뛴다. 예전과 같지 않아 그네 뛰는 데도 팔이 아프로 힘이 부친다. 다음으로 널뛰기를 해보지만 생각같이 여의치가 않다. 정미소를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가며 이모저모를 관람 하는데 50여분이 소요 된다. 참으로 아늑하고 조용한 마을로 한번쯤은 보고 갈만한 곳이다.

 

화진포 12:16 ~13:28

왕곡마을을 다 관람한 다음 공현진바닷가로 나와 올라가면 진부령으로 갈리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이 간성으로 고성군청 향교등은 이곳에 있다. 다시 더 올라가면 거진항이다. 거진항을 차로 들어가 한바퀴 돌아 보고 나가면 바닷가 쪽으로 조그만 바위섬들이 있다. 조그만 바위섬엔 이쁜꽃이 피어나보기에 더욱 좋다. 바위섬을 돌아 다시 큰길로 나와 조금을 더가면 커다란 호수가 나온다. 이곳이 화진포다. 화진포는 전설이 있다. 옛날 이마을에 “이화진”이란 큰부자가 살았는데 주위 사람들에게 너무 인색하고 고약했다. 어느날 스님이 시주를 왔는데 곡식 대신 소똥을 퍼주었고, 스님은 소똥을 들고서 말없이 나갔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며느리가 얼른 쌀을 퍼서 스님에게 드리며 시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스님은 시주를 받으며 “나를 따라 오면서 무슨소리가 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했는데 며느리는 고총고개에 이르러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돌아보니 이화진이 살던 집과 논밭은 모두 물에 잠겨 호수가 되어 있었다. 며느리는 그만 애통해 하다 돌이 되어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착한 심성을 가진 며느리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겨 고총서 낭신으로 모셨는데 이후로 농사도 잘되고 전염병도 사라졌다고 한다. “화진포‘는 이화진의 이름 ”화진’에서 유래되었다고한다. 고성에는 고성8경이 있고 화진포에는 화진포8경이 있다. 제1경 월안풍림,제2경 차동취연 제3경 평사해당 제4경 장평낙안 제5경 금구농파 제6경 구용치수 제7경 풍암귀범 제8경 모화정각이다. 자세한 설명은 위쪽에 있다.

화진포관광단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매표소에서 입장료 2000원씩을 지불해야 한다.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해변에서 우측으로 화진포의 성이 있다. 이곳은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는 곳으로 일제 강점기 외국인 예배당으로 지었으며, 해안절벽 송림속에 우아하게 자리한 모습에서 화진포의 성으로 불리웠으며, 해방후 북한군의 귀빈휴양소로 이용하였고, 당시 김일성과 처 김정숙, 김정일이 묵고 간적이 있어 지금도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운다.

육군복지단에서 장병휴양시설로 운영하다. 기존의 건물을 용도 변경하여 역사안보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바닷가의 풍광이 일품이다. 앞으로는 이기붕 별장과 군휴양시설 해양박물관 등이 있으며 좌측으로 화진포호수가 있으며 돌다리를 건너 이승만대통령의 별장이 있다. 김일성 별장안에는 김일성의 가계도및 여러 가지 전시물 사진등이 있다. 화진포의 성에서 우거진 송림길을 따라 내려가면 주차장을 건너 좌측으로 이기붕별장이 있다. 이기붕별장은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건축이 되었으며 해방후 북한 공산당 간부휴양소로 사용되다가 휴전이후 부통령이 었던 이기붕씨의 부인 박마리아가 개인별장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으나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개보수 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별장은 규모도 작고 아담한 작은 건물로 집주위엔 담쟁이가 이쁘다. 이곳에서 다시 군장병휴양시설입구로 나가 화진포 돌다리를 건너면 이승만별장이다. 아래채는 별장건물이고 위채는 기념관으로 별장건물은 규모는 작지만 화진포를 내려다 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방은 세칸으로 접견실, 집무실, 침실로 되어 있는 아주 소박 한 곳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및 사용하던 물건등이 전시되어 있다. 위쪽 전시관에는 이승만대통령의 일대기가 잘 전시되어 있다. 향년 90세로 타계한 이승만 대통령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렌체스카 여사와 결혼하여 독립운동및 나라를 건국하는데 힘을 쓰셨지만 3선개헌등의 무리수를 두기도 하였다. 이제 역사의 인물로 대한민국의 큰인물이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대진항 13:52 ~14:25

화진포에서 3군데 별장을 둘러본 후 우리는 통일전망대관람을 위하여 북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중 성게로 유명한 초도항에 잠시 들르니 화진포 사랑이라는 유명한 노래비가 이곳에 있으며 성돌이 동상이 있다. 이곳이 화진포 사랑의 원조인가보다. 초도를 잠시 둘러 본후 7분을 더올라가니 대진항이다. 이곳엔 등대도 있으며 제법 큰 항구다. 항구 안으로 들어가니 생선등은 하나도 없으며 썰렁하다. 잠시 이곳에서 비를 피하여 항구 가판장 들마루에 밥상을 펴고 점심식사를 한다.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 14:30 ~15:00

대진항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다시 돌아 나와 북으로 향하면 마차진 해수욕장을 지나고 이어서 조금을 더 올라가면 우측으로 주유소가 있는 지점에서 길 반대편으로 통일전망대 출입신고소가 있다. 이곳에는 호림유격전적비가 있다. 한국전쟁직전 강원도 지역 청년들과 서북단원들이 주축이 된 민간인 316명으로 유격대를 조직 호림이란 이름의 유격대로 북괴무장게릴라의 남침을 분쇄, 저지하기 위하여 유격대 활동을 하다가 산화해 갔다. 이곳에서 신고서 용지를 작성한 후 주차료 3000원 포함 일일당 관람료 3000원씩을 지불하고 30분을 기다려 오후 3시에 통일전망대로 향한다.

 

통일전망대 15:20 ~16:15

출입신고소를 출발하여 통일전망대로 향하면 명파리를 거쳐 군검문소에서 우리가 가져간 신고서 용지를 보이고 출입증을 얻어 차 앞유리에 붙이고 통일전망대로 향한다. 가는 중 남북 철도연결의 쇼가 진행되었던 제진역을 지나고 디엠젯트 박물관을 지나 출입신고소에서 통일전망대까지는 20분이 소요 되고 이곳에 도착을 하니 많은 차량들로 붐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고 통일전망대로 향하니 햇불같이 생긴 탑을 지나 남측의 마지막 화장실을 지나 전망대안으로 들어간다. 전망대의 좌측으로는 교회가 있고 우측으로는 불상과 성모마리아상이 자리잡고 있다.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긴해변이 이어지져 남으로 가고, 북으로는 군사분계선인 승도를 지나 구선봉이 보이며 해금강 위장마을 말무리반도 만물상 부처바위등이 있으며 육지로는 전망대 좌측으로 금강산 온정리로 가는 길이 보인다. 금강산 가는길 좌측으로 육지로 들어가면 북한 전망대인 351고지가 있고, 한국군 관측소인 495고지, 높다란 봉에 한국군 지피가 있고 그앞쪽으로 북한군 지피도 보인다. 이곳의 길이가 600여m가 안된다고 하니 서로간에 얼굴까지도 분간이 가능하리라 본다. 이초소들 넘어로 금강산 육선봉 집선봉 세존봉등 외금강의 2000여 봉우리가 있다 하나 오늘은 날씨가 궂어서 보이지 않는다. 통일전망대에서 관람을 마치고 6.25전적기념관에 들러 이모 저모를 관람한 후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건봉사로 향한다.

 

건봉사 17:00 ~17:30

통일전망대에서 나와 이제 남으로 향한다. 오는중 비무장지대 관람관에 잠시 들려 보려 하였으나 입장료를 징수하고 시간이 없는 관계로 그냥 나와서 간성 건봉사로 향한다. 출입신고소를 지나고 간성대대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고 조금을 가다 다시 한번 우회전을 하여 건봉사로 향한다. 건봉사로 향하는 길은 좁다란 소로길로 이어지면 가는 중에 군부대가 많이 있다. 통일전망대에서 45분이 걸려 건봉사에 도착을 하니 17:00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우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건봉사는 법흥왕 7년(520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실 법흥왕 7년이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1878년 건봉산에 큰불이 나면서 당시 건봉사의 건물 중 3천칸이 소실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단지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 있다. 건봉사 불이문은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다. 1920년에 세워졌으며 해강 김규진 선생이 글씨를 썼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어 솟대라 할 수도 있겠다.

돌기둥이 서있는 부분은 널직한 공터로 되어있는데, 과거 건봉사의 번창했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곳 절터와 대웅전 사이 좁은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능파교라 하는 이 돌다리는 건봉사의 수많은 건물터 중 그나마 형상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대웅전 앞에도 또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 돌기둥에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5 개씩 10개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10단계 수행을 말한다.

팔상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그 앞에는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 사리탑과 부도 각비가 하나씩 서 있다.

건봉사 진신사리탑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온 뒤 세운 것으로 이로부터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게 되었다.

이 밖에도 건봉사에는 임진왜란때 사명대사에 의한 의승병봉기처이기도 했던 것을 기념하기위한 "의승병기념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6월부터 9월말까지 문화유산해설사에 의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이상으로 건봉사 관람을 30여분에 걸쳐 마치고 낙산연수원으로 향한다.

 

속초 덕흥식당 18:23 ~19:03

낙산연수원으로 향하는 도중 속초시내의 덕흥식당에서 생선찜으로 저녁식사를 맛있게 해결한후 연수원에 도착을 하니 19시 50분이다.

연수원에서 방을 배정받고 새벽녘 일찍 퇴실 할것이므로 미리 사용료를 결재한 후 방으로 들어가 오늘의 일정을 마감하며 휴식에 들어간다.

내일도 즐거운 산행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취침에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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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공룡능선, 널협이골~차차골

2010.10.21~22일 설악산 공룡능선,널협이골

 

1일차

청주출발 0시 -설악동 3시 50분 도착 - 4시 산행시작

소공원-10분 0.5km-신흥사일줍문 -50분 2.5km- 비선대-180분 3시간 -마등령 삼거리 -140분 2.1km -1275봉 -180분 3km -희운각 -60분 2km-양폭대피소 -50분 1.6km -귀면암 -50분 1.4km -비선대 -50분 2.5km -신흥사일주문 -10분 0.5km -소공원

총소요시간; 13시간

총소요거리 ; 19.1km

17시 산행끝 -속초 덕흥식당으로 이동 식사후 -숙소 20시 도착 휴식

 

2일차

1방안

숙소 7시 출발 -용대리 8시도착 -산행시작

널협이골

용대리주차장 -30분 -널협이골 초입 -29분 -고인돌바위 -24분 -바깥널협이 합수점 -39분 -30m 폭포 -20m 폭포 -38분 -계곡 합수점 -2시간 -능선도착 -7분 -설악산 천연기념물 비석 -1:25분 -차차골 지계곡 -9분 -차차골 -25분 -차차골 초입

15시 산행끝 -귀가 -청주 21시 도착

 

2방안

속초7번국도 -봉포항 -천진항해수욕장 -천강진 -천학정 -교암항 -백도해수욕장 -삼포해수욕장 -송지해수욕장 -왕곡마을 -공현진해수욕장 -가진해수욕장 -건봉사 -거진항 -화진포,호수,해수욕장,이승만별장,김일성별장,이기붕별장-통일전망대 -속초,고성해안도로 -집으로

(고성팔경: 송지호,통일전망대,건봉사,화진포,마산설경,청강정,천학정,울산바위)

 

금강산 자락의 건봉사

강원도 고성군 냉천리에 자리한 건봉사는 설악산 신흥사, 백담사 등 9개 말사를 거느렸던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로, 520년(신라 법흥왕)에 아도화상이 원각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그 후 도선국사가 중수한 뒤 서봉사라 하였으며, 고려 말엽 나옹화상이 중수하고 건봉사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의한 승별 봉기처이기도 했던 호국사적지로서 ‘의승병기념관’이 있다. 융성기에는 3,183칸의 대가람이었다고 하나 6.25 전쟁 때 거의 소실되었으며, 최근 건봉사지와 사찰의 복원사업이 한창이다. 특히 건봉사에는 신라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 치아사리와 무지개 모양의 능파교(보물 제 1336호), 바라밀 문양의 돌기둥, 불이문(강원도 문화재자료 제 35호)이 옛 건봉사터(강원도 기념물 제 51호)에 남아 천년이 넘는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국내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사찰은 더러 있으나 건봉사처럼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극히 드물다. 진신사리는 그 자체가 불신과 똑같이 여겨지므로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에서는 전각 내에 별도로 불상을 조성하지 않고 사리탑을 세우거나, 전각 내에 봉안하더라도 역시 불상은 조성하지 않고 진신사리만을 모신다. 이러한 전각을 적멸보궁이라고 한다.건봉사 적멸보궁에는, 왜적이 탈취해간 후 사신의 명을 받아 일본국에 갔던 사명대사 유정께서 되찾아온 석가여래 치아사리 중 3과를 모신 사리탑이 있다. 이 사리탑은 높이 3.28m로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간성향교

교동리 마을 앞을 지나는 46번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는 간성향교는 1420년(세종2) 간성 북쪽의 용연동에 창건되어 조선시대 간성지역 관학의 중심기능과 성현에 대한 제사기능을 담당하던 곳이다.

그러나 문헌에 의하면 창건 이후 현 위치로 옮겨오기까지 모두 6차례의 이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향교의 위치는 1871년(고종 8) 군수 金相憲이 24칸 규모로 개건할 당시의 자리로서 6.25로 전소된 뒤 관내 유림의 노력으로 1960년에 명륜당이, 1966년에는 동서(東西)가 재건되었고, 1982년에 외삼문(外三門)이 건립되어 오늘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성전의 위패는 창건 당시의 것으로서 여러 차례의 재난을 모면하여 현재까지 봉안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의 배치는 도로와 인접한 외삼문을 중심으로 신로를 따라 들어서면 전면 4間, 측면 2間의 명륜당이 2층 樓閣형태로 자리하고 있고, 명륜당의 좌우에는 저면 3間, 측면 2間 규모의 동서재(東西齋)가 마주 대하고 있다. 제사공간으로 통하는 내삼문(內三門)의 정면에는 중국의 儒賢 21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성전(大成殿)과 그 전면 좌우에는 우리나라 유학자 18인의 위패를 봉안한 동서무가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다.

간성향교의 건물배치는 우리나라 향교의 전형적인 배치방식을 따르고 있으나 중국의 유현 21위가 봉안된 것이 특이하다.건물명건물의 기능명륜당[明倫堂]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건물로,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하던 강당이다.동재[東齋]성균관이나 향교의 명륜당(明倫堂) 앞 동쪽에 있는 집. 유생이 거처하며 글을 읽었다.서재[西齋]성균관이나 향교의 명륜당 서쪽에 있던 집. 유생이 거처하고 공부하는 곳이었다.대성전[大成殿] 문묘 안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대성전[大成殿]공자묘(孔子廟), 즉 문묘(文廟)의 정전(正殿). 공자(孔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殿閣)을 말한다.동무[東?]조선(朝鮮) 시대(時代) 때 여러 유현(儒賢)들의 위패(位牌)를 둔, 문묘(文廟) 안의 동쪽의 행각(行閣)을 말한다.서무[西?]문묘(文廟) 안에 있는 대성전(大成殿)의 서쪽 아래채. 여러 유현(儒賢)의 신주를 모셨다.

 

화진포 앞 금구도

화진포 앞바다 400m 건너에 기암과 송림으로 우거진 금구도는 신라시대 바다를 지키던 수군기지가 있던 곳으로 돌로 쌓은 성터가 남아있다.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바위라고도 부른다.

 

화포리 고인돌

동해안 최대의 석호인 고성군 화진포 호수 주변을 거닐다보면 가금 3∼4m 크기의 넓은 바위를 발견할 수 있다. 화진포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고성군 현내면 죽정리와 거진읍 자산리, 화포리 일대에는 선사시대 거석문화를 상징하는 고인돌이 곳곳에 산재해있다.고성군이 조사한 곳만 38기.

강원도 고성의 고인돌 유적은 아직 개발 진행 중인 관계로, 현재 가장 편하게 만나볼 수 있는 고인돌은 화진포의 성(김일성 별장) 옆 화진포콘도 앞 도로가에 있는 “화포리 8호 고인돌”이다.

화진포 콘도 앞 도로가에 북방식 지석묘로 잘 알려진 장평리 지석묘가 위치하고 있다. 이 지석묘의 덮개돌은 오각형이고 동남쪽 일부가 파손되었다. 덮개돌의 길이는 장축 260cm, 폭 220cm, 두께 40cm이다. 석실의 장축인 동벽과 서벽, 그리고 단벽인 남벽은 각각 1매의 판석으로 되어 있고 북벽은 소실되었다. 남벽의 지석은 1m정도만 남아 있고 북벽의 지석은 소실되어 없어졌다. 석실의 크기는 장축 190cm, 폭 113cm이다. 바닥에서 덮개돌까지의 높이는 약 50cm정도이다. 석실동쪽의 높이는 15cm밖에 되지 않고, 고인돌 동쪽 바로 옆에 있는 나무뿌리에 돌이 박혀있는 상태로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 고인돌이 모래구릉의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어 석실주변의 돌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지석묘는 묘실이 지하에 있다가 모래가 없어지면서 석실이 지상에 노출되어 북방식으로 보이는 것으로 판단된다.

※ 고인돌은 순수한 우리나라 말로 큰 바위 아래를 3∼4개의 돌로 괴여서 받치고 있다고 해 ‘고인돌’이라 불린다. 학술상 일반적인 의미로는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 무덤의 하나로 거석문화의 일종이다.

 

문암리 선사유적지

이 산포지는 죽왕면 최남단으로 동해안에 면한 야산(해발 41.9m)의 남쪽에 면하여 자리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야산이 감싸고, 남서쪽으로는 넓은 평야와 문암천이 흘러 동해로 흘러 들어가고, 동쪽으로는 약 400m거리에 동해안이 있어 신석기시대인들의 생활근거지로서 알맞은 곳이라 할 수 있다. 유적 일부는 텃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대부분 지역은 민가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해방지 목적으로 너비 3m, 깊이 1.5m 정도의 수로가 지나고 있어 이 유적의 중요부분을 훼손하였다. 더 이상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시급한 형편이다. 유물은 마을 뒤편 텃밭과 야산의 하단부에서 채집되었다.

특히 유물이 집중 수습된 곳은 주민들이 쓰레기를 묻기 위하여 구덩이를 팠던 지역에서였다. 수로의 단면에서 나타난 지표 하 약 90cm에서의 진흙포함층과 유물이 구덩이를 팠던 곳에서 주로 채집되는 것으로 볼 때 유물 및 유구 포함층이 잔존할 가능성이 높다. 이곳에서 수습된 토기는 구연 부분에 주로 압날에 의해 시문된 다양한 문양을 보여주고 있으며, 저부형태는 모두 평저이다. 또한 융기문 토기가 다량 수습됨으로써 이 유적의 성격 및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게 한다.

 

수바위의 전설을 간직한 화암사

화암사에 있는 수바위의 전설.

화암사는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스님들이 시주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날 이 절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두 스님의 꿈에 백발노인이 동시에 나타났다. 백발노인은 수바위에 있는 조그만 구멍을 알려주면서 끼니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세 번을 흔들라고 했더니 두 사람 분의 쌀이 쏟아져 나왔다. 그 뒤 두 스님은 식량 걱정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년 후 한 객승이 이 이야기를 듣고 욕심을 내어 쌀 구멍에 지팡이를 대고 수없이 흔드는 바람에 쌀 보시는 끊어졌다. 화암사가 벼 화(禾)자에 바위 암(巖)자를 쓰게 된 것도 이 전설에 연유한다는 이야기이다. 수바위는 아들을 점지해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신혼부부들의 중요한 참배 처이기도 하다.

화암사 앞 다리를 건너기 전, 수바위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는 화암사도 아름답지만, 수바위에서 바라보는 화암사의 모습은 누구에게든 추천할만한 절경인데, 그 중에서도 특히 가을이 아름답다.

 

울산바위(전망대)

울산바위는 미시령옛길, 대명콘도 등 강원도 고성군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어떤 장소에서 울산바위를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과 감동이 다르다. 여기에서는 울산바위 전망대를 기준으로 한다.

설악산 끝자락 속초와 고성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울산바위를 고성지역에서 바라본 그 경관은 자연의 위용과 함께 예술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암절벽의 극치를 보여준다. 해발 873m인 울산바위는 사방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둘레가 4㎞이며 6개의 봉우리로 어우러져 있다.

보는 이마다 그냥 지나지 못하고 그 위용에 압도되어 올려보게 만드는 울산바위는 그 웅장함 때문인지 명칭에 대한 3가지 설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울타리 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또 하나는 우는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그리고 듣는 이마다 가장 재미있게 여겨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되는 설이 하나 있으니 내용인즉 이렇다.

전설에 따르면 조물주가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잘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에 모이도록 불렀다. 경상남도 울산에 있었던 큰 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의 1만2천봉에 함께하고자 길을 떠났으나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금강산을 코앞에 둔 미시령에서 잠시 쉬어가고자 앉았다가 설악산에 이르러보니 이미 금강산은 모두 빚어지고 말았다. 울산바위는 그 한 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고향 울산으로 돌아갈 체면도 없어 설악산 미시령에 그대로 눌러앉고 말았다는 것이다.

 

옛 모습 그대로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왕곡마을

다섯 개의 봉우리가 둘러싸고 있어 오봉리라 불린다는 작은 마을의 옛 이름이 왕곡마을이다. 왕곡마을은 전통건조물보존지구로 지정되어 있어 가옥의 개보수가 불가하여 전통가옥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전통가옥마을이다.매년 10월 중순 민속체험축제가 열리는 고성 왕곡마을은 강릉 함씨의 집성촌으로 옛 부유층의 가옥인 북방식 ㄱ자형 겹집구조가 그대로 보존된 남한의 유일한 곳이며, 학술적 가치가 높아 국가 중요민속자료 제 131호로 지정되었다.왕곡마을 가옥들의 굴뚝 위에는 항아리가 얹어져 있다. 이는 마을에 우물이 없는데 마을의 생긴 모양이 배의 모양이라 우물을 파면 마을이 망한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하며, 예부터 내려오는 전통이기에 지금도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왕곡마을의 전통가옥, 디딜방아, 효자각, 푸르게 펼쳐지는 논과 밭을 즐기다가, 출출한 오후, 열린 문 밖으로 향긋한 풀내음 들어오는 왕곡마을 음식점에서 동치미국물로 시원하게 맛을 낸 막국수 한 그릇 먹으며 쉬어가면 어떨까.

 

망향과 분단의 설움이 어린 통일일전망대

매년 해맞이 축제가 열리는 통일전망대는, 분단의 현실과 민족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장소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아픔과 염원을 카메라에 담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